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등 편
"엄마, 학교에서 영재학급을 운영 중인데, 거기에 들어가고 싶어요. 여기 사인 좀 해주세요."
학기 초, 학교에서 보내오는 가정통신문이 넘쳐났습니다. 뭐가 이렇게나 많은지, 하교 후 아이가 들고 온 L자 파일 속 문서들을 하나씩 확인하는 데만도 시간이 꽤 걸렸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아이가 그 많은 프린트물 사이에서 하나를 꺼내 제게 먼저 내미는 것이었습니다.
자세히 읽어보니, 교육청 소속이지만 각 학교 단위로 학생을 선발하고 소속 학교에서 교육을 받는 '영재학급*' 학생을 모집한다는 안내였습니다.
* 전국의 많은 학교 또는 교육청 단위에서 영재학급을 운영하고 있지만, 모든 학교에 있는 제도는 아닙니다.
"영재학급?"
"네. 1학년 중에 20명만 선발하는데, 시험을 봐서 뽑는데요."
저는 아이가 원하는 대로 영재학급 신청서와 부모 동의서에 사인을 해주었습니다. 하지만, 속으로는 과거 자칭 과학 영재(?)라고 했던 아이의 말이 떠올라 웃음이 났습니다.
'이미 영재라더니... 영재 수업은 영재가 되고 싶은 애들이 듣는 수업이라더니...'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 당시에도 각 학교별 영재학급 대상자 선발 과정 역시 3단계로 이루어졌습니다.
1단계 : 응시 지원서 및 자기소개서 제출
2단계 : 창의적 문제 해결력 검사
3단계 : 창의인성면접
차이점이라면, 지금은 2단계를 전국적으로 동시에 시행하는 창의적 문제 해결력 검사로 선발하지만, 그때는 지역별로 치러지는 학교 시험으로 대체했었다는 정도였습니다. 아이는 친구들과 함께 영재학급 시험에 도전했고, 며칠 뒤 '영재학급 대상자'로 선발되었다는 결과를 받아 들고 기분 좋게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저는 아이가 영재학급에 들어갔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분이 좋았고, 아이가 대견했습니다. 그런데, 아이 아빠는 곧바로 경쟁률부터 묻는 것이었습니다.
"몇 명 지원했는데?"
"22명이요."
"그럼, 2명 떨어진 거네? 에이, 별거 아니네."
아이 아빠는 겨우 2명 떨어진 시험이 무슨 의미가 있냐며 아이의 기를 팍(?) 죽였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이미 아빠의 반응을 예상했는지 크게 개의치 않아 보였습니다. 대신, 제가 기분이 상했습니다. '이왕이면 같이 기뻐해주면 안 되나?' 싶었던 거죠.
그런데, 사실은 이 또한 아이 아빠의 큰 그림 중 하나였습니다.
초등시절부터 '자칭 과학 영재(?)'라며 근자감 가득한 모습을 보여온 아이가 중학교에서까지 그럴까 봐 미리 경계를 한 것이었습니다. 초등시절에는 귀엽게 넘어갈 수 있는 행동이지만, 자칫 그 모습이 친구나 선생님들께 부정적인 모습으로 비칠 수 있다는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몇 수를 내다보는 아빠 덕분에 아이는 조금씩 스스로를 다잡으며, 내면의 힘을 단단하게 키워나갈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1년간 이어진 영재학급 수업은 여러모로 아이가 초등학생 마인드에서 벗어나, 어엿한 중학생으로 성장하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첫째, 관심사가 비슷한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아이는 일주일에 두 번 있는 수업날을 손꼽아 기다렸고, 그곳에서 만난 다른 반 친구들과 유독 잘 어울렸습니다. 같은 반 친구들과도 친하게 지냈지만, 특히 영재학급 친구들을 더 좋아했는데, 그 이유는 "말이 통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수학과 과학을 좋아하고 성향이 비슷한 아이들끼리 모인 반이라, 관심사와 생각이 비슷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둘째, '과학고등학교(이하 과학고)'의 존재를 알게 되었습니다.
영재학급 수업을 들으며, 아이는 친구들의 꿈과 목표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귀담아듣기 시작했습니다. 아마 그때, '과학고'라는 존재를 처음 알게 되면서 막연히 친구들을 따라 '나도 과학고에 가고 싶다'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 같습니다.
셋째, 자신만의 꿈과 목표가 생겼습니다.
