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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원호 Nov 17. 2019

그들만의 작은 천국 2화

가을 단편소설집 두 번째 이야기 : 밤에 피는 꽃


두 번째 이야기 : 밤에 피는 꽃






그가 처음 강아지들을 만난 것은 7월이었다. 그 순간은 한여름과 함께 기적처럼 찾아왔다. 한여름은 공기를 덥히고 마음을 뜨겁게 만들었고, 어미개 뱃속의 강아지들은 그 쪼꼬만한 형체들을 귀엽게 꼬물거렸다. 어미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숨을 가쁘게 헉헉대며 곧 태어날 아이들을 기다리는 것뿐이었고, 그와 가족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애타게 지켜봐 주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것 만으로도 충분한 일이었다.


무사히 3학년이 된 그는 여러 가지 새로운 시련들에 시달렸다. 마음을 지켜줄 친구들을 얻었다고 생각했고 사랑 따위는 필요 없다고 생각했지만 영혼 서랍장의 한 칸은 언제나 비어있었다. 잠시 불타는 듯한 짝사랑에 시달렸던 정신 나간 순간들도 있었다. 감정은 목조주택의 화마처럼 그를 온통 휘감아 다른 생각을 할 수조차 없게 만들었다.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타들어가는 것만 같은 상념들이 그를 괴롭혔고, 좋아하는 아이의 모습이 만져질 듯 선명하게 눈앞에 펼쳐졌다. 하지만 다행인 것은 그 짝사랑은 가능성이 없었기 때문에 되려 부드럽게 지나갔다는 점이었다. 다가설 용기조차 낼 수 없는 상황에서 불길은 조용히 내면을 태우다가 사그라들었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불쏘시개를 찾아 새벽의 해변을 헤매기보다는 일기장을 태워 책을 읽는 사람. 그래서 그는 말을 덜 했고 사랑을 덜 했다. 그것 만으로도 충분한 일이었다.


그런 그에게 운명의 순간이 찾아온 것은 야간 자율 학습이 시작될 때 즈음이었다. 마악 저녁을 먹고 친구들과 어울려있던 그에게 어머니께 한 통의 문자가 날아왔다.


 - 집으로 올 것. 급함.     

그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머니께서 이런 문자를 보냈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는 대강 자리를 정리하고 학교를 나섰다. 야간 자율 학습시간에 도망치는 듯 보이는 그를 아주 많은 아이들이 부러움과 질시, 그리고 이상한 놈이라는 시선으로 보았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새로운 순간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일이었다.

집에 도착하자 어머니께서는 안절부절못하고 계셨다. 그리고 그 이유를 찾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젓가락같이 두꺼운 장대비가 내리는 가운데 다래는 강아지들을 낳고 있었다. 뿌연 장맛비 사이로 동산처럼 부른 배를 안고 누워 헥헥 거리는 다래의 모습은 안쓰러운 동시에 경이로움이었다. 그 작은 몸 안에서 어찌도 그리 강인한 생명력이 박동하는지 다래의 작은 호흡 하나하나가 빗속을 뚫는 경적소리처럼 세상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이미 손바닥만 한 작은 새끼 강아지 한 마리가 태어나서 다래 곁에서 꿈틀거렸다. 창백한 그것은 점액질과 피막으로 온통 뒤덮여 있었지만, 다래는 곧 그 모든 것을 핥고 또 핥아서 깨끗하게 만들었다. 누가 가르쳐 준 적이 없음에도 다래는 이미 능숙한 어머니였다. 갓 태어난 새끼 강아지는 다래의 정성 어린 입맞춤 속에서 끙끙거리고 낑낑거리며 점차 강아지다운 형체를 찾아가고 있었다. 삶은 사랑 속에서 박동하며 소란스럽게 태어나고 있었다. 그는 손을 꼭 쥔 상태로 그 신비를 지켜보았다.

 다래는 땀에 흠뻑 젖어가며 계속 강아지를 낳았다. 한 마리 한 마리씩 강아지들은 눈도 못 뜬 채로 세상으로 나왔다. 다래는 무엇 하나 놓치는 것 없이 강아지들을 삶의 입맞춤으로 세례 시켜주었고, 그것만으로도 이 작은 강아지들에겐 충분한 축복이었다. 처음 태어난 녀석은 어느새 털이 조금 말라서 우윳빛으로 변해가고 있었고 그 사이에 둘째가 태어나고 있었다. 둘째는 덩치 큰 갈색이었다. 벌써부터 오동통한 다리 굵기가 심상치 않았다. 셋째는 낑낑거리며 말이 참 많은 채로 태어났고 넷째는 공주님처럼 다소곳하게 태어났다. 얼마나 많은 생명을 그 작은 배 안에 담았던 것인지 강아지들은 끊임없이 다래 안에서 박동하며 태어나고 있었다. 다섯째는 모든 게 다 끝난 줄 알았을 때 갑작스럽게 태어났다. 밤하늘처럼 새카맣고 작은 예쁜 아이였다. 다치거나 아픈 녀석 하나 없이, 강아지 다섯 남매는 그렇게 폭우 속에서 그의 세상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참 충분한 일이었다.


처음 2주 동안 강아지들은 눈도 못 뜨고 꼬물거렸다. 아직 쥐 나 토끼 새끼와 다름없을 정도로 해괴한 몰골이었지만 그들은 울음을 터트리고 낑낑거리고 서로를 짓밟고 어미를 찾으며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온 세상에 확실하게 각인시켰다. 다래는 변한 것 없이 그대로 차분하게 모든 것을 바라보았다. 조금 피곤하고 지쳐 보이기는 했지만, 그건 누구라도 다섯 쌍둥이를 낳은 직후라면 느낄법한 감정일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피곤할지언정 다래는 꼬물이들의 뒤치다꺼리는 확실하게 했다. 한 마리 한 마리 세심하게 지켜봐 주는 다래의 황금색 눈빛에는 여래의 보살핌이 깃들어 있었다.

