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등 편
자칭 과학 영재(?) 사건(2편 14화 참조) 이후, 특별한 이벤트 없이 아이는 과학을 잘하는 평범한 학생으로 초등학교 과정을 마쳤습니다. 저 또한 낮에는 제 일을 하고, 아이가 하교할 무렵에는 집에 돌아와, 엄마의 부재 없이 평안한 마음으로 아이가 학교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초등 저학년 때 잡아놓은 습관 덕분에, 아이의 일상과 학교생활은 규칙적이면서도 자유로웠습니다.
그런 평범한 일상에 익숙해질 무렵, 학교에서 '중학교 배정 안내문'이 나왔습니다. 그제야 저는 정신이 번뜩 들었습니다.
'아이가 중학교에 가야 하는데, 우리 동네에 어떤 중학교가 있는지 모르는 엄마라니...'
사실, 중학교는 의무 교육이라 집 가까운 학교에 보내면 되는 것 아닌가 하는, 남들이 보면 다소 안일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도 맞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학교에서 친구들과 중학교 선택에 대해 서로의 생각과 고민을 나누고 있었던 모양이었습니다.
"친구들은 A, B, C 중학교를 가고 싶어 하는데, A와 B는 걸어서 갈 수 있고, C는 버스를 타야 한대요. 그런데, 남자애들 중에는 C를 선호하는 아이가 더 많아요."
"너는, 어딜 가고 싶어?"
"저는 A 중학교요. C는 공부도 엄청 많이 시키고 남중이라 두발 제한이 있다고 해서 싫고, B는 그냥 싫어요."
"그래? 그럼 A를 1 지망으로 쓰자."
아이는 A 중학교를 콕 집어 가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제야 저는 아이가 말한 A, B, C 중학교를 찾아보기 시작했습니다. 조사해 보니, A와 B는 사실 큰 차이가 없었습니다. 집에서의 거리도 비슷했고, 남녀 공학인 데다 홈페이지상에서 볼 수 있는 커리큘럼이나 학교 환경도 비슷해 보였습니다. 굳이 차이를 꼽자면, A는 아이가 입학 당시 100주년을 맞는 학교였고, B는 30년 남짓된 학교라는 정도였습니다. 아이의 선택에 학교의 역사가 중요한 건 아닐 텐데, B가 왜 그냥 싫은 건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반면, C는 남중인 데다가 C 고등학교와 같은 재단의 사립 중학교였습니다. 두발 자유화가 보편화된 시절이었음에도, C는 '빡빡머리'를 고수했고, 규율이 엄격하기로 유명했습니다. 그 덕분인지 명문고 진학률이 높은 학교이긴 했습니다.
하지만 자유분방한 학교 생활을 해온 제 아이에게는 아무래도 부담스러운 학교인 것 같았습니다. 게다가 부쩍 거울 앞에 서 있는 시간이 길어진 걸 보면, 사춘기에 접어들며 외모에 신경을 쓰기 시작한 듯했습니다. 제 생각에, 아이가 C 중학교를 꺼렸던 이유 중에는 '빡빡머리'가 가장 큰 걸림돌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엄마의 정보수집이 다소 늦긴 했지만, 어찌 되었든 아이가 가고 싶은 중학교가 있으니, 1 지망과 2 지망에 A와 B 중학교를 적으면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는 1 지망과 2 지망 모두 A 중학교를 적어냈습니다. 사실 그 순간, '그러다, A 중학교에 떨어지면?' 하고 걱정을 했어야 정상인데, 그 당시 무슨 생각이었는지 저는 아이가 써온 배정 희망서에 아무렇지 않게 사인을 해주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다행히도 아이가 원하는 A 중학교에 배정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아무리 중학교는 대부분 지망하는 대로 배정된다고 하지만, 대안 없이 A 중학교만 적은 아이의 선택은 분명 무모했습니다. 게다가 그 사실을 알면서도 만류하지 않았던 저 또한 참 대책 없는 엄마였던 것 같습니다.
아마, 'A가 안되면 집 가까운 B 중학교에 배정되겠지'라는 근거 없는 믿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무식이 용감하다고, 당시에는 전혀 잘못을 인지하지 못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아찔하긴 합니다.
아이의 선택대로, 아이는 A 중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입학식은 학생들만 참석하는 형태라, 아침에 등교하는 아이를 집 앞에서 배웅하는 것으로 아이의 중학교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학교는 남녀 공학이었고, 두발은 자유로웠으며, 교복을 입었습니다. 짙은 남색 교복을 입은 아이의 모습은, 마치 초등학생이 중학생 형의 교복을 빌려 입은 듯 영 어색해 보였습니다.