과학고를 알게 된 아이는 스스로 정보를 찾아보며 점점 확신을 가지게 된 듯했습니다. 결국 과학고에 도전해 보겠다는 결심을 한 아이는 저희에게 "제가 과학고에 한번 가보겠습니다."라고 당당히 선언을 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즉, 영재학급 수업이 아이에게는 과학고에 가보겠다는 결심의 씨앗이었던 셈입니다.
아이는 학교 수업도 성실하게 들었지만, 영재학급 시간을 더 좋아하고 즐겼습니다.
저는 아이가 영재학급에서 어떤 수업을 받는지 일일이 챙기지는 않았습니다. 아이가 재미있어했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다만, 아이가 스스로 과학고에 가겠다고 결심한 이상, 엄마로서 제가 해줄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그러던 중, 몇 가지 중요한 사실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일단, 제가 살고 있는 지역에 '과학고'라는 이름이 붙은 학교가 2곳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는 '영재학교=영재고(이하 영재고)'였고, 또 다른 하나는 '과학고'였습니다. 처음에는 이게 뭔가 싶었습니다. 그런데, 두 학교의 차이점을 알아갈수록, 아이가 가고 싶어 하는 학교는 영재고가 아니라 '과학고'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 당시 제가 찾은 영재고와 과학고의 차이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우리나라에는 초중등교육법에 따른 특수목적고인 '과학고(20개교)'와 영재교육진흥법에 따라 설립, 운영되는 '영재고(8개교)'가 있습니다(*2025년 기준, 경기형 과학고 4개교가 2027~2030년에 추가로 설립될 예정입니다.).
2) 세종과 인천과학예술영재학교를 제외한 나머지 영재고들은, 모두 기존 과학고에서 전환된 학교들입니다. 그래서 이름에 '과학고'가 남아있지만, 사실상 과학고가 아닙니다.
3) 과학고는 지역단위 선발(거주지 내 과학고 한 곳만 지원 가능)이고 중학교 3학년만 지원할 수 있는 특수목적고등학교입니다. 즉, 일반 고등학교처럼 국가교육과정 안에서 운영됩니다. 반면, 영재고는 전국단위 선발로 중학교 1학년부터 지원이 가능한 과학영재교육기관입니다.
4) 과학고는 서류전형 >> 출석면담 >> 구술면접을 통해 학생을 선발하고, 영재고는 서류전형 >> 영재성 검사(창의적 문제해결력 검사) >> 과학캠프 면접 등의 절차를 거칩니다. 일반적으로 영재고의 입학 전형이 과학고보다 먼저 시작됩니다.
5) 과학고는 2학년 때 조기졸업이 가능한 시스템을 운영하지만, 영재고에는 조기졸업 제도가 없습니다(*단, 2025년 기준, KAIST, DGIST, GIST, UNIST로의 진학 시에는 조기진학이 허용됩니다.).
아이에게도 확인해 본 결과, 역시나 아이가 진짜 가고 싶어 하는 곳은 영재고가 아닌 '과학고'가 맞았습니다.
하지만, 자료를 찾아볼수록, 아이를 어떻게 도와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습니다.
[서른세 번째 고슴도치 시선] 친구들이 학원이나 학습 보충용 방과 후 프로그램에 참여할 때, 아이는 여전히 비인기 과목인 과학 실험 방과 후 수업을 들었습니다. 덕분에 과학 선생님과 자연스럽게 가까워질 수 있었습니다. 1학년 과학 담당이셨던 선생님께서는 이 방과 후 수업뿐만 아니라 영재학급 과학 수업도 맡고 계셔서, 아이와 접촉할 기회가 많았습니다. 특히, 제 아이의 경우, 학원을 다니지 않아 방과 후에 여유가 있었고, 초등시절부터 갈고닦아온 과학 실험 실력도 있어서, 선생님의 실험을 돕는 보조 역할을 맡기도 한 것 같았습니다. 때로는 스스로 실험 계획을 세우고 검토하는 과정에서 선생님의 도움을 받기도 했습니다. 비록 하교가 늦어지긴 했지만, 그 시간을 통해 아이는 자신이 하고 싶은 것과 잘하는 것, 그리고 앞으로의 진로 등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처럼 제 아이는 학교 선생님과 스스럼없이 교류하고, 자신의 꿈에 대해 고민하며, 자기 주도적으로 배우고 성장하는 아이였습니다.
[다음 이야기] 학원의 존재 이유
이 이야기의 첫 단추 영유아편과 본격적인 교육 이야기를 담은 초등 편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