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원호 Nov 17. 2019

그들만의 작은 천국 1화

가을 단편소설집 첫 번째 이야기 : 산딸기와 산포도


첫 번째 이야기 : 산딸기와 산포도





그의 이야기는 열다섯 살, 즉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즈음부터에서 시작되었다.

"너 혹시 우리 고등학교 2학년 때 토론 수업하던 거 기억나?”

“응. 우리 그때 같은 조였잖아.”

“그때 토론 끝나고 우는 걸 보지 않았어?”

“어? 알고 있었어?"

“응. 그때 네가 교실 밖에 있다가 뛰어가는 걸 봤어.”

"맞아. 그리고 성희가 너를 왜 다독거려줬는지,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항상 궁금했어."

"그건 꽤 긴 이야기가 될 텐데 괜찮아?"

"응. 하루 이상 걸리지만 않는다면야."

"그럼 천천히 들려줘볼게. 얼마나 풀어낼 수 있을지는 나도 잘 모르겠네."


그를 만난 건 어느 늦은 여름의 오후였지만, 이야기가 시작되는 그 순간부터 가을이 성큼 다가온 것만 같았다. 그는 커피잔의 손잡이를 빙글빙글 매만지다가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나는 고등학교의 시작을 아주 추운 집에서 했었어.”

“추운 집이라고?”

“응. 어마어마하게 추운 집이었어. 따뜻한 물도 안 나오고 샤워할 곳도 없어서 아침에 얼음물로 머리를 감아야 했던 곳이었지. 그렇게 머리를 감고 나면 금고아를 낀 손오공처럼 머리가 깨지는 것 같았다? 대낮에도 앞 건물에 가려서 햇빛이 들지 않았고 구석엔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서 아무것도 자랄 수 없을 것만 같았던, 나도 자랄 수 없을 것만 같았던 그런 집이었어.”

“그게 정확히 언젠데? 1학년 때?”

“응. 딱 고등학교 시작할 때니까 1학년 중간고사 전 까지였을 거야. 그 집에서 반배치고사를 5차까지 치르고 반 아이들의 연락처를 받았던 기억이 있어. 그래도 다행이었던 것은 그 집에 천년만년 살지는 않았다는 것이지.”

“이사를 갔었나 보네.”

“응. 그리고 비단 햇살이 잘 드는 새집으로 이사만 간 것은 아니었어. 어머니께서 새집에 오면서 강아지도 한 마리 데려오셨거든. 아주 작은 강아지였어. 눈빛도 털 색깔도 연한 갈색이라 집의 나뭇결과 아주 잘 어울렸지. 처음엔 조심스럽고 겁이 많아 보였지만 아마 우리보다도 빨리 새집에 적응했던 것 같아. 우리는 아직도 추위와 어둠에 익숙해서 새집의 따스한 온기에 감탄을 하고 있을 때에 그 아이는 하품을 하며 신발을 온통 물어뜯었어. 그것도 아주 차분하고 진지한 표정으로 우리를 쳐다보면서 말이야. 어찌나 물어뜯었는지 이빨이 덧니가 될 때 가지 물어뜯었는데도 되려 우리보다 그 아이가 집주인 같을 때가 있어서 우리는 많이 혼내지도 못했어.”

“이름이 뭐였어?”

“산딸기의 이름을 따라서 다래라고 지었어. 그 추운 겨울 뒤에는 온 뒷산에 산딸기가 피었었거든. 그 아이도 우리에게 그런 산뜻함이길 바라며 내가 지었던 이름이었어.”

“강아지 이름 치고는 좀 어렵다. 사람 이름 같고.”

