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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지영 Sep 11. 2023

이 구역에 미친년은 나야

호르몬은 거들 뿐. 내 안에 답이 있다.


첫 경험은 항상 강렬하다. 좋은 의미로 강렬했다기보다 긴장과 실수의 연발인 경우가 많았다.

첫 시험관도 역시 좌충우돌이었다. 주사 놓는 법도 숙지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고 무엇보다 가장 힘들었던 건 시험관 시술 중 감정 변화였다.  

   

‘시험관 아기 시술 카페’에서 종종 이런 글을 봤었다. ‘내가 아닌 것 같아요’, ‘감정이 미친년 널뛰기 같아요.’ 나는 이런 글이 다소 과장되고 격한 표현일 뿐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 건 과장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순화된 표현이었다.    

  

배아를 이식하고 나서 그 예민한 감정은 극에 달했다. 길을 걸을 때 멀찍이 떨어진 사람들이 가까워 지면 놀라기도 하고 별다른 이유 없이 화가 나기도 했다. 대부분 분노의 대상은 남편이 됐지만 전혀 모르는 사람이 대상이 되기도 했다.      


식당에 갔을 때였다. 식사 시간보다 조금 이른 시간에 도착해 문을 열고 들어가니 식당 직원이 아직 준비 중이니 대기 명단에 이름을 적고 기다리라고 했다. 순식간에 얼굴이 뻘겋게 달아오르며 짜증이 올라왔다.    

 

밖으로 나오니 대기 명단에 우리 보다 늦게 온 사람들은 이름을 적고 있었다. 나는 남편에게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대기해야 해?” 그러자 막 이름을 쓰려던 손님은 움찔 놀라며 우리에게 순번을 양보하는 것이 아닌가. 내 목소리가 그렇게 컸을 줄 몰랐다. 나는 순간 부끄럽고 미안해졌다. 내성적인 내가 사람들 앞에서 날카로운 목소리로 소리 높인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내게 이런 면이 있었나?’     


그 뒤로 비슷한 일들이 이어졌다. 괜히 길에서 지나가는 사람에게도 작은 이유로 화가 치밀어올라 욕이 나오기도 했고 주변 사람들과 말할 때도 나도 모르게 짜증이 묻어났다. 특히 남편은 툭하면 헐크같이 변하는 나 때문에 마음고생했다.  

   

“부인 원래 그런 거래. 병원 왔다 갔다 하는 것만 해도 스트레스가 큰 거래.” 남편은 날 위로했다. 힘들어하는 남편에게 미안해졌다. ‘스트레스’와 ‘호르몬’이 주된 원인이겠으나 계속 이렇게 지낼 순 없었다. 무엇보다 임신은 편안한 마음에서 더 잘 된다고 하지 않은가.     


첫 시술이 끝나고 두 번째 시술을 시작할 때, 나는 ‘호르몬의 노예’로 지내지 않겠단 결심을 하고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그런데 ‘감정 변화’는 의지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헐크로 변하진 않았으나 갑자기 슬픔이 차올라 눈물을 줄줄 흘리고 다녔으니, [가쉽걸]에 나오는 유명한 대사, “이 구역에 미친년은 나 야.”가 딱 날 두고 하는 말이었다.      


그 뒤로 한 차례 시험관을 하면서 감정 기복의 강도는 줄긴 했으나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고 나는 백기를 들었다. ‘그래, 나는 호르몬의 노예다!’


받아들이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그리고 ‘시험관 시술 카페’에서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들의 글을 읽고 지인 중에 시험관 시술을 경험자들에게 물어봤다. 놀랍게도 나처럼 감정 변화를 겪는 사람은 꽤 많았고 그 증상은 다양했다. 분노, 슬픔, 불안 등 각양각색의 감정 경험이 이어졌고 이런 증상이 없는 사람들은 성욕이나 식욕이 강해졌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증상은 사람마다 천차만별이었다.



융 심리학에선 우리 무의식에는 다양한 면이 있는데 우리가 주로 꺼내 쓰는 기제가 밖으로 드러나는 것뿐이라 말한다. 나는 내향적인 사람이지만 무의식에는 외향적인 면이 있고 상황에 따라 필요할 때 언제든지 꺼내 쓸 수 있단 말이다. 고로 평소에는 조용한 사람이지만 내 안에는 분노에 찬 헐크 같은 면이 있는가 하면, 우울한 나도 존재하고 있단 의미다.     


나는 나의 무의식이란 상자 안에 꽁꽁 감춰놓았던 ‘분노’와 ‘우울’의 존재를 인정하기로 했다. 모든 걸 호르몬 탓으로만 돌리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 ‘호르몬의 노예’로부터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존재를 인정하고 나니 감정 기복이 절반으로 줄었다. 나는 쾌재를 불렀다. 시험관 시술할 때 마음이 한결 평온해졌기 때문이다. 나는 내친김에 내 안에 ‘헐크’와 ‘울보’를 불러 직접 대화해 보기로 했다.      

‘그래, 너희들이 원하는 게 뭐니?’     

헐크씨와 울보씨, 그리고 나의 삼자대면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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