삼 주 째 되는 날, 첫 번째 아이가 눈을 떴다. 순백색의 주둥이가 긴 남자아이였다. 그 아이는 처음으로 바라본 빛이 두렵다는 듯이 잠시 낑낑 거리는 소리를 냈지만 곧 꼬물거리는 시선으로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는 기묘한 감정 속에서 그 작은 생명을 바라보았다. 아직 강아지라고 부르기도 어색한 따스한 형체는 마치 다 안다는 듯이 그의 시선 속에서 평온하게 머물러 있었다. 그 순간, 그는 마음 서랍장의 비어있던 한 자리가 잠시 차는 것을 느꼈다.


한 마리씩, 아이들은 차근히 눈을 떴다. 눈을 뜬 뒤에는 엉금엉금 기어 다니기 시작했고, 조금 뒤에는 엉금엉금 걷기 시작했다. 걷기 시작한 뒤에는 아주 시끄러운 나날들이 펼쳐졌다. 떨어졌다고 낑낑거리고 올려달라고 징징거리고 쟤네들 다 내려가서 맛있는 거 먹는데 나만 왕따라고 왕왕거리는 다섯 마리의 새끼 강아지들 틈에서 가족들은 모두 바빴다. 가장 한가한 것은 아무래도 다래였을 테지만, 누구보다 고생한 것 역시 다래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이들은 모두의 따스한 보살핌 속에서 착실히 커갔다. 


다 똑같아 보여도 아이들은 성격이 모두 달랐고, 그 사실은 그에게 아주 큰 흥미와 애정을 느끼게 해 주었다. 맏이인 밤색 여자아이는 너부대대하고 폭신한 외양과 그에 어울리는 무던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고, 그 어떤 일에도 쉽게 흔들리는 일이 없었다. 누가 밥을 주건 만져주건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차분한 그 모습은 어미인 다래를 빼다 박은 것이었다. 둘째인 흰색 남자아이는 아주 잘생긴 데다가 똑 부러지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인 머루를 닮은 것이 분명한 외양은 바라보는 그에겐 기쁨인 동시에 슬픔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머루의 성격마저 닮지는 않아서 침착하고 호기심 많은 모습이 많이 나타났다는 점이었다. 그는 둘째가 아주 멋진 강아지로 클 것임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되려 머루의 성격을 닮은 것은 셋째인 갈색 남자 강아지였다. 셋째는 아주 쉽게 흥분하여 날뛰는 것은 물론이고, 형제자매에게 가장 자주 으르렁거릴 정도로 예민한 아이였다. 그만큼 장난기가 많고 놀고 싶어 하는 순간도 많았지만 가끔 지나친 장난에 혼날 때도 많은 말썽꾸러기였던 셈이다. 다섯째는 막내답게 아주 순둥순둥 한 성격과 소심함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까만 여자 강아지였다. 막내는 낑낑거리거나 짖는 법이 없었다. 대신 똘똘한 눈빛으로 사람을 바라보며 마치 웃는 듯 사랑스러운 표정을 자주 지어주었을 뿐이다. 가장 조그마한 아이였기 때문에 막내는 가족들의 사랑을 아주 담뿍 받았다.


하지만 그의 마음에 쏙 들어왔던 것은 무던한 첫째도, 똑똑하고 장난 많은 셋째도, 귀여운 막내도 아닌 넷째 강아지였다. 하얀색의 작은 몸뚱이와 길고 긴 속눈썹을 가진 이 예쁘장한 강아지는 다섯 마리의 사랑스러운 아이들 중에서도 가장 기묘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이 아이는 구석에 숨어 들어가서 낮잠을 자는 것을 좋아했을 뿐만이 아니라 아무리 찾고 불러도 자기가 내킬 때가 아니면 코빼기도 안 보이는 도도함을 가지고 있었다. 겁은 어찌나 많은지 사람이 안아 들려고만 하면 기겁을 하고 도망을 갔으며, 그런 주제에 애정표현은 또 가장 많아서 누가 외롭게 앉아 있으면 가서 코를 비비고 덥석 안기는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그는 이 새하얗고 새침한 공주님과 사랑에 빠졌다. 밥 먹자고 불러도 안 나오는 주제에 언니 오빠들 밥 먹는 걸 온통 헤집어놓는 말썽쟁이였지만, 그에겐 그것마저 단점이 아닌 사랑스러운 부분이었다. 


그가 넷째를 가장 사랑한 것에는 사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둘째 주가 되던 날, 그는 짝사랑하던 여자아이에게 문자를 보냈었다. 강아지들이 태어났다고, 너무 예쁘지 않느냐고 말이다. 사실 그가 짝사랑하는 아이에게는 이미 남자 친구가 있었고, 덕분에 그는 확실한 이유가 없으면 개인적인 문자를 보내지조차 못했다. 기껏 얻은 우정마저도 흐트러질까 봐, 이상하고도 불쾌한 사람이 혹여라도 될까 봐 그는 조심스럽고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강아지들이 태어난 것은 그래도 문자 정도로 말해줘도 괜찮은 일일 것만 같았다. 그는 되도록 죄책감과 고통을 느끼지 않으려고 애쓰며, 그리고 이미 써놓은 문자를 백번 하고도 두 번쯤 고쳐가며 연락을 했었다.


답변은 즉각적이었다. 


 - 오와! 오와! 오와! 완전 예뻐! 아직 눈도 못 뜬 거봐!


그는 답변에 안도하며 다시금 긴장했다. 뭐라고 답변을 해야 할지, 어떻게 이야기를 이어가야 어색하지 않을지, 어떻게 말해야 감정을 들키지 않으면서도 사랑받을 수 있을지, (그리고 어떻게 해야지 40글자를 넘기지 않아서 mms로 만들지 않을 수 있을지) 수천수만 개의 별 같은 고민들의 그의 마음을 헤집었다. 그는 고심 끝에 다시 답장을 보냈다.