“우리 집 강아지들 이름은 다 그래. 내가 짓기 때문이려나? 어쨌든 다래는 아주 영특한 강아지였어. 대담하고 신중했는 데다가 사람을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지. 때때로 우리가 다래와 놀아주는 것이 아니라 다래가 우리와 놀아주는 것 같은 인상을 받곤 했어. 마당 높은 곳에 앉아서 우리를 지긋하게 바라볼 때에는 더더욱 그랬지. 우리가 이리 오라고, 먹을 거 준다고, 좀 안아보자고 아무리 난리를 쳐도 딸기는 그 투명한 갈색 눈빛으로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지. 나는 그 눈빛을 보면서 내가 듣고 싶은 말들을 듣곤 했어. 때론 꾸중을 들었고, 때론 칭찬받았지. 진지한 조언을 들려줄 때도 있었고, 한숨을 쉬며 콧방귀를 뀔 때도 있었어. 다래는 강아지라 말을 하지는 못했지만 나는 그 눈빛 속에서 듣고 싶은 말들을 들을 수 있었어. 그게 다래가 하고 싶었던 말인지는 모르지. 하지만 내가 못된 생각을 할 때면 다 안다는 듯이 다가와 손을 두어 번 할짝할짝해주기는 했으니 아마 다 알고 있었을 거야.”

“눈으로 말을 한다니, 어떨 때 그런 느낌을 받았던 건지 물어봐도 돼?”

“음, 굉장히 속상했던 어느 여름날이 기억나. 이 얘기는 별로 하고 싶지 않은 부분이라 대충 넘어가긴 할 건데, 어쨌든 내가 살면서 처음 배신당했다고 느낀 순간이었어. 지금 돌이켜보면 그리 대단한 건 아니지만 16살 때에는 견딜 수 없는 일처럼 느껴지던 일이었거든. 가장 가까웠던 친구이자 내겐 가장 소중했던 사람에게 ‘나는 별것이 아니구나’라는 기분을 느꼈던 그 순간에 나는 숨 막히게 절망했었어. 지금까지도 그 뒤의 몇 개월은 흐릿하게만 간신히 기억할 정도로 말이야. 하지만 그날 밤에 어떻게 옮겼는지도 모르겠을 발걸음으로 집에 도착했을 때의 다래 모습은 기억이 나.”

“어땠는데?”

“다래는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내 쪽으로 천천히 걸어왔어. 나는 움직일 힘도 없이 비참해서 마당에 주저앉아 있었거든. 다래는 빠르게 달려오지도 않았고, 귀찮다는 듯이 털래털래 온 것도 아니었어. 아주 신중하게,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안다는 마냥 매 발자국에 확신을 담아서 걸었지. 그리곤 내 앞에 멈췄어. 안긴 것도 아니고 손이 닿을 거리도 아니었지만, 눈빛이 닿을 거리였어. 그리곤 그냥 나를 바라보았지. 다 괜찮다는 듯이 애교를 부리지도 않았고, 아무것도 모르는 강아지들 특유의 천진난만함에 마음이 치유되지도 않았어. 하지만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바라보았기 때문에 나는 나 자신을 꾸짖을 수 있었고 다독일 수 있었어. 그 눈빛 안에는 수없이 많은 말들이 다 들어있었어. 친구로서의 걱정, 막내 고모 같은 장난스러움, 큰 이모 같은 단호함, 여동생 같은 의아함, 누나 같은 호된 꾸지람과 어머니 같은 이해와 배려까지. 그 말들을 다 들려주기 위해서 다래는 손이 닿지 않는 거리에, 하지만 눈빛을 건넬 수 있는 거리에 멈추어 섰던 거야.”

“대단하네. 그런 일이 자주 있었어?”

“아니. 하지만 꼭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비슷한 일은 얼마든지 있었어. 다래는 심지어 혼날 때도 다 알겠다는 듯이 지긋이 쳐다봤거든. 겁을 먹고 도망가거나 마주 서서 화를 내지도 않고 그냥 ‘그래. 내가 잘못했다. 혼내는 거 다 이해한다’라는 표정으로 우리를 쳐다봤어. 우리가 우리 안의 허물을 스스로 깨달을 때까지 말야. 나는 그런 다래를 보면서 사람을 바라보는 방법을 조금씩 배웠던 것 같아.”

