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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구심점

by My Way

연구실이 큰 파도에 산산이 부서졌다.

이제 막 박사학위를 따고 기지개를 켜 보려던 나도 멘붕이었지만, 지도교수님만 믿고 석사, 박사과정을 밟으러 연구실에 들어왔던 후배들은 낙동강 오리알이 되었다.


지도교수님의 갑작스러운 죽음 후, 연구실이 붕괴 직전이 되었다.

학과에서는 어떻게든 학생들을 구제하기 위해 애썼지만, 멘탈이 약한 몇몇 학생들은 교수님 작고 후 몇 년간 정신적, 심리적 어려움을 겪었다.


교수님의 갑작스러운 사고(업무 중 사고), 사흘간의 혼수상태, 그리고 장례...

그 모든 것을 치른 후, 우리에게 남은 건, 당장 교수님과 함께 쓰던 연구실을 비워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 지역뿐만 아니라 중앙까지 발을 뻗어, 이 분야에서 꽤 유명했던 교수님의 마지막이 참 허망했다. 이사가 아닌 철거가 되어 버린 연구실 청소날, 재학생과 졸업생 모두 연구실에 모여 교수님 유품들을 정리하고 정들었던 연구실을 떠나보냈다. 공간이라는 실체는 남아 있는데도, 더 이상 그곳이 우리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너무 가슴 아팠다.


연구실 철거 이후, 곧 우리 교수님 대타로 신임 교수를 뽑는다는 소문이 돌았다.

우리는 신임 교수가 연구실 선배들 중에 나오길 기대했다. 실제로 교수님이 하시던 분야를 뽑는다는 공고가 나왔고, 그 분야만큼은 우리 연구실 선배들이 최선의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만약 선배들 중에 신임 교수가 나온다면, 낙동강 오리알이 되어 버린 후배들과 갈 곳을 잃은 연구실 졸업생들에게 새로운 보금자리가 마련될 거라는 기대감이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잔인했다.

결국 우리는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재학 중이던 후배들 중 대다수는 학과에 남아 다른 교수님의 지도를 받는 길을 택했다. 돌아가신 교수님의 분야를 끝까지 고집했던 후배 한 명은 아예 해외 유학을 갔다. 그리고 끝내 교수님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마음 여린 후배 한 명은 몇 년간 계속 방황을 했다.


그런데, 다른 학과 교수님께 지도를 받는 길을 택했던 후배들조차도 소속감과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는 듯했다. 원래 소속되어 있던 우리 연구실의 영향력이 꽤 컸던 곳이라 그런지, 학위를 받고 졸업을 해서도 원 연구실의 꼬리표를 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지도교수님의 작고 후, 모두가 제 살길을 찾아 분주할 때, 그녀만이 중심을 잡고 우리 모두에게 손을 내밀어 주었다. 우리는 어느새 그녀를 중심으로 모였고, 교수님 기일을 기점으로 다시 뭉쳤다. 그 덕에 연구실 소속감만은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그녀가 해외 유학을 간 후배까지도 챙기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돌아가신 지도교수님을 대신해, 추천서를 다른 교수님께 부탁해 받아주고, 그쪽 교수님과의 인터뷰도 진행해 그 후배가 그곳에서 잘 정착할 수 있도록 여러 면에서 도움을 주었다고 했다. 방황하는 후배에게는 일자리를 추천해 주기도 하면서 지도교수님의 빈자리를 채워주었다.


우리 연구실에서 그녀의 위치는 박사 졸업생들 중 중간쯤에 위치했지만, 그녀만이 지도교수님의 부재에 대해 후배들에게 부채감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교수님이 돌아가신 것으로 인해서 정착하지 못하고 떠도는 후배들이 없도록 내내 신경을 썼다.

나는 꼭 그런 이유만이 아니라 아이의 육아로 인해 경력을 포기한 것임에도 그녀의 눈엔 내가 아픈 손가락이었던 것 같다.

이전까지는 여자 후배들과의 단체 모임에 참석하고 어울리는 정도였는데, 교수님 작고 이후에는 그녀와 1:1로 만나 차를 마시고 밥을 먹는 일들이 늘어갔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육아와 병행해서 할 수 있는 소소한 일거리들을 가지고 오셨다.


덕분에, 나는 다른 이들보다 그녀와 친해졌던 것 같고, 다른 사람들은 알지 못했던 그녀의 진짜 모습들을 종종 볼 수 있었다.


"나는 우리 연구실 사람들 모두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교수님께서 돌아가신 건 언니 탓이 아니에요. 교수님을 대신해 이렇게까지 애쓰실 필요 없어요."

"교수님께서 살아계셨다면, 우리 연구실 식구들 능력을 100% 발휘할 수 있었을 텐데... 내 꿈은... 나중에 우리 연구실 사람들로 구성된 연구소를 하나 차리는 거야. 내가 연구소 차리면 O 박사도 함께 할 거지?"


실제로 그녀는 자신의 말을 실현시키기 위해 노력을 했다.

연구실 식구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며, 한 사람 한 사람을 살뜰히 챙겼고, 본인에게 넘쳐나는 일들을 연구실 식구들에게 나눠가며 함께 성장해 나갈 발판을 다졌다.

곁에서 지켜본 내가 장담컨대, 나와 함께 시작한 그 "센터"가 그녀 입장에서는 연구소 꿈을 실현시키기 위한 첫 단추였다.




그런데, 그녀는 왜 그 모든 것을 놓아버렸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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