학기 초라 그런지, 그 외에는 초등학교와 크게 달라진 점이 없었습니다. 아이는 천천히 학교 생활에 적응해 나갔고, 저도 쏟아지는 가정통신문을 통해 '중학생 엄마'라는 실감을 조금씩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대로 둬도 되나?'
그러다 A 중학교에도 방과 후 프로그램이 꽤 다양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특히 국어, 영어, 수학, 과학 등 학습을 보충해 주는 프로그램이 많았습니다. 아이의 중학교 학습을 고민하고 있던 저는, 당연히 학원 대신 학교 방과 후 프로그램을 선택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여전히 초등학생 마인드에서 벗어나지 못해, '축구' 프로그램을 하고 싶어 했고, 과학 수업이 아닌 '과학 실험반'에 들어가고 싶어 했습니다. 제 생각과 다른 아이의 희망사항에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저는 아이의 소원대로 축구 프로그램과 과학 실험 수업을 신청해 주었습니다. '뭐, 이제 겨우 중학교 1학년인데...'라는 생각으로 말이죠.
축구 방과 후 프로그램이 개강하는 날, 아이는 매우 신이 나서 학교에 갔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입던 축구복과 축구양말, 축구화까지 야무지게 챙겨서 말이죠. 등교하는 아이의 모습을 보니, 학교를 가는 건지 축구 동호회에 가는 건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그날, 아이는 매우 실망한 얼굴로 돌아왔습니다.
"축구 수업이 없어졌어요."
"왜?"
"축구 수업을 듣겠다는 아이가 3명밖에 없어서 폐강된대요."
그날 저는, 제 아이를 포함한 세 명 외에는, 더 이상 예체능에 시간을 쏟지 않는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습니다. 이제 겨우 3월 초였음에도, 대부분의 학생들은 고등학교 입시, 더 나아가 대학 입시까지 고려하며 고등학교 선택을 위한 준비를 착착 진행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렇다 보니, 학교 방과 후 프로그램 중 가장 인기가 있는 수업은 단연 수학이었고, 국어와 영어가 그 뒤를 이었습니다. 학교 수업을 보충해 주는 프로그램들이 인기를 끄는 가운데, 제 아이는 비인기 과목인 축구와 과학 실험 수업만 신청해 둔 상태였습니다.
아이는 실망했고, 저는 당황했습니다. 뭘 몰라도 너무 모르는 엄마였던 것이죠.
'정신 차려! 이제 OO 이는 중학생이고, 난 중학생 엄마야!'
그날 이후, 저는 아이보다 먼저 중학생 엄마로서 마음가짐을 새롭게 다잡았습니다.
반면, 아이는 여전히 몸은 중학생이지만 마음은 초등학생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축구 방과 후 수업 폐강으로 실망했던 아이는, 다행히 마음 맞는 친구들을 찾아 점심시간마다 축구를 할 수 있게 되었다며, 다시 축구화를 챙겨 신나게 등교를 했습니다.
하지만 아이가 초등학생 사고방식에서 벗어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곧, 아이의 중학교 생활에 큰 변화를 가져올 도전의 순간이 찾아왔습니다.
* 저도 엄마인지라, 지극히 주관적으로 아이를 바라보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교육 정글 속 생존자의 기록 1, 2'에 이어 고슴도치 시선으로 본 제 아이의 특징을 한 줄 코멘트로 달아볼까 합니다. 너무 정색하지 마시고, 재미 삼아 읽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서른두 번째 고슴도치 시선] 초등학교 6학년 말, 아이는 검은띠를 따더니 태권도 도장을 그만 다니겠다고 했습니다. 자신이 생각한 목표를 달성한 모양이었습니다. 하지만 운동을 좀 더 하길 원했던 저는 다른 운동을 권했습니다. 학교 방과 후 수업으로 축구를 계속할 수 있었다면 그걸로 충분했겠지만, 축구수업이 폐강되면서 다른 운동을 찾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아이와 함께 집 근처의 합기도와 검도를 구경하러 갔고, 결국 합기도를 선택했습니다. 첫 수업 후 재미있었는지, 아이는 주 5회 수업을 원했지만, 중학교 생활이 과학고 준비 과정으로 바뀌면서 점점 시간을 내기 어려워졌습니다. 결국 주 3회, 주 1회로 줄다가 최종적으로는 다니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건강상의 이유도 있었습니다(차후 설명).
비록 상황상 끝까지 다니진 못했지만, 아이는 어릴 때부터 운동과 공부를 꾸준히 병행했습니다. 매일 반복되는 훈련과 학습 속에서 스스로 규칙을 지키고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모습을 보이며,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라는 격언처럼 꾸준함과 성실함을 몸소 보여주는 아이였습니다.
[다음 이야기] 과학고 결심의 씨앗
이 이야기의 첫 단추 영유아편과 본격적인 교육 이야기를 담은 초등 편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