“친구이자 스승이었던 셈이네.”

“응. 어떤 단어 하나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런 특별한 존재였지. 연애를 할 때나 친구를 사귈 때에 다래에게서 배운 것들은 아주 귀중히 작용했어. 말을 많이 나누는 것 보다도 그 사람을 지긋하게 바라보았을 때 좀 더 진중한 관계를 만들 수 있었거든.”

“연애에 있어서도?”

“맞아. 연애에 있어서도 그랬어. 사실 연애에 대한 화두들은 다래가 나에게 건네준 가장 값진 선물이었을 거야.”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지나간 시간의 결을 더듬는 것 같았다. 보이차가 한입, 두입, 그의 입술을 타고 넘어갔고, 나는 잠시 기다렸다. 그의 이야기는 마침내 우리의 질문의 순간으로 도래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였어. 그때쯤 나는 긴 방황을 마치고 다시 사람을 믿기 시작했던 것 같아. 여전히 말을 많이 하는 대신 사람들을 보는 편을 더 좋아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예전처럼 사람이 두려워 미칠 것 같지는 않았어.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지. 좋아하고 싶은 사람도 있었고, 나를 소중히 여겨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조금씩 알고 있었고.”

“그전까지는 몰랐다는 거네. 난 네가 그런 줄 전혀 몰랐는데.”

“당연하지. 그걸 알았더라면 지금 물어보러 오지도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 말이 없는 사람의 고통들은 원래 알기 힘든 편이야. 내 탓이지.”

“너 탓이지만 사과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

“사과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내 고통은 온전히 내 것이야. 확실히 사과할 일은 아니지. 어쨌든 그 시기에 일어난 큰 변화 중 하나는 어머니께서 강아지를 한 마리 더 데려오셨다는 것이었어. 굉장히 이상한 이유이기는 한데, 앞집에서 아파트로 이사를 가면서 키우던 강아지를 데려갈 수가 없다고 그랬거든. 그 말을 들은 어머니께서 덥석 우리 집에서 키우겠다고 해버리셨던 거야.”

“어린 강아지였어?”

“아니. 다 큰 성견이었지. 다래랑 비슷한 또래의 잘생긴 강아지였어. 앞다리가 짧뚱막하기는 했지만 흰털이 마치 수사자의 갈기처럼 휘날리는 위풍당당한 아이였지. 이 아이는 성격이 다래와는 또 달라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아무 거리낌 없이 달려들어서 안겼어. 처음 보는 데도 만나서 이리 반가울 수가 없다는 듯이 해맑은 아이였지. 나는 그 아이에게는 산포도라는 뜻으로 머루라는 이름을 붙였어. 다래와 잘 지내기를 바랐거든.”

“산딸기와 산포도라니. 산속 과일농장이네.”

“그렇지. 아주 귀여운 작명 센스였다고 생각해. 머루는 아주 단순 무식하고 앞뒤 없는 성격인지라 새 가족에 들어오게 된 것을 엄청 신경 쓰지는 않는 것 같았어. 하지만 걱정했던 대로 다래가 조금 힘들어했지.”

“힘들어했어? 왜?”

“내가 사람들을 무서워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다래도 다른 강아지들을 경계하고 불편해했거든. 혼자서 마당을 노닐거나 햇살을 쬘 때에는 집의 수호신과도 같은 신령스러운 모습이었지만, 새로운 강아지가 들어오니 부쩍 긴장하고 불편해하는 것이 보였어. 머루에게 마음을 열지 않는 것이 지켜보는 사람들의 피부에도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어땠는데?”

