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창작시] 바퀴벌레

by 오로지오롯이

- 바퀴벌레 -


부검을 부탁해요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까 그니까 이놈은 내 친구였어요 이름은 그레고리 잠자 제가 붙여준 이름이죠 이 친구를 처음 본 건 제 방이었어요 불 꺼진 방에서 유일히 빛나던 모니터 앞을 지나가던 그 광경을 잊지 못해요 뭐랄까 뭐라할까 아, 손님 같았어요 제 방에는 누구도 들어온 적이 없었거든요 그 이후로 이 친구는 제 멋대로 들락날락했죠 저는 일부러 인스턴트 소시지를 까놓고 잠들기도 하고 벽에서 사물들을 조금씩 띄어 놓기도 하고요 그 친구는 틈을 좋아하더라고요 그 틈이 그 친구의 집이니까요 가끔씩 뱀의 허물처럼 벗겨진 소시지 껍질이나 액자 뒤에 숨기도 하고요 어쨌든 그 친구에게 저는 무상으로 의식주를 제공했어요 저는 할 만큼 했어요 근데 이 녀석이 한참 저에게 정을 주는 듯싶더니 한동안 보이지 않는 거예요 근데 나참 어이가 없어서


탁상달력 그 사이에 뒤집혀 죽어있더라고요 2006년도 달력이었나 아무튼 왜 하필 거기서 죽었나 몰라 아무튼 난 알아야겠어요 이 친구가 왜 죽었는지 나는 꼭 알아야겠어요 저는 할 만큼 했다고요 분명 방에는 아무도 들어온 적 없는데, 왜 죽어 있냐고요 음영 없는 이차원의 낙서처럼 껍딱지처럼 붙어 있던 그 녀석을 떼어내면서 제 마음은 어떻겠어요! 저라고 매일 하루종일 게임만 하는 줄 아세요? 저도 가끔씩은 책도 읽고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고. 감정 있게 사는 사람이에요 사람들은 나를 오해하지만 저는 뭐 방에만 있는 거지 할 건 다 하고 살았어요 저도 친구가 죽으면 슬퍼할 줄 안다고요 그러니까 부검해주세요 이 친구가 왜 죽었는지 알아야겠어요 절대 스스로 죽을 친구가 아니에요 이유가 필요해요 저를 왜 떠났는지 알아야겠다고요


나참 얼마 만에 밖에 나온지도 모르겠어요 그래도 이게 도리겠죠? 자 여기 탁상달력도 가져왔어요 여기에도 시체의 잔해물이 묻어있거든요 여기 9월 면 아래쪽, 아아, 여기여기


저기요, 근데 오늘은 며칠이죠?



pngtree-an-empty-dark-room-with-concrete-walls-image_2884542.jpg


keyword
이전 12화[창작시] 노량진 수족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