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아이 없이 사는 부부가 워낙 많기에 특별히 주목받을 일은 아니지만 내가 결혼했을 때만 해도 결혼하면 아이를 갖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아이는 있어요? 왜 없어요? 그래도 하나는 있어야지.”
처음 보는 사이에서도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경험상 이런 질문은 점점 매운맛 조언으로 변한다.
“아기 일부로 갖지 않는 건가요? 아니면 안 생겨요?”
여기서 멈추면 그래도 눈치 있는 사람이다. 간혹 눈치 없는 사람은 더욱 매운맛 충고를 투척한다. “신혼 때야 좋지. 애 없으면 서로 할 말도 없어지고. 이혼하기 쉬워. 그러니까 하나 낳아.” (‘라떼’는 모르는 사이에도 진짜 이런 충고 했었다)
모르는 사람들만 매운맛 충고를 던지는 건 아니다. 친한 사람들은 나를 아끼는 마음에 자신들이 알고 있는 각종 비법을 전수해 주곤 한다.
“아이고 그 병원 왜 갔어. **병원으로 옮겨. 내 친척 거기서 임신했잖아.” (시험관 시술 카페에 병원 정보는 차고 넘친다. 다 알아보고 선택하는 거다.)
“내가 아는 보살님이 있는데 거기 가서 시키는 대로 해봐. 나 아는 사람 임신했잖아.”
(그 아는 사람은 시험관을 9번째 시험관으로 임신했었다.)
“내가 아는 한의원 있는데 거기 가면 다 임신한대”
(이상하게도 임신 100% 한의원이 전국에 널렀더라.)
“전국을 다니면서 기도해봐. 기적이 생기더라”
(세상은 기도로만 이뤄지지 않는다.)
“여기서 굿 해봐. 내 지인 임신했잖아.”
“**먹어봐. 임신 바로 해.”
(간절한 마음을 이용하는 사기꾼 조심하자.)
그래, 모두 다 날 생각해서 하는 말인 거 안다. 그런데 이런 조언을 여러 명에게 듣는다면 조언이 아니라 소음같이 느껴질 뿐이다. 가뜩이나 정보가 넘쳐나 골치 아픈 시대인데 이런 충고와 조언은 선택을 어렵게 만들 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반면에 고마웠던 사람들은 말없이 밥 사주던 사람들이었다. “고생했네” 한 마디면 눈물이 핑 돌 만큼 고마웠다. 도움이 되었던 조언은 자신이 경험한 선에서 이야기해 주고 결정하는 발언을 삼가는 것이었다.
나는 시험관 시술하면서 위로와 배려가 어떤 건지 배울 수 있었다. 조언은 ‘심플’하면 된다. 그 사람이 필요하다고 요청할 때, 경험을 나눠 주면 된다. ‘위로’도 화려할 필요 없었다. 고요히 함께 있으면 되는 거다.
나도 알면서 얼마 전에 친한 동생에게 빨리 임신하라고 충고하고 말았다. 한창 떠들다 집에 돌아오며 어찌나 찜찜하던지. 내 꿈은 입은 무겁고 지갑은 잘 여는, 멋진 사람이 되는 건데 말이다.
역시 멋진 사람이 되는 길은 멀고도 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