“머루가 은근슬쩍 친해지려고 가까이 오려고 하면 다래는 사납게 짖고 물 듯이 달려들었어. 다래는 아주 차분했지만 화를 낼 때는 나찰과도 같이 무서웠지. 마치 용에게도 역린이 있어서 건드리면 불을 뿜듯이 다래도 그랬던 것 같아. 가족들은 많이 당황했지. 착하고 차분하기만 했던 다래가 저렇게 화를 내고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은 처음 봤으니까. 하지만 머루는 그런 모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무작정 머리를 들이밀었어. 다래가 아무리 왕왕 짖고 화를 내도 짜증한 번 내는 법이 없었지. 깨물려고 하면 잠시 뒤로 물러서서 거리를 벌리기는 했지만 1분도 안 지나서 마치 다 잊었다는 마냥 꼬리를 치며 다가갔어. 그리고 그건 다래를 더 화나게 만들었지.”

“나 같아도 무작정 들이대기만 한다면 싫을 것 같아. 둘은 결국 친해졌어?”

“응. 결국 가까워졌지. 나는 그 둘을 지켜보면서 많은 걸 배울 수 있었어.”

“그으래? 무작정 들이대면 성과가 있다?”


"그럴 리가. 그건 너무 끔찍하잖아."

"그럼? 아! 둘 중에 어느 누가 양보를 한 거겠지? 양보하지 않았더라면 계속 싸우기만 했을 테니까."


“글쎄? 아마 둘 다 어느 정도는 양보를 하지 않았을까?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들이대는 것도 문제지만, 어느 한쪽만 양보를 하는 관계 역시도 잘 풀릴리는 없을 거라고 생각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도 그렇고. 하지만 둘 다 양보를 하기 시작했다면 바뀔 가능성이 있는 거겠지."


"현명하네."


"일단 먼저 바뀐 건 머루였어. 무작정 들이대기만 하면 계속 싸우기만 할 뿐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머루는 약간 거리를 두고 다래를 바라보기 시작했지. 그건 관심이 없어졌다거나 화가 난 것 같은 태도는 아니었어. 여전히 다래가 꼬리라도 조금 흔들거나 풀어지는 모습을 보이면 놀겠다고 다가갔다가 혼쭐이 나길 반복하긴 했거든. 대신 그래도 이젠 안 되겠다 싶을 때에는 딱 적당한 거리를 벌리고 마주 앉아서 다래를 바라보기 시작한 거야.”

“다래는 그랬더니 어떻게 했어?”

“굉장히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아 보였어. 화를 내기엔 약간 애매한 거리이기도 하고, 무슨 행동을 하는 것도 아니고 가만히 앉아서 눈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뭐라고 하기도 좀 그랬나 봐. 여전히 탐탁지는 않아했지만 적어도 왈왈거리며 싸우는 시간은 줄어들었어. 둘 사이의 거리는 알게 모르게 조금씩 좁혀지고 있었지. 그리곤 결정적인 순간이 있었어.”

“그게 뭐였는데?”

“다래는 밥을 먹을 때 가장 예민했어. 그때는 어쩔 수 없이 밥을 주는 사람한테 가까이 가야 했고 먼저 밥을 얻어내기 위해 쟁탈전을 벌여야 했거든. 머루도 식탐이 많기는 했는지라 밥때만큼은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지 다래가 짜증을 내건 말건 밥그릇을 향해 돌진했었고, 다래는 난처해하며 피할 수밖에 없었어. 적어도 그날의 일이 있기 전 까지는 말야.”

“그날은 어땠는데?”

“그날도 우리는 밥을 줬어. 다래 먼저 멀리에 있는 밥그릇에다가 주고, 머루 밥그릇에 사료를 잘 채워주었지. 그런데 이상하게 그릇에 밥을 주는 와중에 머루가 달려들지 않는 거야. 대신 머루는 빤히 다래를 쳐다보고만 있었어. 다래가 여전히 머뭇거리는 듯 보이자 머루는 심지어 조금 더 공간을 주는 듯한 태도로 자기 밥으로부터도 두어 발자국 더 뒤로 물러났어. 다래가 안심하며 밥을 거의 다 먹을 때 즈음이 되어서야 머루 역시 밥을 먹기 시작했지. 일종의 배려였던 셈이야. 빼앗지 않을 거야. 네가 먼저니까 괜찮아. 조금 기다릴게. 하고 말하는 것 같은 태도였거든. 무언가 선물을 하거나 대단히 용기 있는 행동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건 아마 둘 사이의 마음을 여는 계기가 되어주었던 것 같아.”

