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레터] 얼어붙은 시간 속에서

어느 겨울날의 안부 - Ep.01

by 오로지오롯이



눈꽃이 광활한 숲의 꿈을 뒤덮었다

때가 되면 다 이루어주겠다고





겨울의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 바람은 무겁고, 공기는 단단하다. 숨을 들이마시면 코끝이 먼저 차가워지고, 주머니 속에서도 손가락 마디를 펴면 부서질까 조심스러워진다. 사람들은 옷깃을 여미고 목적지를 향해 걷는다. 겨울은 걸음이 빨라지는 계절이다. 그런데 나는 그 빠름에서 가끔 빠져나온다. 멈춰서야만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어서다.


눈이 오고 난 다음 날의 거리는 유난히 조용하다. 도로는 젖은 회색으로 가라앉고, 인도 가장자리에는 치워진 눈이 낮은 언덕처럼 쌓인다. 낙엽은 바닥에 납작하게 눌린 채, 제 몸 위로 내려앉은 흰 무게를 견딘다. 멀리서 보면 정지 화면 같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다르다. 눌린 눈 사이로 물이 아주 가늘게 길을 만들고, 얼음 가장자리는 생각보다 쉽게 금이 간다. 겨울은 멈춘 것처럼 보일 뿐이다. 움직임은 계속 있다. 다만 느리고, 조용하고, 눈에 띄지 않는다.


그 고요는 사람의 마음에도 번진다. 차가운 계절이 오면 마음의 속도도 함께 늦춰진다. 따뜻한 날들에는 그냥 지나치던 것들이 겨울에는 자꾸 시야에 걸린다. 한 해 동안 쌓였던 말들, 다 쓰지 못한 감정들, 미뤄 둔 안부 하나하나. 언제 한 번 연락해야지 하고 넘긴 이름들이 겨울에는 유난히 또렷해진다. 후회라고 부르기엔 애매하고, 잊어버렸다고 하기엔 또 선명하다. 정리되지 않은 마음들이 조용히 줄을 선다.


한 번은 얼어붙은 길에서 미끄러질 뻔한 적이 있다. 눈이 녹았다가 다시 얼어붙은 얇은 막, 그늘에 남아 있는 미끄러운 자리. 나는 곧장 걸음을 잇지 못하고 옆으로 비켜섰다. 그 찰나, 난간 너머 개울이 보였다. 표면은 얼어 있었지만 완전히 꽁꽁 언 얼음은 아니었다. 얼음 아래에서 물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작은 물결은 느렸지만 끊기지 않았다. 그 움직임을 보고 있자니, 멈춘 것처럼 보이는 시간 속에서도 진행되는 일들이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나무는 잎을 잃고 가지는 비어 보이지만, 뿌리 아래에서는 여전히 생명이 이어진다. 겨울은 덜어낸 자리에 남은 것들을 확인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확인은 대개 소리 없이 진행된다. 그래서 나는 겨울의 느림을 믿는다. 눈에 띄지 않게, 겉을 덮어 둔 채로, 안쪽에서 자라는 시간이 있다는 것을.


눈꽃은 숲을 잠시 가린다. 꿈까지도 덮어 버린다. 그러나 그 덮임이 끝이 아니라는 걸 우리는 안다. 때가 되면 눈은 풀리고, 땅은 다시 드러나고, 숨겨졌던 것들은 제 자리로 돌아온다. 겨울의 시간은 그런 약속을 지키는 방식으로 지나간다. 그렇게 내가 놓쳤던 것들, 미뤄 둔 것들이 새롭게, 그리고 극적으로 드러나도록 겨울은 한 번 더 속도를 늦춰 준다.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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