 - 내일 사진 많이 찍어갈게! 아 근데 혹시 있잖아.. 되면 이름 짓는 것 좀 도와줄 수 있을까? 

 - 응! 당연하지! 꼭 사진 많이 찍어와!     

     

그는 다음날 아침, 텅 빈 교실에 짝사랑하는 소녀와 단 둘이 시간을 보내는 마법 같은 순간을 겪을 수 있었다. 소녀는 아침햇살이 모든 것을 광휘로 물들이는 교실에 앉아서 핸드폰으로 찍어온 강아지 사진들을 봐주었고, 행복하고 즐거운 감탄사와 탄성이 연신 세상을 물들였다. 그 순간의 세상에는 기쁨과 행복만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그에게 물었다. 왜 이름을 짓는 것을 도와달라고 했느냐고, 다른 친구들도 많은데 하필이면 자신이냐고 말이다. 그는 마음을 들키지 않게 조심하며 대답했다. 그래야지만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고, 강아지도, 너도 모두 마음에 길게 남을 것 같다고 말이다. 쾌활한 성격의 소녀는 깔깔 웃으면서 알겠다고 그랬고, 그는 조금 얼굴을 붉혔다. 그 자체만으로도 설렘의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것만 같았다.


하지만 행복의 순간은 생각보다 빠르게 깨어졌다. 아침해가 완전히 떠올라 세상을 밝히기 시작하자 스쿨버스를 타고 등교한 아이들이 교실로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고, 그중에는 그가 짝사랑하는 소녀의 남자 친구도 있었다. 소녀의 남자 친구는 대뜸 교실로 들어와서 매점에 가자면서 그녀를 휑하니 데리고 나갔다. 이름은 지어지지 못했고, 그의 마음에는 다시 아픔과 외로움이 자리 잡았다. 소녀가 떠난 자리에는 그녀가 좋아하던 글자 몇 개만이 종이 위에 남겨져있었을 뿐이었다.


그날 밤, 그는 집에 돌아오며 잔잔한 상실감을 곱씹었다. 남자 친구에게 소녀와의 시간을 빼앗긴 뒤로 그는 그녀를 마주칠 기회가 없었다. 그리고 그는 이 것이 지금 뿐만이 아니라 앞으로도 쭉 일어날 일이라는 것을, 앞으로도 느낄 감정이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다른 누군가와의 관계를 만들어나가고 있는 사람에게 욕심을 내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그는 자신의 상실감을 제대로 받아들일 수 조차 없었다. 좋아하고 싶어서 좋아하는 것이 아닌데, 마음이 가는 것은 마음 가는 대로 할 수 없는 법인데, 그는 그 모든 것을 알기엔 너무 어리고 어설퍼서 너무 아파했다.

가까스로 집에 도착해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을 때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미 늦은 밤이었고 강아지들은 모두 집에 들어가서 잠들어있었다. 다래는 그를 보며 눈빛을 빛내며 꼬리를 흔들기는 했지만, 강아지들이 혹시라도 깰까 봐 두려운지 집 밖으로 나오지는 않았다. 홀로 밤을 머금고 앉은 그의 슬픔은 가중될 수밖에 없었다.  


그때였다. 강아지 중 한 마리가 낑낑대기 시작하더니 그 자그마한 발을 놀려서 열심히 기어 다니기 시작했다. 그 작은 하얀색 앞발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분명히 알고 있다는 듯이 평소보다도 훨씬 힘 있게 움직이고 있었다. 가까스로 집 밖으로 기어 나온 작은 강아지는 한없이 낑낑거렸고, 다래는 그 소리를 들으면서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아직까지 아이들은 눈도 제대로 못 뜰 정도로 어려서 다래는 꽤 보호적인 태도를 취했는지라 아직 가족들 중 누구도 새끼들에게 손가락 하나 대어보질 못한 상태였다. 조금 다가설라치면 다래는 화가 난 표정으로 쏘아보곤 했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의미가 전해져 왔었다. 


하지만 오늘은 무언가 달랐다. 그는 다래가 다 알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으면서도 그러면 괜찮다고, 한 번 손을 대어보라고 얘기하고 있는 것 같은 다래의 모습에 그는 약간의 용기를 얻었다. 다래는 응원하는 듯이 그를 빤히 쳐다보았고, 새하얀 강아지는 기나긴 낑낑거림의 끝에 그의 손에 닿았다. 그는 보석을 매만지는 느낌으로 조심스럽게 아기 강아지를 안아 들었다. 그러자 코를 핥짝거리며 낑깡끙끙 거리던 그 아이는 누가 자기를 안아 들었는지 확인이라도 하겠다는 듯이, 가느다랗게 실눈을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물빛 같은 두 눈이 마주치는 그 순간, 그는 자신을 괴롭히던 모든 감정들이 다 잊히는 것을 알았다. 화마가 휩쓸던 마음속에는 차분하고 고요한, 잠과 같은 물빛이 머금어지고 있었다.


그것이 넷째와 그의 첫 교감이었다. 그때는 그 아이가 처음 눈을 떴던 순간이었고, 그는 그 아이가 바라본 최초의 것이자 변함없이 사랑해야 할 것이 되었다. 그 아이 역시 그의 마음속에서 변함없이 사랑해야 할 존재가 된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때 그 순간, 그는 어렴풋하게나마 이 품에 안긴 작고 사랑스러운 존재의 이름을 알 수 있었다. 모두가 깊게 잠든 밤에 홀로 피어나는 꽃, 수련이었다.



