현대건축의 거장, 레스 이즈 모어 님의 묘비는 군더더기 없게
시카고 아키텍처 센터의 투어를 삼사십 개씩 섭렵한 무렵이었다. 투어 주제에 따라 같은 건물이 많이 겹치기도 하고, 비슷한 거리를 계속 오가다 보니 약간의 식상함이 있었다. 살고 있는 동네도 다 19세기 꼬불꼬불한 옛날 건축물, 투어 다니는 곳도 다 그렁그렁한 디테일의 19세기 이야기만 듣느라 지루해지기도 했다.
시카고 아키텍처 센터의 웹 사이트를 들락거리다가 어 이번에 이게 있네라고 본 시카고 그레이스랜드 묘지공원 투어.
나는 고 3 시절 수능 보기 한 달 전에도 집안 벌초와 성묘를 열심히 다닌 무덤 산책 예찬론자다. 풀이 죽어 누레진 묘지들 사이를 거닐면 맘이 많이 편해지거든. 우와 이런 게 있네? 하는 나와는 달리 남편은 추운 날 시내도 아닌 먼 곳까지 나가 남의 무덤을 뭣하러 보냐는 반응을 보였다. 거기에 건축가 다니엘 번햄이랑 존 루트가 묻혀 있대라고 해도 반응은 응 그래? 정도.
투어 개요를 쭈욱 스크롤하다가 말했다. 미스 반 데 로에가 묻혀 있다는데? 남편의 동공은 갑자기 어린아이처럼 까맣게 커졌다. 미스 반 데 로에가 독일이 아니고 시카고에 묻혔어? 하더니 당장 투어를 신청하자고.
꼬불 탱이 유럽 건물의 잔재에서 지금 우리가 보는 직선 유리 빌딩들을 만들어 낸 존경 하올 현대 건축의 창시자가 묻힌 곳에 간다니 남편은 엄청 신이 났다. 남편이 소싯적부터 학교에서 배우고 리퍼런스 한 건축 작품들은 다니엘 번햄의 후예가 아닌, 미스 반 데 로에의 후예들이었으니.
그렇게 방문한 시카고 그레이스랜드 묘지공원은, 생각보다 너무 많은 볼거리가 있었다. 시카고 아키텍처 센터에서도 이 같은 묘지공원에서 건축가 주제 외에 조각상, 역사 속 영향력 있는 여성의 묘지 투어로 3가지나 진행할 만큼. 그리고 나도 정리하다 보니 이 묘지공원 주제로 글을 열개도 더 쓸 듯..
영화 줄리 앤 줄리아의 맨 마지막에 보면, 줄리는 존경하던 요리연구가 줄리아의 스튜디오에 가서 줄리아의 시그니처 인 버터 한 조각을 놓고 온다. 그렇다면 존경 하올 미스 반 데 로에의 무덤에는 검고 직사각형인 뭔가를 놓고 와야 하는 거 아니야라고 이야기했다. 주머니에 검은 자석이라도 한 개 있었더라면 좋았겠지만 특별히 검고 네모난 뭐가 손에 집히는 게 없었다. less is more라는 명언을 남긴 분은 여기 누워 방문객이 뭐 자잘한 거 남기고 가는 걸 전혀 원치 않겠다는 생각이.
사실은 저 너른 묘비를 닦을 대형 물티슈 한 팩이 절실했다. 시카고의 매서운 초겨울 바람에 평장 묘비가 흙먼지로 잔뜩 뒤덮여서 사진이 영 ㅠ.ㅠ
미스 반 데 로에(Ludwig Mies van der Rohe,1886 ~ 1969)는 less is more라는 말을 남긴 20세기의 대표 건축가다. 독일에서 활동하며 1930년 바우하우스의 교장을 맡았으나 나치의 탄압으로 1937년 미국으로 도미하였다. 일리노이 공과대학의 건축과 학장으로 취임하며 학교 캠퍼스의 각종 건물들을 디자인했고 시카고 일대에 많은 작품을 남겼다.
미스 반 데 로에의 작품이 지역에 하나만 있어도 건축 도시를 하는 사람들에겐 미슐랭 별점 식당처럼 찾아가는 목적지가 될 만한데, 시카고는 그게 사실 너~~~ 어어어~~~~~~무 많다. 시내를 걷다가도 보이는 검은 유리 고층 빌딩들은 응당 미스 반 데 로에이던가, 그 회사이던가, 직계 제자들이던가 그렇다. 대부분 주거전용이던지, 기숙사, 연방정부 건물인지라 대중의 접근이 제한되어 있다.
그중에 다운타운 시내에서, 공공에게 일부 개방되어 들어가 볼 수 있는 곳은 구 IBM 빌딩(330 North Wabash)이다.
구 IBM 빌딩은 미스 반 데 로에가 완공을 못 보고 죽은 유작이다. 위치와 접근성도 갑 of 갑, 시카고 다운타운의 시카고 강가다. 일층엔 세련된 커피바가, 이층에는 고급진 랭햄 호텔 로비가 있다. 시카고의 다른 랜드마크인 옥수수 빌딩 바로 옆의 명당이다.
스타일은 엄청 다르지만 이 옥수수 빌딩을 지은 건축가가 미스 반 데 로에의 제자라서, 선생님께서는 제자 작품을 안 가리려고 뒤로 한발 물러서 건물을 세웠다는 미담 같은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현재 IBM은 이 건물을 팔고 이사 나간 지 오래다. 현재 사무실 부분의 출입구가 분리되어 있고 일부 층이 랭햄 호텔로 바뀌었다. 이 리노베이션 작업에는 미스 반데 로에의 묘비를 디자인한 손자 건축가가 참여했다.
구 IBM 빌딩 1층에는 아주 모던한 커피 바와 미스 반 데 로에의 시그니처인 바르셀로나 체어가 로비 가구로 잘 깔려 있다. 로비 커피 바에서 커피랑 빵을 사서 (절대로 짝퉁일 리 없는) 이 유명한 바르셀로나 체어에 앉아서 먹어도 된다. 이 건물 일부층은 위워크가 쓰고 있어서 젊은 스타트업 친구들이 왔다갔다 하는게 보인다. 2층에 체크인 데스크를 둔 랭햄 호텔도 당연히 올라가 봐도 된다. 호텔 로비는 공공의 눈요기를 위한 곳이니깐.
다음 글은 미스 반 데 로에의 시카고 지역의 머스트 씨 아이템,
IIT의 크라운홀과 판스워스 하우스 가본 썰 푼다...
여긴 좀 멀어 힘들게 다녀와서, 끝나고 먹은 곳이 더 좋았던 기억이....
지금 책상의 나도 이제 저녁 먹을 준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