“그 뒤로 둘은 바로 친해졌던 거야?”

“아니. 그 뒤로도 시간이 많이 걸렸지. 하지만 밥때마다 머루가 다래를 배려하는 것은 그때 시작되어서 주욱 지속되었어. 머루가 중요한 순간마다 거리와 시간을 줄수록 다래는 점점 더 안심하기 시작했고 짜증을 덜 내기 시작했지. 둘은 어느새 서로 킁킁거리면서 냄새를 맡을 정도로 친해졌어. 그리고 어느 날 밤, 잠들기 전에 잠시 마당을 내다본 나는 둘이 같은 개집 안에서 서로를 보듬어주며 잠들어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어. 둘은 친구가 되었던 거야. 서로 말 한마디 통하지 않았을 테고 성격마저도 그리도 달랐는데도 포기하지 않고 배려했기 때문에 말야.”

“정말 멋진 이야기다. 그런데 그게 너의 연애관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응. 되게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그랬어. 내가 머루를 보며 느낀 건 집요함이나 포기하지 않는 열정 같은 너저분한 감정은 아니었어. 그보다는 의도 없는 순수함을 보았지. 머루가 눈치가 빠르거나 아주 똑똑한 강아지는 아니었을 거야. 툇마루에 하루에도 4번씩 머리를 박고 다녔으니 그런 고평가를 내리기는 힘들지. 하지만 그런데도 머루는 다래가 불편해할 행동들을 피하고, 다래의 모습을 따라 하고, 종국에는 배려를 해내는 놀라운 모습을 보였어. 강아지가 그럴 수 있다면, 그것도 강아지 중에서 아주 똑똑한 것도 아니고 아주 평범한 강아지가 그걸 해냈다면, 사람은 더욱 그럴 수 있지 않을까? 싶었던 거지. 나는 머루에게서는 좋아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방법을 배웠던 것 같아. 무작정 희생하며 영원히 기다리는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당장 가져야 한다고 왈왈거리며 달려들지도 않는 편안한 기다림을 말야."


"다래에게서는?"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 배려해주는 사람에게 마음을 여는 방법을 배웠지. 세상이 싫을지라도 그 세상 속에 나를 위한 한 가지 의미쯤은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셈이야. 때론 내가 원하는 것만이 중요한 것처럼 느껴지겠지만, 다른 사람이 원하는 것을 이해하면서 더 큰 의미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은 내겐 굉장히 큰 깨달음이었어. 사실 나는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들을 굉장히 싫어했거든."


"일종의 자기혐오였을까?"


"아마 그랬지 않았을까? 사랑받을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니까 사랑해주는 것 마저도 부담스럽고 싫고, 사람들이 다가오는 것 마저도 불편했던 셈이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마음을 열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다래의 영향이 커. 가장 싫은 것 속에도 내가 좋아할 만한 가치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은 마음을 열지 않으면 영영 모를일일테니까."


"좋은 일이네. 그 가치관으로 네가 어떤 사람들과 어떤 연애를 하게 되었는지 궁금하기는 하지만, 일단은 다른 게 더 궁금하니까 물어볼게. 그래서 다래와 머루는 어떻게 되었어?"


그는 아주 긴 숨을 코로 천천히 내쉬었다. 한숨이라기보다는 자신의 기억을 스스로에게 먼저 설명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의 시선이 그의 표정에 찬찬히 맺히기 시작할 때에 그는 이야기를 이었다.


"둘은 부부가 되었어. 우리 집 가족들은 모두 둘이 부부가 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지."


"어... 음.... 말을 되게 이쁘게 한 것 같기는 한데.. 그건 결혼식 같은 걸 얘기하는 건 아니지?"


