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 저학년(4)
생각보다 아이의 초등학교 생활은 매우 바빴다.
다른 아이들에 비해 학원(태권도 주 5회, 피아노학원 주 1회)을 많이 다니는 것도 아니었는데, 순전히 학교 생활, 학교 숙제, 학교 시험, 학교 수행평가만으로도 너무 바빴다.
2학년에 올라와서도 아이는 똘똘한 학교 생활을 하는 것 같았다.
남자아이치고는 꼼꼼했고, 여자아이들과 대등한 말발을 가졌으며, 선을 지키는 장난(?)과 성실한 학습 태도로 선생님들과 아이들의 신뢰를 받았다.
엄마들 사이에서는 아이들의 알림장 내용이 이해가 되지 않으면, "OO이 한테 전화해 봐."라는 말이 생겼다고 할 정도로 학교 생활을 잘해 나갔다.
다 잘하고 싶어 했고, 전부 열심히 하려고 해서 우리의 "공부방"에 늦게까지 불이 켜져 있는 날이 많았다.
평소 루틴대로라면 9시에 잠자리에 들어야 했지만, 숙제하느라, 시험 공부 하느라, 학교 수행평가를 해내느라 수면 패턴이 흐트러지는 날이 많았다. 그런 아이의 옆에서 공부도 돕고, 수행평가도 도우면서 드는 생각이, '도대체, 다른 애들은 시간 활용을 어떻게 하는 걸까?' 하는 의문과 함께, '이제 겨우 2학년인데, 앞으로 더 얼마나 힘들어지려나?' 하는 걱정이 생겼다.
그렇게 아이는 학교 생활과 친구들과의 관계에 별 어려움 없이 잘 적응해 나가고 있었는데, 정말 겪게 하고 싶지 않았던 "전학"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일단, 아빠의 출퇴근 문제가 가장 컸다. 너무 과도한 출퇴근시간(왕복 4시간)으로 인해, 아이 아빠가 많이 지친 것 같았다. 아이와 저녁 한번 먹지 못하는 삶이 "불행"하다고 했다. 그리고, 집주인의 변심도 한몫했다. 2년 계약을 했지만, 초등학교 졸업 때까지 살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했음에도 전세 만기가 되자 다른 조건을 내걸었다.
또다시 이사를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자, 아이 아빠의 "행복하지 않다."는 말이 자꾸 귀에 맴돌았다. 아이의 전학만은 막고 싶었지만, 지금 현재 살고 있는 동네에서는 아빠의 "행복"을 찾을 방법은 없었다. 그래서 또 한 번 우리 가족에게 있어 중대한 결정을 해야만 했다.
정말 많은 고민을 했고, 결국 "우리 가족 모두가 행복한 길"을 선택을 하기로 결정했다.
지금 살고 있는 이곳이 아무리 좋은 교육 환경을 갖추고 있다 한들, 가족 누군가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환경이라면 결국 나중에는 문제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아빠가 행복하지 않은데, 아이도 나도 행복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는 동안, 처음부터 내가 너무 과한 주장을 해서 이런 사태를 만든 건 아닌지 정말 후회가 되었다. 안정된 교육 환경에서 아이를 키우겠다는 생각만 하느라, 아이 아빠의 상황을 배려하지 못해 이런 상황을 만들었다 싶어 후회했다.
그런데, 뭐 이미 엎질러진 물을 어쩌겠는가?
지금은 후회할 때가 아니라 수습을 해야 할 때였다.
나도 어릴 때 전학을 다녀본 적이 있기 때문에, 전학으로 인해 아이가 처할 상황이 내 눈앞에 뻔히 보였지만, 그나마 울 아들은 아직 초등 저학년이라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이사 갈 곳을 물색했다.
친구 엄마들이 "남들은 수성구로 들어오는 타이밍에, 수성구에서 나간다고?" 하면서 의아해했지만, 우리 가족에게는 그것만이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아이가 3학년에 올라가기 직전, "탈 수성구"를 하게 되었다.
이사 후, 아이 아빠는 저녁이 있는 삶을 누리기 시작했다. 야근을 하는 날도 있었지만, 칼퇴하는 날엔 6시 반이면 집에 들어와 아이와 함께 저녁을 먹었다. 확실히, 전보다 아이와 보내는 시간이 길어졌고, 아이도 아빠와 함께하는 시간을 행복해해서 잘한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이에게는 많든 적든 환경변화로 인한 영향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일단, 내가 생각하는, 아이가 환경 변화로 잃은 것.