수련이라는 이름은 참 묘한 것이었다. 아주 많은 사람들이 수련이라는 꽃이 물가에서 피어서 그런 이름을 갖게 된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수련은 '잠을 자는 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리고 넷째 강아지는 그 이름에 어울리게도 잠이 많은 것은 물론이고 아주 졸려 보이는 어여쁜 눈을 가지고 있었다. 언제나 꿈을 꾸는 것 같은 그 느린 눈동자 속에선 그의 시름이 한 덩이씩 한 여름의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렸다. 수련이는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조차 모르는 채 잔디를 앙금앙금 씹어대며 그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지만, 그는 수련이의 눈동자 속에서 고요와 평온을 느끼곤 했다. 때론 어떤 일들은 건네는 사람보다도 받는 사람이 중요한 법이다. 그리고 그는 수련이가 무엇을 주려고 하려는지와는 상관없이 참 많은 것을 받고 있었다.


그 해 가을, 그들은 수련이를 제외한 나머지 강아지들을 다른 집으로 입양 보냈다. 마당이 넓다고 한들, 6마리나 되는 성견을 키울 수 있는 집은 아니었다. 강아지들이 더 크기 전에 입양을 보내는 것이 사람을 위해서도 강아지를 위해서도 더 나은 선택이었다. 

다른 강아지들이 떠나던 와중에도 수련이는 툇마루 밑에 숨어서 나오질 않았다. 언니 오빠한테 인사하라고 어르고 달래 보아도 삐진 건지 슬픈 것인지 토실한 엉덩이와 깡총대는 꼬리 꼬다리만 보였을 뿐이다. 다래는 떠나는 아이들에게 꼬리를 분주히 흔들어 주었고, 아이들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른 채 해맑은 작별인사를 했다. 기껏 해봐야 3개월 남짓이었지만, 삶과 사랑의 흔적들이 그들의 표정에 남아 있었다. 수련이는 모두가 떠난 뒤에야 배가 고팠는지 낑낑거리며 기어 나왔다. 텅 빈 마당의 흔적 속에서 그는 수련이 콧잔등에 코를 비비며 아쉬움과 그리움을 달래야만 했다.


그는 계속 수련이와 함께 커갔다. 고등학교가 끝날 때쯤의 수련이는 어느새 제 어미만치 만치 자라 있었다. 눈도 못 뜨고 꼬물거리던 것이 어제 같았는데 어느새 앞발로 제 어미를 툭툭 건드리며 놀자고 괴롭힐만한 크기가 된 것이다. 다래는 귀찮다는 듯이 으르렁거리고, 이제 다 컸으니 나를 내버려 두라는 식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수련이는 지가 만족스러울 때까지 다래를 괴롭히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아마도 그것은 수련이만의 애정이었을 것이다. 마냥 좋아하여 마냥 괴롭히는 솔직함은 그 자체만으로도 사랑이기는 했다.


그의 애정은 수련이와는 약간 다른 방식으로 자랐다. 자신이 만족스러울 때까지 상대방을 들들 볶는 것은 그의 방식은 아니었다. 물론 그러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이 한 번도 들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답장이 올 때까지 문자를 쓰고 싶었고, 전화를 받을 때까지 전화를 걸고 싶었으며, 사랑을 돌려받을 때까지 사랑하고 싶었다. 하지만 만약 그랬더라면 그가 하고 있던 짝사랑은 비극으로 끝났을 것이 분명했다. 어느 날, 그가 짝사랑하던 소녀는 그에게 말했다. 자신의 마음이 닿을 때까지 고백하는 것은 폭력이라고, 그건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앙갚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때의 소녀는 운동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촌극을 보다가 말한 것이기는 했지만 (어느 말라깽이 남자아이가 같은 반 여자아이에게 고백한답시고 1000송이의 장미를 들고 세레나데를 부르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 역시 마음 한켠이 죄책감에 찔려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는 없었다. 둘의 관계는 그때 이미 좋았고, 더 이상 무엇을 할 필요가 없는 상태였고, 그는 그녀에게 이미 받은 것이 많았는지라 돌려준답시고 앙갚아버리는 멍청한 짓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좋아하여 괴롭히는 대신, 좋아하여 사그라들 때까지 좋아하기만 했다.


그 과정이 쉽지는 않았던 것은 분명하다. 그는 아파하고 또 아파했으며, 외로워하고 또 외로워했다. 돌려받지 않으며 사랑하는 짝사랑도 어렵지만, 돌려주지 않기 위해 사랑하는 것은 그보다도 더 어려웠다. 마음이 어지러워 날숨이 길어질 때마다 그는 수련이의 작은 발과 졸린 눈을 들여다보며 마음을 다독였다. 수련이는 말을 아주 잘 들어주지는 않았다. 사실 말을 들어주기는커녕 아주 지멋대로인 말썽쟁이였는지라 지가 놀고 싶을 때는 발을 내밀어 툭툭 치고 귀찮거나 무서울 때에는 집구석에 숨어서 얼굴 반쪽만 내민 채로 사람들을 째려보곤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수련이가 다 포기했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며 곁에 다가와주는 순간들도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런 순간들은 참 공교롭게도 그가 특히 외로워하고 괴로워하던 나날들에 있었다. 그의 머리 위에 먹구름이 세 개쯤 떠 있을 때면 수련이는 옆에 와서 친구처럼 그를 쿡쿡 찔렀다. '야. 괜찮냐? 별거 아냐. 나 여기 있어.' 하고 말하는 것 같은 태도였다. 그럼 그는 아파하던 와중에도 미소 지으며 수련이를 안아줄 수밖에 없었다. 수련이는 그의 품에 안겨서 만족스러운 표정이나 즐거운 표정을 짓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나는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강아지요' 하는 괴이 망측한 표정을 지었다. 겁이 많은 수련이는 누구에게 안기는 것을 무서워했고 매사에 조심스러웠다. 그래서 그가 고마워 안아줄 때에도 차마 내려달라고 낑낑거리지는 못하고 불쌍한 표정만을 한가득 지어 보이곤 했다. 하지만 그 표정에서마저도 그에게는 위로였다. 수련이는 다른 모든 것에서는 도망쳐도 그의 외로움 앞에서는 도망치지 않았다. 누군가가 항상 그 자리에서 외로움을 달래준다는 것은 그에게는 위대한 경험이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일이었다.




