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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원호 Nov 17. 2019

그들만의 작은 천국

가을 단편소설집, 프롤로그

2019년 가을단편소설집 그들만의 작은 천국            


   

프롤로그 이상한 아이

첫 이야기 산딸기와 산포도

둘째 이야기고통의 정원

셋째 이야기 밤에 자는 꽃

사잇야기 동창회

넷째 이야기 거울테

다섯 번째 이야기무엇을 먹으며 살아야 지치지 않을까

사잇야기 미움과 그리움 

여섯째 이야기 오소리꿈

일곱째 이야기 이별여행

에필로그 함께 살아가는 것의 이상함          






프롤로그  
이상한 아이  


             


그 아이는 조금 이상해 보였다. 정신이 나가 보인다거나 눈에 띌만한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다른 아이들과는 어딘가 다른 점이 확실히 있었다. 적어도 열일곱 살의 내가 보기에는 그랬다.      


그 아이는 말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물론 그 과묵함이 이상함의 원인이었던 것은 아니다. 열일곱 살의 말없는 남자아이란 때때론 매력적인 존재일 수 있을 것이다. 그 당시의 다른 남자아이들은 기가 막히게 수다스러워서 앵무새들도 귀를 틀어막고 도망칠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 아이는 달랐다. 그 아이는 언제나 조용히 듣고 있었다.      

그 아이의 이상한 점은 말이 그렇게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과 잘 어울렸다는 사실이다. 그는 조용하고 음침하게 구석에서 책이나 읽는 아이는 아니었다. 우리 학교에는 그렇게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있는 아이들이 많았고, 나는 그런 독특한 아이들을 이상하게 보지는 않았다. 어쨌든 열일곱 살이다. 자기만의 세계에 심취하여 팔뚝에 흑염룡 하나쯤 봉인해둔대도 이상하지는 않은 나이인 셈이다. 하지만 내가 지켜보는 그 이상한 아이는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되려 상냥하고 정다웠고, 덕분에 그의 주변에는 사람들이 항상 머무르곤 했다. 하지만 사람들이 모여든 것은 그의 사교성 때문이 아닌 것은 확실했다.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을 사교적이라고 여기기는 어려울 테니 말이다.
     

고등학교 2학년 문학수업에서 조별 활동을 할 때였다. 나는 우연찮게 그와 같은 조가 되었는데, 그때 나는 그의 색다른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적잖은 기대를 했었다. 당시에는 단체 채팅방을 만들어서 조활동을 하는 것이 유행이었고 현실에서 말이 없는 사람들은 가상공간에서 억눌린 자신을 풀어내곤 했었다. 그 억눌린 마음의 해방은 사람마다 각기 다른 모습으로 표현되기는 했지만 어쨌든 무언가 색다른 모습이 될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 나 역시 집에선 한없이 조용하지만 게임 세상 속에서는 불같은 성격으로 혈맹 하나를 철권통치하는 군주인 친언니가 있었고, 덕분에 그에게서도 비슷한 반전을 기대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내가 기대했던 것과는 조금도 비슷하지 않았다.      

채팅방에서 수많은 메시지들이 오고 감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오고 가는 내용들을 읽고 있는 것은 확실했고 무언가를 직접적으로 물어보면 답변이 오기는 했지만 그는 반드시 말해야만 하는 내용이 아니라면 대꾸하지 않은 채 넘어갔다. 간간히 등장하는 그의 대답들에는 불필요한 부연설명도 없었고, 과한 감정어나 수사구가 포함되어 있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듣고, 차분히 대답하는 현실에서의 모습을 서로 얼굴을 보지 못하는 이 공간에서조차 충실히 지키고 있었던 셈이다. 그 모습에 나는 왠지 모르게 살짝 뾰로통해져서 약간 독기 어린 말을 해버리고 말았다.     

- 얘들아, 우리 발표는 오늘 토론 준비하면서 제일 말을 덜한 사람이 하기로 하면 어때? 그 사람이 제일 참여도가 적을 테니까 발표로 메우는 거야.     