"어. 응. 말도 마. 고등학생이었는 데다가 순진무구한 편인 나에겐 정말 충격적인 장면이었지. 조용히나 했으면 말을 안 해. 낑낑거리고 깽깽거리고 어디에 뭐가 꼈다고 난리가 나서 정말 민망함에 대들보를 뽑아서 귀를 막고 싶은 심정이었어."


"음... 그래.. 그럴만하네...."


"물론 그 행위는 나를 불편하게 했지만, 그 결과는 아주 아름다운 것이기는 했어. 다래가 곧 애엄마가 되었거든. 배가 천천히 불러오는 그 모습은 찬란하고 경이로운 것이었어. 다래는 여전히 툇마루에 앉아서 눈을 반개한 채로 모든 것을 살펴보았지. 근엄한 수호신 같은 모습은 그대로였어. 하지만 예전에는 그 모습이 졸려 보였다면, 이제는 배가 불러와서 꼼짝도 할 수 없기 때문에 그곳에 앉아있는 것 같은 모습이 더 컸어. 어딘가 보호적이고, 어딘가 더 현명해진 것 같은 모습이었지."


"머루는 어땠어?"


"아주 기뻐하는 모습이었지. 사실 항상 그렇게 기뻐 날뛰는 아이였기 때문에 실제로 더 기뻐 보였는지는 잘 모르겠어. 그냥 내가 그렇게 기억하고 싶을 수도 있을 것 같아."


"다래를 더 배려하지는 않았고?"


"응. 그냥 평소와 같았어. 대신 다래에게 조금 더 거리를 두는 모습을 보였지. 그건 가까이 가기 싫다기보다는 산모에 대한 배려였을거야. 나 같아도 뱃속에 애가 있는데 애아빠가 근처에서 해맑게 날뛰면 기분이 좋지는 않을 것 같거든. 우리도 그것이 옳다고 생각해서 산책을 머루만 데리고 나갈 때가 많았어. 그게 문제가 되었지."


그는 잠시 머뭇거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아직 그 이야기가 아프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아주 살짝이었지만 가빠진 숨결에서는 고통의 향기가 묻어 나왔다. 나는 잠자코 그를 기다려보았고, 그는 마침내 어느 순간 용기를 얻어 말을 시작했다.


"그건 내 잘못이었어. 내가 그래도 괜찮을 줄 알았거든."


"무엇을 했는데?"


"그날은 내가 분리수거를 하러 내려가야 하는 날이었어. 그날따라 날씨가 좋았어서 괜찮을 줄만 알았던 내 잘못이었지. 머루는 대문 입구에서 같이 나가자고 난리를 쳐댔고, 나는 두 손 가득 든 쓰레기 때문에 그 아이를 저지하는 것이 어려웠어. 그렇다고 목줄을 가지러 가기엔 너무 귀찮았지. 그래서 나는 괜찮다고 생각하면서 대문을 열었던 거야. 그리고 머루는 쏜살 같이 달려 나갔지.


처음에는 괜찮았어. 항상 뛰어갔다가도 곧 다시 뛰어오는 아이였거든. 세상 누구보다도 반가워하면서 다시 뛰어와 안기곤 했어. 그날도 처음에는 그랬지. 머루가 먼저 골목 앞까지 달려 나갔고 나는 두 손 가득 쓰레기 봉지를 들고 뒤쫓았어. 혹시라도 낯선 사람에게 짖을까 봐 걱정하면서, 그리고 짖으면 꾸짖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말야. 하지만 다행히도 머루는 항상 그랬듯 쓰레기를 버리는 곳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지. 사방팔방 킁킁대고 있기는 했지만 어쨌든 멀리 가지는 않았던 셈이야. 그리고 내가 안심하고 쓰레기를 내려놓는 순간에 일이 벌어지고 말았어.


그건 아주 까만 승용차였어. 머플러가 고장이라도 났는지 아주 요란한 소리를 내는 검은 승용차. 그 승용차는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는지 무서운 속도를 내며 우리 골목 앞을 지나갔고, 그 속도만큼이나 끔찍한 부우웅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어. 그게 머루를 자극했지. 