수련이는 자라며 집 마당을 자신만의 작은 천국으로 삼았다. 마당은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정신없는 곳이었지만, 또 바로 그렇기에 수련이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있었다. 여름에는 꽃이 만발했고 가을에는 까치가 울어대었다. 겨울에는 눈이 소복히 쌓이고 봄에는 제비가 찾아드는 마당은 수련이에겐 집이자 세상이요, 안식처인 곳이었다. 겁이 많아서 밖에 자주 나가지는 않았지만 수련이는 집 안에서는 왕처럼 굴었다. 담장을 타고 지나다니는 신사다운 고양이들과 인사와 말다툼을 한 것은 물론이고, 때론 밥을 빼앗아먹는 돼지 같은 도둑 비둘기들과 치열한 눈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재잘스러운 참새들은 개밥을 한 알 한 알 훔쳐가는 대신 세상의 온갖 이야기들을 수련이에게 들려주었고, 가끔씩 처마 끝에 앉아서 노래하는 동고비들과 까치들은 나른한 오후의 라디오 같은 존재였다. 화분이 억새처럼 뒤엉킨 화단에서 나무뿌리를 뜯어먹고, 어제 선물 받은 뼈다귀를 내년에 먹으려고 흙속에 파묻어가며 수련이는 자신의 세상을 마음껏 누렸다. 머뭇거리지 않고 사랑했기에 수련이의 세상에는 행복이 그득했다. 수련이는 매 순간 진심을 다해서 사랑할 줄 알았다. 무섭고 두렵더라도 사랑했고, 짜증 나고 귀찮더라도 사랑했다. 그리고 그것이 수련이가 자기 자신만의 천국을 만든 비결이었다.


수련이가 그렇게 행복하게 자랄 수 있었던 것은 아무래도 다래에게서 배운 부분들이 컷을 것이다. 다래는 아무리 몸이 안 좋고 귀찮더라도 가족들이 오면 자리에서 일어나서 꼬리를 흔들며 인사 정도는 했고, 수련이 역시 그것을 따라 배웠다. 그즈음해서 가족들은 수련이가 냄새를 잘 맡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었다. 겁이 많은 이유를 이해하게 되고, 가족들에게 때때로 짖게 된 원인을 알게 된 것이다. 다래는 가족들이 골목에서 걸어오고 있을 때부터 냄새를 맡고 차분하게 기다릴 줄 알았던 반면에 수련이는 대문 앞에 누가 서있기만 하면 들어오면 혼쭐을 내주겠다는 태도로 짖었다. (그러면 다래는 세상 멍청이를 다 본다는 한심해하는 표정으로 수련이를 물끄러미 쳐다보곤 했다.) 냄새를 잘 맡을 수 없으니 어찌 보면 그 두려움은 참 애달픈 것이었던 셈이다.

대신 수련이는 가족들이 대문을 열고 들어오면 얼굴을 바로 알아보며 앞까지 달려 나가서 예쁜 미소를 지으며 반겨주었다. 안아달라고 난리를 치거나 마구잡이로 사방팔방을 핥아대는 일은 없었지만, 가끔 기분이 좋으면 대자로 드러누워서 배를 긁어달라고 하기는 했다. 겁이 많아서 아무 데나 드러눕지도 못하는 수련이에겐 그것이 아마 최고의 애정표현이었을 것이다. 그만큼 사랑하여 온 마음을 다 줄 대상이 있었기에 수련이는 부족함이 없었다. 수련이는 밥을 참 좋아했지만, 그보다도 가족들을 더 좋아했다. 밥 먹을 때에는 개도 건들리지 말라는 속설과는 달리, 수련이는 먹던 밥이나 뼈다귀를 가족들이 뺐더라도 한번 으르렁거리지조차 않았다. 그 자신의 천국에서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들이 누구인지도, 자신이 사랑해야 할 사람들이 누구인지도 확실하게 알았던 셈이다. 냄새를 맡을 수 없어서 그토록 두려웠으면서도, 수련이는 그것을 사랑으로 극복해낼 줄 알았다.


하지만 그런 수련이에 비해 그는 영 현명하지 못했다. 이십 대 내내 그는 자신의 천국을 만드는 대신 찾아서 방황하기를 거듭했다. 고등학교가 끝나고, 첫 연애가 끝나고, 두 번째 연애와 대학교가 끝나갈 때까지 그는 외로운 방황을 일삼았다. 친구가 없었던 것도 아니고 사랑하는 사람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늘 마음 한 구석에서 극심한 외로움을 느끼며 살아갔다. 마치 밑이 빠져버린 장독처럼 그가 받는 사랑은 잠시 스칠 뿐 곧 허물어지며 사라졌다. 그리고 그 사랑 중에는 수련이가 그에게 건네었던 한결같은 애정도 포함되어 있었다. 수련이는 밤마다 그의 곁에 머물러주었다. 때론 핥짝거리며 조심스럽게 그의 눈물을 핥았고, 때론 따스하게 그의 손 위에 쪼끄만 하고 땅딸막한 발을 올렸다. 물론 가끔은 귀찮아서 그냥 그의 손 위에 배를 포개어버릴 때도 있었다. 그가 어처구니 없어하면 수련이는 '뭐, 어쩌라고.' 하는 표정으로 심드렁하게 그를 무시했다. 그토록 직설적인 위로들이 건네어졌음에도 그는 영 정신을 차리지는 못했다. 


그는 그토록 사랑 받음에도 불구하고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꼈다. 그래서 외로운 거라고, 그래서 고통스럽고, 그래서 우울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생각은 많고 말은 적은 그에겐 세상은 어지러운 곳처럼 느껴졌고, 자기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난제인 것 마냥 혐오스러웠다. 그는 자기혐오 때문에라도 채워질 수 없는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수련이가 건넬 수 있는 애정의 크기와는 아무 상관없는 깊은 심연이었다.