우리가 준비하고 있는 것은 문학토론 수업의 발표였고, 아직 발표수업에 익숙하지 않았던 그 당시에는 모두가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그 대화방에 모여있던 영악한 – 혹은 아무 생각 없는 – 아이들은 내 못된 의견에 서슴지 않고 동의해주었다.     

- 나는 좋아. 발표를 안 하려면 지금 열심히 참여해야겠다 ㅋㅋ

- 나는 이미 말 많이 했으니까 제외인 거지?
- 내가 제일 많이 했을걸ㅋㅋ
- 지금 세보러 갑니다?

하지만 내가 놀랐던 것은 정작 그 말없는 아이가 대답했을 때였다.

- 그래. 그렇게 하도록 하자. 내가 발표를 할게.

내 목표가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알았을 법도 한데도 그 아이는 별다른 불만 없이 발표자의 역할을 떠안았고, 우리는 모두 놀라기는 했지만 어쨌든 누구도 자청해서 발표를 할 생각은 없었기에 자연스레 그에게 그 역할을 맡기고 말았다. 그 날의 그가 왠지 모르게 슬퍼 보였던 것은 어쩌면 내 상상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내 찰나의 선택으로 인해 벌어질 결과에 대해서 미처 짐작하지는 못했다.     

토론 수업에서의 그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만큼의 열변을 토해냈다.     

“마지막 조는 발표에서 자기 자신을 자각하는 것, 즉 의식을 갖는 것이 인간의 존엄성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인 것처럼 발표했습니다. 더불어 소설의 주제를 존재성에 대한 자각으로 포장했지요. 하지만 저희 조의 생각은 다릅니다. 저희 조는 존재의 자각이나 사유, 더 나아가 의식을 갖고 있고 없고가 존엄성에 있어서 중요한 요인이 아니라고 믿습니다.”     

그가 얘기하는 것은 우리 조가 함께 내린 결론이었고, 그가 사용하는 예시들은 우리가 함께 농담 삼아 얘기했던 것들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가 모든 것을 그러모아 하나의 이야기로 만드는 방식은 적어도 우리가 함께 만들었던 것은 아니었다. 고기와 버섯을 그릇에 담아놓는다고 해서 그것이 요리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는 우리가 건넨 재료들로 요리 이상의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반의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같은 조원이었던 우리도 숨을 죽이고 그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스스로를 의식하지 않고서도 생명을 이어나가는 생명체들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수목은 땅에 짙게 뿌리내리고 잎새로 햇살을 흩뿌리지만 자기 보호적이지는 않고, 산호의 섬들은 군락을 이루지만 개체를 자각하지는 않습니다. 개중에는 어렸을 때에는 뇌와 척추를 가지고 스스로를 자각하지만, 성체가 된 뒤에는 사유를 위한 기관들을 스스로 소화시켜버리고 존재적 자각을 포기하는 생명체들마저 존재합니다. 멍게와 말미잘 같은 강장동물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이 특징은 그들을 덜 존엄하게 만들지는 않았습니다. 대신 더 선명하게, 더 폭발적으로 번식하여 더 열렬하게 세상을 누리도록 만들어주었죠.”     

그러자 상대편 발표자들에게서 반론이 들어왔다. 항상 예리한 질문을 하기에 모든 사람들이 꺼려한 여자아이의 질문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동물’에 한정된 것이 아닌가요. 인간은 동물 그 이상이기 때문에 존엄성을 가진다고 봅니다만.”     

그때, 그 아이는 잠시 머뭇거리다 모두의 기억에 고스란히 남을만한 대답을 들려주었다.     

“저는 인간이 동물보다 존엄하다고 단정 지을 근거가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더 나아가 그 근거가 의식, 혹은 존재적 자각이 될 수는 없다고 믿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공부하고 있는 작품처럼 위대한 작품들을 쓸 수 있는 인간이 고작 바닷속에서 뇌와 척추를 소화시키며 자신이 뭘 하는지조차도 모르는 멍게 해삼과 동급이라는 말씀이신가요?”