머루는 아주 흥분한 태도로 짖으며 그 승용차를 쫓아갔어. 그리고 바퀴에 부딪혔지. 내가 소리조차 지를 수 없을 만큼 짧은 순간이었어. 승용차는 자기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 줄도 모르는 채로 언덕 너머로 사라져 갔고, 나는 허겁지겁 머루에게 달려갔어. 그리곤 그 아이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다가 눈을 감는 모습을 지켜봐야만 했었지. 다 내 잘못인데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어. 그래서 나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우두커니 서있어야만 했었어."


"병원... 에는 안 갔어...?"


"응. 병원에 가고 말고 할 것이 없었어. 이미 내 품 안에서 숨을 거둔 상태였거든. 나도 너무 충격을 받고 가족들도 너무 충격을 받아서 사실 그 이후에 어떻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제대로 기억을 하는 사람이 없어. 내가 기억하는 거라곤 집에 돌아왔을 때 다래가 언제나처럼 나를 빤히 바라봐주었다는 것뿐이야. 왜 혼자 돌아왔느냐고 물어보는 것 같은 그 눈빛에, 그리고 이미 가득 불러오는 배 안의 강아지들에게서 아빠를 앗아간 것 같은 죄책감에 나는 차마 다래를 똑바로 쳐다볼 수 조차 없었어. 그리곤 다음날 학교에 갈 수조차 없어서 결석했지."


"그게 언제야?"


"우리 같은 조로 발표했었잖아? 그 발표 일주일 전이야."  


"그럼 우리가 메신저로 발표 준비하고 있을 때인 거야?"

"아마 그때 즈음일 거야. 그 발표 준비하면서 굉장히 힘들었던 게 기억이 나거든. 그때 제정신이 아니었는데 갑자기 발표시켜서 되게 곤란했었어."


나는 그때 내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달으며 급격한 미안함을 느꼈다. 안 그래도 힘들었을 텐데 참여를 덜한다고 몰아가 발표자까지 시킨 건 나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는 내 미안함을 나보다도 먼저 눈치채고 손사래를 쳤다.


"미안해하지는 마. 그래도 그 발표라도 했어서 다행이니까. 그 덕분에 좋은 일들이 많이 생겼거든."


"괜찮았다고?"


"응. 나 역시 그때 처음으로 마음을 열었어."


그는 힘들어서 학교에 가지 못했던 그날 반장이었던 성희가 집 앞에 찾아왔었다고 그랬다. 그는 사실 성희라는 아이를 잘 몰랐지만, 성희는 그에 대해서 관심이 아주 많아서 오래전부터 지켜봐 왔었다. 그건 어쩌면 기묘하고 깊은 감정을 가진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는 특별한 파장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그를 이상한 아이라고 느꼈던 것과 마찬가지로 성희도 그에게서 독특한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성희는 그에게 찾아와 집 밖으로 끌어내었고, 가까운 공원을 함께 산책하며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때 그는 태어나서 한 번도 하지 못했던 만큼의 말을 해냈고, 한 번도 흘려보지 못했던 만큼의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성희는 단 한 번도 같이 울어주거나 괜찮다는 말을 건네지 않았다고 한다.


"성희는 그때 그랬어. 자기가 울어주는 건 도움이 안 되고, 공감해주는 건 능력이 안된다고. 다른 사람이 얼마나 사랑했는지와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는 가늠할 수가 없는 거라고 말야. 그래서 나는 물어봤지. 그러면 뭐하러 여기까지 와서 같이 있어주는 거냐고, 위로할 수도 없고 도움을 줄 수도 없다면 안 오느니만 못하지 않냐고 그랬지."


"그랫더니 성희가 뭐라고 그랬어?"