     



어느 겨울날이었다. 고통이 밤손님처럼 찾아드는 깊은 밤이었다. 절망은 이불처럼 두텁게 그의 생각을 짓눌렀고, 그는 어서 이 모든 것이 끝나기만을 바라는 극단적인 상태에 빠져있었다. 잠 마저 두려움에 달아난 것 같은 그 밤에, 고통이 살해당하여 원령이 되어 돌아온 것 같은 그 심야에, 그는 누가 방문을 드륵드륵 두드리는 것을 들었다.

조심스럽게 방문을 빼꼼 열자 온 몸이 시려오는 냉기와 함께 눈이 잔뜩 묻은 털북숭이 강아지들의 얼굴이 그를 반겼다. 다래는 '어휴 오늘은 좀 춥네. 좀 들어가게 해주지 않겠나?' 하는 태도로 성큼성큼 그의 방 안에 들어왔고, 수련이는 들어가면 혼날 것이 두렵다는 듯이 꼬랑지를 배에 닿을 때까지 감추고 먼지털이처럼 땅바닥에 착 달라붙은 채로 뒤따라 기어들어왔다. 그는 두 모녀가 눈을 털고 자연스럽게 방바닥 카펫 위에 자리를 잡는 모습을 구경했다. 다래의 눈빛은 '하던 거 계속해. 방해 안 할 테니. 네가 뭐하는지 관심은 없는데 여기 참 따뜻하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다래는 그의 고통을 다 이해해서 괜찮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은 그 차분한 이해심에 그는 아주 조금 위로받는 기분을 느꼈다.

그에 비해 수련이는 안절부절못하며 그에게 놀아달라고 칭얼거렸다. 그는 어차피 고통스러워 잠이 오지도 않던 침대 위에서 일어나 카펫에 몸을 뉘었고, 수련이는 아주 조심스러운 태도로 그의 배를 밟고 올라섰다. 그리곤 심폐소생술이라도 하듯이 그 위에서 콩콩 뛰었다. 깜짝 놀란 그는 외쳤다.


"하지 마! 뭐 하는 거야?"


하지만 수련이는 평소의 그 겁 많은 태도에도 불구하고 꼭 다시 해봐야 한다는 눈빛으로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는 다시 카펫 위에 누웠고, 수련이는 다시 올라가서 발을 콩콩 구르기 시작했다. 마치 살아야 한다는 듯이, 심장이 뛰어야 한다는 듯이 말이다. 


그는 사실 죽을 생각까지는 없었다. 죽을 것 같이 외롭고 고통스럽기는 했지만, 그리고 왜 살아야 하는지 의미를 찾을 수 없기는 했지만, 당장 죽을 것 같지는 않은 순간이었다. 하지만 수련이의 그 괴상한 행동은 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는 수련이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왜 그래? 살아야 한다는 거야?"


수련이는 고개를 끄덕이지는 않았지만 눈을 한번 깜빡였다. 그는 그것이 대답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한 번 더 물었다.


"왜? 왜 살아야 하는데?"


수련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수련이는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리고 그 바라보는 것 자체가 사랑이라서 그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수련이는 그를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하지만 그 눈동자 속에는 그가 갈구하는 모든 답변들이 다 들어있었다. 그는 스스로에게 대답했다. 삶의 의미는 살아있는 것이니까. 사랑의 의미는 살아가는 것이니까. 그것은 그의 말이자 수련이가 그에게 보여준 것이었다. 


수련이는 말없이 그를 바라보다가 살포시 뛰어올라 침대 위에 안착했다. 지 자리는 여기라고 말하는 것 같은 당돌한 모양새였다. 밖에는 다시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었고, 심연의 아귀 같은 밤하늘이 모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에 그들은 같은 단칸방에서 잠드는 온기 어린 가족이었다. 그는 수련이를 조금 밀치고 ("내 자리야. 옆으로 가.) 침대에 다시 몸을 뉘었다. 수련이는 여우처럼 둥글게 몸을 말기는 했지만 어쨌든 그의 옆에 누워있었다. 마당에서 자라는 강아지의 냄새가 나기는 했지만 아무렴, 고통의 향기보다는 달큰한 것이었다. 그는 수련이 옆에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내보내 달라고 난리가 난 다음날 아침 여덟 시까지 평온하게 잠들 수 있었다.


수련이는 여덟 시에 문을 미친 강아지처럼 두드렸다. 나가야 한다고, 당장 나가야 한다고 다급한 몸짓이었다. 혹시라도 방 안에서 쉬라도 할까 봐 두려웠던 그는 잠이 덜 깬 채로 물어보았다.


"수련아 왜 그래. 화장실 갈 거야?"


수련이는 무슨 개소리를 하냐는 태도로 그를 쳐다보았고, 짧은 발로 문을 가리켜 보였다. 당장 열라는 그 태도에 그는 결국 이불을 걷고 일어나 문을 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의 앞에 수련이가 보여주고 싶었던 낙원이 펼쳐졌다.


오전 늦게 뜨는 겨울의 햇살은 처마 끝에 수줍게 걸려있었다. 밤새 휘몰아친 눈보라는 어느덧 그쳐서 온 세상을 반짝이는 하얀빛으로 덮어놓았었다. 솜담요처럼 푹신해 보이고 별빛처럼 반짝이는 그 계절의 이불은 기와의 굽이굽이마다 몰아치는 햇살의 파도를 타고 노래하듯 새로운 하루를 자아내었다. 그는 고통을 잊고 잠시 탄성을 내질렀다.