“의미를 어디에다가 두느냐에 따라서 더 특별할 수도 있고 덜 특별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것은 종의 다름이지 더 큰 위대함의 증거는 아니라고 봅니다. 이는 이종 간의 차이뿐만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간의 차이로도 설명될 수 있습니다. 이 교실에 있는 모든 사람이 스스로를 자각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습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떤 미래를 누려야 할지, 내가 누구이며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다 알고 있는 현명한 사람이 그렇게 많다고 할 수는 없겠지요. 이 똑똑한 집단에서도 그럴진대 전국, 더 나아가 전 세계의 비중으로 따지면 자기 자신을 자각하는 사람은 정말 극소수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 극소수의 사람만 존엄하며 사람답고 위대하다고 말하는 것은 극단적인 엘리트주의로 여겨집니다. 이른바 파시즘적인 차별의 시작인 것이지요. 나 자신이 누군지 모른다고 하여 남에게 비난받거나, 무시당하거나, 불이익을 당해서는 안 됩니다. 의식이 없다고 하여 생명유지장치를 마음대로 꺼버려도 되는 것 역시 아니지요. 사람은 사람이기에 존중받아야 하며, 이는 의식이나 존재에 대한 자각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사람은 사람이기에 존엄하고, 개는, 개이기에 존엄하고, 새는 새이기 때문에 존엄한 것이지요. 적어도 우리가 사는 세상이 그렇다고 믿고 싶습니다.”
     

상대방이 머뭇거리는 가운데, 그는 누가 보기에도 슬프고 지쳐 보이는 표정으로 발표를 끝맺었다.     

“따라서 저는 인간이 동물보다 존엄하다고 믿을 근거가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아주 많은 동물들이 인간만큼 존엄하며 고귀한 대접을 받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때론 인간보다 진솔하고 충직하며 다정한 그들에게서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은 너무나도 많을 테지만 사실 존엄성이란 배울만한 점이 있다거나 현명함으로 결정되는 일은 아닐 것입니다. 존엄성은 그보다는 살아있다는 사실 그 자체와 그 사실에 대한 존중에서 비롯되는 종류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희 조는 인간 존재의 의식, 혹은 존재적 자각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존엄성의 근거로서는 부정합니다. 이상 발표를 마치겠습니다.”     

그때 나는 상대방을 부드럽게 설득하는 그의 화려한 말속에서 이상한 슬픔을 잠시 엿보았다. 그것은 쉽사리 이해되지 않는 감정이었다. 그는 어려운 발표를 잘 마쳤고, 말을 절거나 헛소리를 하지도 않았다. 분명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받을만한 발표를 해냈던 셈이다. 하지만 그는 결코 즐거워 보이지 않았다. 되려 이상한 슬픔이 짙게 깔려서 우리 조원들마저도 그에게 쉽사리 말을 걸기 어려웠을 지경이었다.      

 나는 그 의아함에 마음을 맡긴 채 잠시 충동적인 행동을 했다. 모두가 다음 수업을 위해서 토론실을 떠나는 와중에 잠시 교실 앞에서 그를 기다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때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는 나조차도 잘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를 발표시킨 것에 대한 왠지 모를 죄책감과 발표를 잘한 것을 축하해주고 싶었던 것 같기는 하지만 확실치는 않았고, 그와 조금 더 대화를 나누고 싶었던 것 같기는 하지만 인정하기는 싫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런 내 마음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그는 꽤 오랜 시간 나오지 않았고, 나는 빼꼼 창문을 들여다보곤 깜짝 놀랄만한 광경을 마주치고 말았다.     

그 아이는 울고 있었다. 그것도 혼자 우는 것이 아니라 같은 우리 반 여자아이의 품에 안겨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손만 잡아도 온갖 소문이 전교에 다 퍼져나가는 유치한 고등학교의 삶 속에선 남녀가 끌어안고 있는 그 모습만으로도 충분히 선정적이고 충격적인 것이었다. 더군다나 그 여자아이는 다른 반에 잘 생긴 남자 친구가 이미 있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어쩌면 바람피우는 현장을 목격한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마치 형사라도 된 마냥 가슴이 콩닥콩닥 뛰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들여다보면 볼수록 그 둘의 모습은 사랑이나 우정 같은 간단한 욕망이 끼어들 자리가 없는 것 같은 이상한 색채를 띠고 있었다. 감히 나로선 감히 재단하기가 어려운 모습이었던 셈이다.
     