"한 발자국 물러서서 바라봐줄 수는 있다고 그랬지. 그러면 사람들은 각자 저마다의 빛을 되찾는다고 말야. 성희는 그랬어. 사람마다 고유한 별빛이 있는데, 그 빛이 우울이란 먹구름에 가려질 때에 여행자들이 할 수 있는 건 구름 뒤의 별빛을 상상하며 기다려주는 것뿐이라고, 그리고 그 기다림 만으로도 별은 언제고 다시 빛난다고 말야. 성희는 그렇게 한 발자국 물러서서 기다려주었어."


"그게 도움이 되었어?"


"도움이나 위로가 되었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아. 성희는 딱히 힘이 되어주려고 찾아온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 대신 나는 성희에게서 머루와 다래의 모습을 보았다는 것은 확신할 수 있어. 발자국 물러서서 기다린다면 마음을 열 수도 있다는 것을, 그리고 마음을 열면 아기 강아지들 같은 기쁨이 찾아들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둘에게서 배웠거든. 아무것도 건네지 않은 채로, 그저 이야기를 받아주는 채로 성희는 그곳에 있었어. 마치 가장 사랑하는 동물들이 인간들에게 그러해주듯이, 그저 바라보는 채로 말야."


"그래서 그날 발표가 끝나고 성희가 안아줬구나."


"응. 나는 발표가 힘들다고, 주제도 그렇고 상황도 그렇고 내가 할 수 없을 것만 같다고 성희에게 말했지. 그랬더니 성희는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해보라고 했었어. 내가 바라는 것을 담아서 말하다 보면 다 괜찮을 거라고 말야. 그래서 나는 머루가 행복하기를, 다래도 행복하고 살아있는 모든 것이 다 행복하기를 바라면서 그 발표를 할 수 있었지. 그게 내가 받은 위로였어. 성희가 나를 위로해준 게 아니라 나 스스로 내 위로를 만들었고, 성희는 그걸 축하해준 셈이었던 거야."


나는 그제야 그때의 그 기묘한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더불어 내가 왜 그 순간을 수놓던 감정들을 이해할 수 없었는지도 알 수 있었다. 그때의 그 모습들에는 누군가를 사랑하거나 애정을 품어서 생기는 종류의 감정이 깃들 수도 없었고 연민이나 궁휼함이 자리잡지도 않았다. 그곳에는 위로와 공감이 있었지만, 그건 타인에 대한 위로와 공감이 아닌 자기 자신에 대한 위로와 공감이었다. 그래서 그는 울며 위로받을 수 있었고, 성희는 미소로 위로할 수 있었다는 것을 나는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마침내 격랑을 뚫고 모습을 드러낸 돛단배처럼 강인한 미소로 말했다.


"그래서 나는 슬펐지만, 미치도록 슬프고 절망스럽도록 죄책감이 들었지만, 그때를 넘어서 잘 살아갈 수 있었어. 사랑해서 배우고, 사랑해서 아팠던 첫 순간이었던 셈이야. 상실에 대한 첫 번째 수업이었지. 그리고 나는 운이 좋았어서 다래와 머루, 그리고 성희와 같은 좋은 선생님들을 만날 수 있었어. 그게 내가 지금까지도 잘 살고 있는 이유인 거겠지."  


나는 그를 마주 보았다. 그는 오늘 내가 여태까지 봐온 그의 그 모든 모습들보다도 많은 말들을 내게 내어주고 있었다. 나는 잠시 숨을 고르고 그에게 물어보았다. 다음 이야기는 더 길어질 것을 그보다 내가 더 잘 알고 있었다. 이 순간은 우리 둘 모두에게 처음의 순간이었지만, 내겐 예정되어있던 이야기이기도 했다. 나는 귀를 세우고 그에게 물었다.


"그럼 다래는? 그리고 다래가 배고 있던 아이들은 어떻게 되었어?"


그는 눈을 잠시 감았다가 뜨며 두 번째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의 눈빛이 별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두 번째 이야기에서 계속




                                                                                                                                                                                                                                                                                                                                        


이전 01화 그들만의 작은 천국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