수련이는 가뿐한 몸짓으로 방문을 딛고 눈밭으로 뛰어내렸다. 앙증맞은 별 모양의 강아지 발자국이 쿠키 반죽 같은 눈밭 위에 도형처럼 찍혔다. 별이 눈 위에 수놓아지고 있었다. 어지러운 수련이의 춤사위를 따라서 그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그는 그것이 초대장을 그리고 있음을 알았다. 그는 그들만의 작은 낙원에 맨발로 뛰어들었다. 놀랍도록 차가웠지만, 살아있다는 기분이 온몸을 휘감고 있었다.


   



그는 수련이에게서 받은 마음으로 한 칸씩 빼곡하니 마음의 서랍장을 채워갔다. 가시지 않을 것 같았던 우울도, 영원할 것 같은 자괴도 다 한 번에 사라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수련이 역시 어디 가지 않은 채로 항상 그 낙원을 지켰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군대를 전역했을 때에도 수련이는 그 자리에 있었고 (그가 대문 앞에 왔을 때는 조금 짖기는 했다. 그 뒤론 세상 누구보다도 반겨줬지만.) 영원히 흉터가 남을 것 같았던 세 번째 연애가 끝났을 때에도 수련이는 그 자리에 있었다. 비가 오든 눈이 오든, 울고 싶고 화내고 싶었던 모든 순간에 수련이는 그 자리에 있었다. 그 아이만의 가장 사랑스러운 천국에서, 가장 사랑하는 이들을 한없이 바라보면서 말이다.


그는 차츰 이해받는 대신 수련이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 다채로운 표정과 똑같이 졸려 보이는 눈 뒤로 어떤 말들을 하고 있는지 알아가기 시작했다. 그가 우울할 때면 수련이도 우울하다는 것을, 그리고 수련이가 두려워할 때면 그도 두려워하곤 했었다는 것을 알았고, 서로가 바라볼 때면 서로의 눈동자에 상대방이 거울처럼 비친다는 것도 알았다. 수련이만 그를 보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도 수련이를 보고 있었다. 그는 여름의 장대비 속에서 심기가 불편한 수련이를 바라보았고, 연못의 미꾸라지를 낚아채려고 구경하는 호기심 어린 수련이를 보았다. 수련이는 결국 겁을 먹고 미꾸라지를 잡지 못했지만, 다래는 밤만 되면 보양식이라도 되는 마냥 미꾸라지를 잡아먹었다. 수련이가 다래를 '정말 이상한 강아지인 것 같다'라는 표정으로 쳐다보는 광경은 그를 깔깔 웃게 했다. 


연못에 가득 핀 연을 바라보며 그 연처럼 폭발적으로 자라는 장구벌레들과 싸우던 여름도 있었고, 난데없이 창문에 머리를 박고 기절한 제비를 보살펴 하늘로 되돌려 보내 주던 가을도 있었다.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낙원이 온통 수영장이 되어버렸던 여름에는 그도 수련이도 난리를 쳐야만 했다. 수련이는 물을 싫어했고, 그는 그런 수련이를 위해서 물을 걷어낼 용의가 있었다. 그런가 하면 겨울밤에는 그가 도움을 받았다. 그는 기나긴 겨울밤들에 늦게까지 혼자 있는 것을 힘들어했고, 수련이는 그런 그를 위해서 방에 들어와 잠드는 것쯤은 해줄 수 있었다. 그가 수련이를 보살핀 것도 아니었고 수련이가 그를 보살핀 것 역시 아니었다. 둘은 함께 그 낙원에서 살았을 뿐이었고, 그는 조금 늦게, 조금 더 많은 고통과 사투 끝에야 그 낙원에 초대받았던 것이었다. 그는 너무 늦지 않게 그 작은 낙원에 닿을 수 있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참 충분한 일이었다.


다래가 그 차분한 눈길로 낙원을 마지막으로 바라보았을 때에도 수련이는 그곳에 있었고, 그 마지막 숨결로 가장 아름다운 하늘로 여행을 떠날 때에도 수련이는 그 자리에 있었다. 수련이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한결같았지만, 그는 이제 수련이의 한결같은 표정에서도 마음을 읽어낼 수 있었다. 그는 수련이의 곁에 말없이 앉았고 수련이는 조용히 그의 손을 핥았다. 그는 수련이의 작은 몸과 마음을 끌어안았다.

그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집에 데려와 앞으로 영원히 함께 할 사람이니까 '언니'라고 부르라고 했을 때에도 수련이는 그 자리에 있었다. 수련이는 차분하게 그와 함께할 그녀를 반겨주었다. 너무 좋아하지도, 너무 질투하지도 않은 채, 가족을 보듯 차분히 바라보아 주는 수련이를 보면서 그는 이젠 여동생 같다고 하는 말도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수련이는 가장 사랑스러운 여동생과 가장 사랑해주시는 할머니의 모습 모두로 그를 사랑해주었다. 그는 마음 편히 수련이를 동반자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가장 괴로웠던 순간과 가장 격정적이었던 아픔 속에서 둘은 함께 자랄 수 있었고, 이제 그 격동의 시기의 끝에서 모두 무사한 채로 미소 지을 수 있었다. 그는 그 무사함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그에게 자신의 작은 낙원을 나누어준 새하얀 강아지 덕분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것만으로도 참 충분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마지막 마음의 준비를 잘할 수 있었다. 그들만의 그 작은 천국에서, 그들이 함께 했던 이야기들을 하고 또 하며, 그는 너무 늦지 않게 작별인사를 충분히 할 수 있었다. 수련이가 햇살을 받으며 꾸벅꾸벅 조는 날들이 많아질수록, 아침에 늦게 일어나고 반가워하면서도 꼬리를 너무 세게 흔들지는 못하게 될수록, 그는 이야기를 더 많이 했다. 우리의 낙원에서 있었던 일들을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수련이에게 들려주었다. 그때 기억나? 이 앞에는 장작이 이만큼 쌓여있었어. 너는 그 앞에서 낮잠을 자는 걸 좋아했었지. 그럴 때도 있었어. 너 여기 툇마루 밑에 기어들어갔었잖아. 점심 먹을 때 까지도 안 나와서 온 집을 다 뒤지게 만들었었지. 저 까만 고양이 놈이 물 마시겠다고 기어 내려왔던 것도 기억나지? 네가 엄마 밥 뺏어 먹겠다고 으르렁거려서 내가 혼냈던 것도 기억나고? 다 그랬지? 우린 여기 있었어. 수련이는 그의 말을 들으며 조용히 눈을 깜빡거렸다. 마치 그랬다는 듯이, 다 그랬었다는 듯이, 그래서 참 충분한 일이라는 듯이 말이다. 