작은 키의 여자아이는 까치발을 들어 그를 다독여주었다. 슬픔을 위로하는 그녀의 얼굴에는 저녁의 석양 같은 환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그의 얼굴에 걸려있던 보랏빛 슬픔이 그녀의 미소에 씻겨가고 있었다. 그 여자아이가 그의 슬픔을 온전히 다 이해하지 못한 것은 확실해 보였다. 슬픔을 다 이해했다면 함께 슬퍼했을 테지 괜찮다고 웃어줄 수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위로는 함께 슬퍼할 때에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공감할 수 없더라도 다독여줄 수는 있었다는 사실을 그 여자아이는 너무나도 잘 보여주고 있었다. 여자아이의 미소는 가을 해변의 파도처럼 그 아이의 슬픔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그 아이는 슬픔이 서서히 씻기자 비바람 사이의 복수초 같은 웃음을 지었다. 깨질 것 같이 가냘프면서도 강인한 웃음이었다. 그는 고맙다고 말했고, 나는 그 뒤의 말을 더 이상 들을 자신이 없어서 그 광경으로부터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 광경도, 그 둘도 내겐 알 수 없는 것이었다. 살아있기에 존엄하다고 말하는 아이와, 슬픔에 공감할 수 없으면서도 안아주는 아이는 둘 모두 내겐 두려운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열일곱 살은 알 수 없어서 두려운 모든 것들로부터 도망치기엔 좋은 나이였다. 나는 그 뒤로 꽤 긴 시간 동안 그에게서 도망칠 수 있었다.

그를 다시 마주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도 무려 5년의 세월이 지난 후였다. 한 다리만 건너면 다 친구인 고등학교 동창들 사이에서 우리는 간간이 소식을 듣는 사이 정도일 뿐이었다. 그래서 어느 대학 축제에서 그를 마주쳤을 때에는 그렇게 반가울 줄은 몰랐었다. 그 아이는 나를 반갑게 맞았고 나 역시 5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그에게 마음을 열었다. 아주 작은 마음의 틈이었지만, 우리가 대화를 하고 있다고 착각하기엔 충분한 빛이 새어 들어왔다.     

그 아이는 여전히 말을 많이 하지 않았지만 나는 아주 많은 말을 했다. 그동안 지내왔던 일들을 설명한다는 것이 아주 긴 서사시가 되어 흘러나왔다. 이십 대 초반에 겪을 수 있는 감정의 격류와 상처들, 고통과 환희의 순간들, 내 안에서 본질을 조금이라도 구성하기 시작했던 작은 조각과 파편들이 마치 홍수에 떠밀려내려 오는 강속의 오래된 유물처럼 무작정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말을 하면서도 나 스스로도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어서 놀라워했고, 놀라워하면서도 나는 그가 마치 십년지기 친구인 마냥 온갖 이야기를 다 털어놓고 있었다. 쭈뼛쭈뼛한 표정으로 하마터면 가정사와 내 참담한 자괴감의 원천까지 털어놓을 뻔했던 그 순간에 그는 부드럽게 이야기를 잘랐다.     

“이야기 들려줘서 고마워. 잘 지내고 있었네 그래도.”

“야, 서운하다. 이게 잘 지낸 걸로 들려 너는? 내가 다시 한번 2시간 동안 내 격랑의 이십 대 이야기를 들려줘야 정확한 평가가 나오려나.”
     

그는 웃으며 대답했다. 말이 많지 않은 그로선 아마 꽤 긴 대답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지낼 수 있었던 게 잘 지낸 거지 뭐. 변함없이 활기차 보여서 좋아. 예전의 너는 그 정도로 활발해 보이지는 않았었는데, 변한 것 같네. 좋은 의미로.”
     

