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 해산물 거리’
과거 목포 시내 경제를 주름잡았던 ‘해산물 거리’
개항 100년 역사 속에 자연스럽게 형성된 해산물 집산지이다. 이곳은 목포 최초의 근대적 시가지였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먼저, 목포의 기원을 들여다보자. 목포 역사 유적지인 ‘목포 만호진’은 500년 전 조선시대 민간인들이 왕래하며 부락이 형성되며 목포를 이루었던 곳이다. 만호진(목포 진지, 木浦鎮址)은 1439년(세종)에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서 설치되었다. 1)
이 무렵 목포 만호진 주변으로 사람의 왕래가 잦아지면서 자연스럽게 마을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기록에 따르면, 1872년에 작성된 무안현·목포진 지도에는 6개 마을이 표시되어 있는데, 형성된 마을은 150호 정도 추정되며 대략 600~700명 정도 인구가 모여서 살았을 것이라 추측하고 있다. 이곳은 목포 역사의 뿌리라는 소중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2)
목포·여도에 병선을 설치하고 만호를 임명하다 3)
議政府據兵曹呈啓: "務安縣 木浦、寶城郡 呂島等, 皆倭賊入寇要害之地, 與兵船泊立之處遙隔。 請於木浦、呂島置兵船, 差遣萬戶。" 從之。
"무안현(務安縣) 목포(木浦)와 보성군(寶城郡) 여도(呂島) 등은 모두 왜적이 드나드는 요해지(要害地)이 온데, 병선(兵船)을 정박하여 세운 곳과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사오니, 청하옵건대, 목포와 요도에 따로 병선을 설치하고 만호(萬戶)를 임명하여 보내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일제 식민지 시절, 목포 만호진을 기점으로 목포 최초 근대 시가지인 외국인 거류지가 형성이 되었다. 이 중 해산물 거리도 포함되어 있다. 목포의 해산물 거리는 일본인들이 주로 거주했던 곳이었다. 해방 이전에는 조선인이 거주하지 않았고 해방 후, 해산물 거리가 형성이 되었다.
일제가 패망하자 일본인들이 살았던 거주지에 한국인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하였다. 이곳에서 목포 사람들은 상업을 발전시켰다. 현재 일제 강점기 때 지어진 건물을 그대로 쓰는 사람도 있다. 겉모습은 예전과 다르지만 내부 구조는 그대로여서 옛 유곽을 더듬어 볼 수 있다.
그 시절은 섬과 육지를 잇는 대교가 없었고 뱃길로 내륙까지 배를 타고 이동하던 시절이다. 목포는 전라도와 남·서해안과 섬 지역의 교통 중심지였다. 호남선의 종착역이 있었고 국도 1호선이 출발하는 곳이었다. 신안, 진도, 제주도 등 목포 인근 해역 사람들은 모두 목포항을 거쳐 광주나 다른 곳으로 이동을 하였다.
목포항 주변으로 해산물과 건어물을 위탁 매매하는 객주들이 점포를 열기 시작하였다. 1970년대 해산물 거리는 객주를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객주는 중간상인으로 생산자와 구매자 사이의 매매를 주선해 주고 수수료를 받았다. 이들은 미역, 멸치, 다시마, 김 등 다양한 해산물을 목포항으로 들여와 판매하였다. 해산물 유통이 본격화되기 시작하여 순천, 여수, 완도, 무안, 영암, 해남, 진도 등 전남 일대 장날에 판매되는 해산물과 건어물 대부분이 목포 해산물 거리에서 공급되었다.
목포항과 해산물 거리는 과거 일제 식민지 수탈 창구에서 내수 상업이 발달한 항구 도시로 변모하였다. 오늘날 목포는 근대도시의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곳이라 생각된다.
1) 국가유산포털
2) 목포문화원·전라남도문화원연합회(2018). 목포는 항구다 스토리텔링북
3) 조선왕조실록 디지털아카이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