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동품 미술품 컬렉터 말고, 건축물 컬렉터 팔럼보 경
얼마 전 고 이건희 님의 어마어마한 기증 컬렉션이 대중에 공개되었다.
겸재와 모네를 아우르는 예술품의 어마어마한 스펙트럼에 대중들은 그저 놀라울 따름.
기증작 전시회에 가서 그저 눈호강이 감사하더라.
뉴스를 보면서 한 가지 아쉬운 생각이 든 건 이거였다.
이건희 님은 명품 자동차 컬렉션으로도, 강아지에 대한 집요하고도 체계적인 후원으로도 유명한지라.
만일 우리나라 명품 한옥이나 근현대 건축물을 컬렉팅 하셨더라면 어땠을까.
골동품과 현대미술, NFT 그림까지 꾸준히 컬렉팅 하는 재력가들은 많다.
그중에 오래된 가치 있는 건물을 꾸준히 컬렉팅 하는 분이 있다는 건 아직 못 들어봐서.
공간 사옥을 매입한 아라리오나, 성북동 문화재 한옥을 매입한 스타일난다 김소희 대표의 케이스는 아직까진 단발성으로 보이고.
1951년에 완공된 미스 반 데 로에의 판스워스 하우스는 사실 보기에만 좋은 건축의 명작이다.
물가에 무덤을 만든 청개구리 후손의 마인드랄까.
거의 늪지대라고 할 수 있는 습지 물가에 집을 지어서다.
주기적인 작은 폭스강의 범람에 건물이 반절은 침수된다.
일 년의 반은 모기떼에 시달리는지라 이곳 투어를 예약하면 모기약 모기 패치 필수라고 홈페이지에 경고가 뜬다.
거기에 이곳은 춥기로 유명한 시카고 지역이라는 걸 건축주나 건축가가 왜 합동으로 망각했을까.
이런 곳에 납작한 4면 통유리 집이라니. 일 년에 반 이상은 사람이 추워서 살 수 없는 것도 당연하다.
(비슷한 1950년대에 비슷한 통유리 구조로 지어진 케이스 스터디 하우스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의자 디자인으로 유명한 임즈 하우스.
따뜻하고 비 안 오는 캘리포니아에 있어서, 아직도 사람들이 거주하며 잘 쓰인다.)
이 건물의 첫 소유주 판스워스는 입주하자마자 이 집을 매우 싫어해 건축가와 소송을 벌였다.
마주하고 있는 폭스 강에 프라이버시를 방해하는 고가도로가 건설되자 진저리 치며 이곳을 떠났다.
1972년 영국의 부동산 재벌이자 아트 컬렉터인 팔럼보 경(Peter Palumbo)이 두 번째 소유주가 되었다.
첫 주인 판스워스와는 달리 무한한 애정을 이 집에 쏟았다.
영국 비아트릭스 공주의 대부이기도 한 팔럼보 경은 예술에 대한 지대한 공헌으로 영국에서 남작 칭호를 받은 인물이다.
2005년부터 2015년까지의 긴 시간동안 무려 프리츠커 건축상의 심사위원장 이셨다. 건축에 대해선 그 누구도 이 분 앞에서 차마 말을 꺼낼 수 없는 저세상 레벨이다.
팔럼보 경은 현대건축 거장 3인방인 르 꼬르비제의 파리의 건축물(Maisons Jaoul),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피츠버그 건축물(the Hagan House), 그리고 미스 반 데 로에가 시카고에 지은 레이크 쇼어 아파트의 한 유닛도 소유할 만큼의 유명한 건축물 컬렉터 이기도 하다.
그는 판스워스 하우스를 31년간 소유하며 미스 반 데 로에의 가구를 다시 넣었다.
첫 주인 판스워스가 프라이버시를 위해 심은 나무들도 뽑아내고, 근처 필지도 병합해 더 넓은 정원을 만들었다.
