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모든 소유와 욕망 10화

봄 단편소설집 열 번째 이야기 : 철없이 피는 꽃

by 이원호
4월 일상 보정_197.jpg

열 번째 이야기 : 철없이 피는 꽃





선화는 내가 고향집으로 돌아오는 가을날이면 항상 마을 입구에 앉아있었다. 동네를 향하는 마지막 모퉁이를 돌면 오래된 소나무와 마을 이름이 새겨진 지나치게 장엄한 비석이 있었고, 그 곁엔 항상 발을 동동 구르는 소녀가 앉아 있었던 셈이다. 천천히 터미널에서 걸어올 때에도, 버스를 타서 그 앞에 내려 길을 건널 때에도, 자동차를 몰고 왔을 때에도 선화는 하늘하늘한 웃음으로 나를 반겼다.

"왔어?"

"올해는 좀 늦었네. 먼저 들어가 버릴 뻔했잖아."

"어울리지도 않게 웬 승용차람!"

"일찍 일찍 안 다닐래? 허리 굽겠다."

나는 선화의 말에 한 번도 대꾸하지는 않았지만 이 발그레한 아이가 철이 없다고는 생각했다. 꽃피는 계절을 한참 지나서까지도 고향을 영영 떠난 날 기다린다니, 영 철없고 바보 같은 셈이다. 나는 몇 번이고 그 아이에게 왜 그렇게 기다리냐고 묻고 싶었지만 애써 꾹 참았다. 이미 답을 알고 있던 탓이다.

선화는 내 침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조잘조잘 얘기하곤 했다.

"방앗간 장 씨 기억나? 벌써 아이가 셋이다? 너랑 네 살 밖에 차이 안나잖아. 너는 아기 안 만들어? 여자 친구는 아직 없고?"

"골목집 송 씨 할매네 강아지는 가출했다가 일주일 만에 돌아왔어. 근데 돌아오면서 삼 한 뿌리를 물어 온 거 있지? 할매 그거 달여먹고 신났어 요새! 나도 삼 찾고 싶어."

"내년에는 선산봉 오르는 그 돌계단들 허문대! 나랑 같이 끙끙거리고 기어올라가던 거 기억나? 해져서 산속 고아될 뻔했잖아! 그땐 내가 너보다 두 톨은 더 컸는데! 넌 언제 이렇게 자랐담!"

네가 언제 나보다 키가 컸던 적이 있냐고 핀잔을 주고 싶었지만, 선화의 표정은 환하게 빛나고 있어서 그 말을 꿀떡 삼켰다. 오랜만에 봐서 반가운 거겠지 싶다. 하긴, 이 오랜 마을에 대화할 사람이 얼마 남아있을 리가 없으니 말이다. 선화는 바람에 흐트러지는 머릿결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우리 같이 뛰놀았던 장소도 하나 둘 사라지네. 나무도 사라지고, 골목도 사라지고, 꽃도 지고."

그 말을 하는 선화의 표정은 왠지 처연한 것이라 담배라도 한 대 태우고 싶어 지고 말았다.

선화와 나는 좁디좁은 동네에서 바로 옆집에 살았었다. 기억 같은 것이 없던 어린 시절에 조차 선아는 나와 함께 병아리를 쫓아다니고 방아깨비를 잡으러 들판을 쏘다니고 했던 아이였다. 버드나무 아래 오래된 달구지도, 돌다리 밑 작은 개울도 선화의 손길이 여려있었다. 나는 천천히 오래된 기억들을 더듬었다. 같이 통학 버스를 향해 뛰다가 선화가 넘어져서 놓쳤던 것도, 까진 무릎을 호호 불다가 덤불 사이에 핀 장미를 발견했던 것도 다 마치 어제 있었던 일만 같았다. 여름날 미꾸라지를 잡는답시고 비 오는 날 두렁을 헤매다가 몹쓸 감기에 걸렸던 것도, 가을 낙엽 속에서 함께 햄릿을 읽었던 것도 다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리고 그 기억은 고등학교에 들어가며 뚝 끊겼다. 어떻게 된 거지. 어떤 일이 있었지?

선화는 생글생글 웃으며 대답했다.

"그때 그 나무 아래서 대사 연습했던 것처럼, 나는 너의 오필리아가 되었지."

맞다. 그랬던 것도 같다. 아니 그랬던 것이 분명했다. 그게 선아와 나의 마지막이었던 셈이다. 선화는 조용히 바람을 맞으며 서있었고, 나도 아무 말 않은 채 잠시 그녀와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멀리 산자락 너머로 느린 구름이 흘러가고 있었다. 우리의 초점은 잠시 같은 장면에 멎었다.

선화는 삶처럼 긴 한숨을 들이켜곤 말했다.

"있잖아."

"이제 그만 와도 괜찮아."

"세상도 많이 변했잖아. 이 오래된 마을에 찾아오는 사람도 이젠 너뿐야."

"신기한 일들도 많이 생겼지? 핸드폰이라는 게 있다며? 길가다 사진을 찍을 수 있다니! 그럼 나도 많이 찍었을 텐데. 아니, 네가 찍어줬더라면 더 좋을 뻔했어."
"그래도, 그렇게 심심하지는 않아. 까치골 참새들도 아침마다 날아와서 얘기해주고, 늙은 소나무는 언제나 할 말이 많은걸. 이제 곧 널 닮은 구절초도 앞뜰에 가득 필테니까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그러니까 이제 그만 와."

나는 미어지는 것 같은 서운함을 느꼈다. 그 오랜 기간 동안 철도 잊은 채 기다림 속에서 피었던 주제에 이제는 오지 말라니, 그 처연함은 목이 메이게 만든다.

선화는 머쓱하게 웃으며 눈을 훔쳤다.

"넌 올 해도 9월이 와서야 피더라. 하마터면 이젠 못 만나는 줄 알았어. 철없이 피고 질 때도 모르니까 삶도 죽음도 구분을 못하지. 이젠 너도 네 삶을 살아."

그 말에 나는 왠지 서글퍼 선화의 무덤 곁에 쓰러지듯 주저앉고 말았다. 선화는 살짝 빙글 돌아 등을 가만히 감싸 안으며 다독였다.

"살아있는 건 피어있는 딱 한 순간뿐이야. 그 말은 피어있는 모든 건 살아있다는 말도 되는걸. 네가 너만의 피어남을 만끽했으면 좋겠어."

나는 가져온 꽃을 선화의 무덤에 내려놓았다. 그리곤 햇살처럼 들이닥치는 선화의 마지막 기억에 아려 눈을 잠시 감았다. 선화는 17살, 꽃다운 나이로 스러지기 전, 그렇게 말했었다.

"꽃이 왜 피어나는지 물어본 적 있어? 그냥, 햇살을 한 번 보고 싶었을 뿐이래. 피었으니, 나는 이제 되었어. 너도 늦게나마 피었으면 좋겠다."

나는 눈물 섞인 환한 웃음을 짓는 선화를 다시 돌아보지는 않았다. 무덤 위에 핀 어엿븐 봉선화는 부드러운 살사리꽃다발과 철 모르는 아름다움으로 얽혀 들고 있었다. 그녀는 가을날을 향해 손을 흔들었고, 나는 철없이 피던 꽃송이의 기억을 꽃잎으로 손톱 위에 새기며 그 해의 가을을 보냈다.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