첫째, 친구들이 사라졌다.
둘째, 저쪽 학교에서 쌓아 올린 우등생과 모범생 이미지(평판)가 사라졌다.
셋째, 저쪽 학교에서 해오던 학급 반장과 같은 커리어(?)가 사라졌다. 내 경험상 초등학생 때의 이 커리어는 한번 생성되면 연속해서 졸업 때까지 유지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것들이 모두 리셋되었다.
그리고... 나도 잃은 게 있다.
겨우 쌓아놓은 학부모 인맥이 리셋되었다.
어쩌면 울 아들은 이런 부분들을 직접적으로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오히려 내가 겨우 겨우 쌓아 올린 인맥들을 두고 온 게 아쉬워 혼자 그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다.
아이는 겉으로 보기에는 큰 무리 없이 "전학"을 받아들였고, 학교 생활에 잘 적응했다. 되려 행복한 학교생활을 했던 것 같다.
내가 생각하는, 아이가 환경 변화로 얻은 것.
첫째, 여유로운 시간을 얻었다.
이 동네 친구들도 방과 후엔 학원을 다니고 바쁘게들 살고 있었지만, 틈틈이 노는 아이들도 보이고, 뭔가 자유스러운 분위기였다. 시험도 있긴 했지만, 시험 전날까지도 놀이터가 왁자지껄했고, 평소에도 아이들 뛰어노는 소리가 저녁 늦게까지 들렸다. 해맑고 건강하게 뛰어노는 아이들이 많은 동네였다. 수업도, 시험도 여유롭다 보니, 울 아들에게도 여유가 생겼다.
둘째, 양질의 방과 후 수업을 들을 수 있었다.
학교가 크고 전통이 오래된 학교라 그런지 학교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어 방과 후 프로그램이 다양했다. 학습적인 부분을 업그레이드해 주는 영어, 수학 프로그램도 있었지만, 축구, 배드민턴과 같은 운동이나 과학 수업, 마술 수업과 같은 흥미로운 수업들도 많았다. 울 아들은 학교 수업을 마치고 나면, 방과 후 수업을 듣고 하교했는데, 매 분기마다 하고 싶은 수업이 많아서 늘 행복한 고민을 했고, 모든 프로그램에 대한 만족도가 높았다.
결과적으로, 우리의 선택은 옳았다.
어쩔 수 없는 "환경 변화"로 잃은 것도 있고 얻은 것도 있었지만, 아이에게는 이쪽 학교생활이 더 잘 맞았던 것 같다. 교육열이 높은 환경에서 강도 높은 학습을 하다가 좀 더 여유로운 환경에 놓이게 되자, 아이에게 생각의 깊이와 폭을 넓힐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생긴 것 같다. 매달 치는 시험에서 해방되자 본인이 좋아하는 것, 예를 들면 책 읽기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고, 학교에서 운영하는 다양한 방과 후 프로그램을 통해 자신이 잘하는 것을 찾아나갔다. 그런 과정을 통해, "과학"이 제일 재미있는 분야라는 확신을 가지게 된 것 같고, 이후 "과학"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을 책과 "과학 실험" 방과 후 수업을 통해 채워나가게 되었다.
'만약, 우리가 전학 없이 그곳에서 학교생활을 계속 유지했더라면 어땠을까?'
가끔 생각해 보는데, 어쩌면 그곳에 계속 남아 있었다면 남들처럼 사교육의 도움을 받으면서 수업과 시험에 올인하는 치열한 학교 생활을 하고 있지 않았을까 싶다. 내 말은, 그곳의 학구열과 교육열이 잘못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내 아이와는 맞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아이가 환경 변화로 잃었다고 생각하는 것들도 아이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저 내 기준, 어른의 시선에서 잃었다고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아이에게는 소중한 1학년, 2학년이었을 텐데, 본의 아니게 그런 변화를 겪게 한 것은 미안한 일이었다. 그래서, 새롭게 터를 잡은 이곳에서만큼은 안정된 생활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 아이에게 여유가 생기니, 나에게도 여유가 생겨, 아이를 찬찬히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도 생겼다.
확실히, 쓸데없는 경험은 없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