팔럼보 경이 소장한 다양한 컬렉션, 빈티지 비행기와 앤틱 카를 전시해 놓고, 리처드 쉬라(Richard Serra) 등의 조각품을 놓기도 했다.
건물이 홍수에 침수되면 미스 반 데 로에의 손자 건축가(Dirk Lohan)에게 값비싼 복원을 맡겼다.
이 건물은 현대 건축사에 중요한 의미를 가지며 엄청난 순례객을 모으고 있다.
2001년 일리노이 주 정부가 대중에 공개하는 조건으로 7백만 달러에 구매하려다가 2003년 비싸다며 철회한 적이 있다.
이에 발끈한 팔럼보 경은 판스워스 하우스를 소더비 경매에 내놓았다.
해외의 유명 경매회사 소더비에 그림이나 골동품, 보석만 나오는 게 다니다.
부동산 파트가 생긴 것이 이미 1976년이다.
럭셔리하거나 오래되거나 유명 건축가가 지은 가치 있는 집들이 거래된다.
단순히 거주용 집이 아니라 소더비의 이름에 맞는 초고급 컬렉션의 개념이라고나 할까.
그렇게 소더비에 올라 이슈가 되자 일리노이 랜드마크 위원회와 역사보존 내셔널 트러스트에서 합작해 7.5백만달라에 이 건물을 사들였다. 연방정부가 비싸다고 구매를 취소한 건축물 가격을 사단법인들이 낮추지 않은 건 이 건물의 가치를 존중하기 위함이다. 좋은 딜이었다고 본다.
그렇게 이 건물은 지금까지 잘 관리되며 대중에 공개되고 있다.
지금 2022~23년에는 판스워스 하우스 운영재단에서 이 건물의 가치를 진정 잘 알고 사랑했던 두 번째 소유주, 팔럼보 경과 협업하여 이분이 판스워스를 소유하던 시절의 야외 아트 컬렉션 레이아웃 그대로 전시한다고 한다. 이 상생의 관계와 협력 전시에 매우 흐뭇할 따름이다.
이렇게 가치 있는 건물들을 컬렉션하고 오랜 기간 보존하는 행위는 보통의 투자가가 아닌 진짜 재벌이나 할 수 있는 하이 엔드급 취미다. 영국의 부동산 재벌, 팔럼보 경의 31년의 보존기간이 없었더라면. 사람이 못 사는 판스워스 하우스는 방치되다 잦은 홍수에 쓸려 나갔을 게다.
한옥은 물론이고, 우리의 가치 있는 근현대 건물들이 사라진다.
김수근 김중업 이런 빅 네임의 작품들도 마찬가지다.
용적률의 마법에 혹 한 투자자들이 건물을 헐어 더 높은 빌딩을 짓고 싶어 하니.
그래서 이런 분야에 이건희 님 같은 재벌 컬렉터의 은총이 필요한 게다.
이건희 님은 이미 가셨으니.
가치 있는 건축물을 컬렉션 해서 잘 지켜주었다가 때가 되면 하우스 뮤지엄 식으로 기부해주는 그런 의미 있는 재벌이 우리나라에 계셨으면 좋겠다. (있는데 내가 모르나....)
미스 반 데 로에의 판스워스 하우스에 대해서 쓴다고 앞 앞글에 써놓고 막상 쓸까 말까 했다.
워낙 유명한 건물이라 한국인들의 석박사 논문은 물론이고 인터넷 블로그 정도에도 많은 전문가들이 자세히 글을 써 놓아서.
나는 그만큼 건축에 대해서 상세히 쓸 능력도 안되고, 똑같은 방향으로 글을 쓰는 건 재미도 없다.
나는 내 관점이 들어간 도시건축 여행서 레벨을 지향한다오 ㅎ
마지막으로, 판스워스 하우스 재단 홈피에 나와있는 두 번째 소유주 팔럼보 경과 부인의 사진.
손을 떠난 게 진정 떠난 게 아닌 아름다운 관계, 참 멋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