그때 그에게 ‘너는 어떻게 지내?’라고 물어보지 못했던 것을 나는 꽤 오랜 시간 후회했다. 물론 그것은 안타까움이나 아쉬움과는 조금 다른 종류의 감정이었다. 다시 그때 그 순간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나는 그 아이에게 어떻게 지내느냐고 물어보지는 못할 것이다. 그때의 그 아이에겐 그런 것을 물어봐서는 안 될 것 같은 분위기가 있었다. 알게 되면 고통스러울까 봐 물어보지 못하는 것도 아니고, 그 사람을 더 알게 되면 그 매력에 빠질 것 같은 것도 아닌, 그저 때가 되면 알게 될 것 같은 이상한 예감에 가까운 분위기였다. 나에게서 빠져나온 슬픔들은 분명 그의 안에 고였을 텐데, 그는 조금도 슬퍼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 날 축제에서 우리는 많은 술을 마셨고, 나는 결국 내 이야기만 털어놓은 채로 그와 짧고도 긴 작별인사를 해야만 했다.     

그 뒤로 나는 한동안 그를 다시 만날 생각을 별렀다. 부끄러움이나 이성적인 감정인 것보다는 그와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이상한 기분이었다. 그와의 대화는 일방적이었지만, 나는 나를 털어놓으며 그를 알아가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나는 그를 알고 싶었다. 그 날, 해가 지는 토론교실에서 마주쳤던 알 수 없었던 그를 이제는 대화로 이해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대화는 두 사람이 의미를 교환할 때 일어나는 일이고, 그는 교환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무언가 이해할 수 없는 – 이상한 –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삶에 치인 덕분에 내가 그를 다시 만나게 될 것은 그로부터 다시 3년이 지난, 내 결혼식 직전이었다. 그에게 청첩장을 꼭 주어야 했던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여전히 그렇게 친하지는 않았고, 서로 사적인 교류는 여전히 거의 없었다. 친구들끼리 단체 채팅방 정도야 하나 있었지만, 우리는 여전히 헛소리만 하는 열일곱 살 때의 모습이었고 그는 여전히 읽기만 하는 조용한 사람이었으니 서로 소통한다고 얘기하기엔 애매한 부분이 많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에게 청첩장을 주고 싶었다. 왜인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 그가 결혼식에 와주기를 기대했던 셈이다. 그리고 내가 왜 그것을 소망했는지는 결국 청첩장을 주러 그를 만났을 때에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는 청바지에 가벼운 정장을 위에 걸친 채로 수더분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만나기로 약속한 지 2분이 지난 상황이었다. 늦었다고 말하기는 애매한 시간이었지만, 그는 미소 지으며 사과했다.     

“미안. 수업이 조금 늦게 끝나서.”     

나는 거의 변한 것이 없는 그의 모습에 담담히 인사했다.     

“괜찮아. 그리 오래 기다리지는 않았어.”

그러자 그는 의외의 말을 꺼냈다.     

“조금은 오래 기다렸던 것 아니야? 그러니까 청첩장을 주러 여기까지 왔겠지.”

“그게 무슨 말이야?”     

그는 자리에 앉으며 마치 농담을 던지듯이 말했다.     

“청첩장을 줘야 할 만큼 가깝지는 않았던 것 같아서. 하지만 물어볼 것이 있었다면 청첩장을 핑계로 찾아올 수는 있겠다 싶었어. 너는 항상 나에 대해서 궁금해하는 것 같았거든.”     

그는 ‘그래서 그걸 물어보러 마침내 온 거지?’라는 눈빛으로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고 나는 차마 부정하지 못했다. 내 안에서 확고하지 않았던 질문들은 마침내 그의 말을 통해서 확실해지고 있었다. 나는 이상한 그를 이해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마침내 질문을 꺼냈다.     

“예전부터 궁금했던 것이 있었어.”

“응.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

“아직도 잘 물어보지는 못할 것 같지만, 이제는 물어볼 엄두 정도는 낼 수 있을 것 같아.”

“좋은 현상이네.”     

나는 머뭇거리다가 혼란스러운 의미들 몇 가지를 낚아채어 마침내 질문을 만들었다.     

“그때, 왜 슬펐는지 알고 싶어.”     

그는 역시나 이상하게도 그게 무슨 말이냐고도 묻지 않았고, 왜 그것을 알고 싶은지도 물어보지 않았다. 대신, 당연히 그 질문일 줄 알았다는 듯이 부드럽게 대답했다.     

“나에겐 말하지 않은 많은 슬픔들이 있어. 그중 어떤 것을 알고 싶어?”     

나는 대답했다.     

“그 아주 처음부터.”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두 손을 책상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곳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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