수련이는 마지막까지 그를 기다려주었다. 대문을 연 그 순간, 그는 오늘이 그날임을 알 수 있었다. 천둥번개 속에서 기적처럼 찾아왔듯이, 구름송이처럼 화사하게 떠나가는 날이었다.

수련이는 문 앞에서 그를 반기지 않았다. 대신 늘 앉아있던 툇마루 그 자리 앞에서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는 옆에 조용히 앉았고 수련이는 그를 바라봐주면서 힘겹게 꼬리를 흔들었다. 그는 괜찮다고, 다 괜찮다고 말했다. 그렇게 인사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 안 해도 다 안다고 말이다. 수련이는 그렇다면 다행이라며 꼬리 흔들기를 멈추었고, 그에게 천천히 기대어와서 눈을 감았다. 그리곤 조금만 더 늦었으면 못 봤을 거라는 핀잔과 함께, 함께 있어서 너무 좋았다는 미소와 함께, 이곳이 가장 찬란한 자신의 천국이었다는 말로서, 햇살이 되어 여행을 떠났다. 


그는 울었다. 울어서 강물을 흘렸고, 범람하는 파도를 쳤지만 슬퍼하지는 않았다. 그는 아직 낙원에 머물러있었다. 그리고 수련이 역시 낙원에 있을 것을 알았다. 아마 세상의 작은 낙원들은 하나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어디선가 햇살을 쬐며 졸린 눈을 빛내는 강아지가 다시 한번 그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다. 하늘의 구름 너머와 강의 물결 사이에 그들이 다시 만날 낙원이 있을 것을 그는 알았다. 그래서 그는 울긴 했지만 슬퍼하지는 않으며 한없이 사랑하고 사랑받았던, 한없이 자신의 것이었던 친구, 가족, 동반자, 스승, 강아지에게 작별인사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것만으로도 참  충분한 일이었다.











그는 이야기를 마치고 잠시 숨을 가다듬었다. 나는 그를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무언가가 떠났다는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하고도 어려운 일이다. 더듬을 수 없는 빈 공간을 더듬을 때 우리는 가장 고통스러워하고 아파한다. 실재하지 않음 그 자체에 아파하는 것은 화살이 박혔다거나 칼로 베인 것과는 차원이 다른 아픔이며, 그만큼 천천히 아문다. 베인 것은 봉합하고 찔린 것은 소독하면 된다지만 이젠 없는 것을 어찌 채울까. 그의 마음에는 그만한 크기의 구멍이 남아있었다.


나 역시 한동안 그 구멍을 어떻게 메워야하는지에 대해서만 고민했다. 다른 사랑을 하면 메워질까. 더 많이 사랑하면 메워질까. 시간이 지나면 메워지거나 내가 건강하고 좋은 생각을 하면 메워지지는 않을까. 다 아니었다. 상실의 구멍은 메워지거나 채워지는 것이 아니었다. 잊혀지기야 할테고 웃으며 행복할 때도 있겠지만 그 구멍에 시린 가을 바람이 들어차면 어김없이 다시 아리고 에였다.      


하지만 사람은 그 구멍을 통해서 숨을 쉰다. 들이마시고, 내쉰다. 고통은 그 사이로 흘러들어와 사람을 메우고, 채우며 다시 흘러나간다. 고통이 흘러가는 그 통로가 사람을 빚고 있었다.      

어느덧 나는 구멍을 메우려는 대신 구멍을 바라보는 나를 알게 되었다. 아주 어렸을 때에는 양말에 구멍 하나만 나있어도 세상이 알까 부끄러운 일이었지만, 이제는 단추 하나 떨어진 옷을 입거나 피곤해서 입술에 구멍이 나있어도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닳아헤진 소매를 바라보듯 나는 내 안의 구멍을 보았고, 그것도 괜찮아보인다고 생각했다. 사랑했던 모든 것들이 그 크기만큼의 구멍을 남긴다면 우리는 사랑한 만큼의 텅 빈 공간이지 않을까. 그건 꽤 슬픈일이 아닌, 꽤 멋진일이었다.


나는 그를 보며 말했다.


"내게도, 아니, 내 친구에게도 비슷한 일이 있었어. 참 사랑했던 무언가를 떠나보낸 가슴 아픈 경험이었지."


그는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이제 수천번은 보았을 그 말없는 시선을 이제는 알 수 있었다. 그가 함께 살아가고 사랑했던 존재들이 가르쳐준 물끄럼한 시선. 그의 표정이 누구를 닮은 건지 이제 알 수 있을 것만 같아서 나는 잠시 미소를 지었다.


"아이들은 모두 이곳에서의 낙원을 떠나 더 큰 낙원으로 갈거야. 세상에 하나의 천국만 존재하는 것은 아닐테니까. 우리가 함께 살았던 작은 천국이 있다면 또 그보다 더 큰 천국도 있을 수 있겠지."

"그것도 너 친구가 말해준거야?"

"응. 내 친구가 그랬어. 그 사랑스럽고 거대한 천국을 본 적이 있다고. 그 고통과 행복의 정원과 그 안을 노니는 강아지들을 마주친 적이 있다고 얘기해줬어."


그는 깍지를 낀 채로 의자에 기대어 앉았다. 이야기를 기다리는 자세였다. 그리고 나는 이야기를 들려줄 준비가 되어있었다.







세 번째 이야기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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