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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신 Apr 01. 2021

반응하지 않기

일상 명상#1


예전에는 반응 속도가 빠른 사람을 좋아했고, 나 또한 반응 속도가 빠른 편이었다. 상사나 고객이 원하는 것을 빠르게 캐치했다. 집에서는 아내가 원하는 것을 빨리 잡아냈다.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빠른 속도로 응답을 했다. 누군가 내게 메일을 보내면 거의 실시간으로 답을 했다. 이런 습성이 도대체 언제부터 생겼는지는 모른다. 어릴 때일 수도 있고, 군에 복무하며 배운 것일지도 모른다.


이런 모습을 스스로 자랑스럽게 생각을 했기 때문에, 나와 함께 일한 친구들은 늘 가르침이라는 꼰대질을 당했다. 메일에 빨리 답을 보내는 게 좋으며, 한 번에 여러 개의 일을 처리할 수 있어야 하며, 요청하는 것은 빠르게 대응해야 한다,라고 지껄이고 다녔다. 꼰대질인데, 막 타박을 주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물론 나의 생각이다. 당한 사람은 어떻게 기억할지 모를 일이다. 무심코 기억이 떠오르면, 욕부터 할지도.


반응 속도가 빨라야 한다는 나의 고정관념은 19년도 무렵에 깨지기 시작했다. 특히 메일 같은 것을 보낼 때는 매우 조심해야 하며, 천천히 숙고하고 보내야 한다는 것을 몇 번의 실수를 하고 깨달았다. 메일은 한 번 잘 못 보내면 돌이킬 수가 없기 때문에 매우 조심해야 한다. 이렇게 중요한 것을 몇 번의 실수를 하고 깨달은 걸 보면, 반응만 빨랐지 조심성은 좀 없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위파사나 명상에서는 몸과 마음에 일어나는 다양한 감각과 생각에 반응을 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감각과 생각은 시간이 지나면 없어지는 무상한 것이기 때문이다. 무상. 사실 세상 모든 것이 무상하다. 모든 것은 변한다는 사실을 외에는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 변화하는 것을 부여잡아 본들 어쩌겠나. 결국에는 소멸할 것인데. 소멸할 것을 부여잡는 행위와 습관을 고통을 만들어 낸다.


나는 이런 위파사나 명상의 가르침을 본받아, 다른 이들에게도 명상을 할 때면 반응하지 말고 관찰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람의 모든 반응은 감각과 생각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명상 중에 감각과 생각을 바라보는 것은 세상일에 반응하지 않고 대응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과 같다고, 말하며 잘난 척했다.


헌데, 내가 그 무상한 것들에 반응하고 말았다. 쩝. 오늘 모 인터넷 강의 업체로부터 강의 계약서 초안을 받았다. 빅데이터 분석에 대한 책을 쓰고 있는데, 그 책을 인강으로도 촬영하기로 한 것이다. 갑과 을로 표기한 계약서를 만드느라 담당자가 무척 고심했던 것 같다. 부러 전화를 해서 초안을 보냈으니 잘 검토해달라는 연락을 해왔으니. 한데 계약서를 열자마자 기분이 좋지 않았다. 부당한 조항과 과한 표현들이 즐비했다. 꽤나 큰 업체이기 때문에 표준 계약서가 분명히 있을 터다. 만약 표준 계약서를 바탕으로 작성한 것이면, 회사(갑)가 일상적으로 강사(을)에게 갑질을 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불공정했다.


계약서를 검토하며, 한 줄 한 줄 코멘트를 달려고 수정이 필요한 것들을 발라냈다. 메일을 쓰려는 순간, 저기 저 밑에서 불쾌한 기분이 올라왔다. 그 불쾌한 기분, 그 감각에 반응을 하고 말았다. 갑에게 대응하는 을의 또 다른 갑질이라고 할까. 그 업체의 직원이 무슨 죄가 있겠냐마는, 나의 갑질이 발동하고 말았다.


"조항과 문구를 수정해서 보내주세요. 수정한 계약서도 이렇게 과하면 계약은 하지 않겠습니다."하고 메일을 보내버렸다. 후련한 마음이 드는 것도 잠시, 반신욕을 하며 욕조에 랁아 있는데, 내가 보낸 메일을 읽으며 마음을 쓰러내릴 담당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반응하지 말라고, 반응하지 말고 관찰하라고 떠들고 다녔는데. 스스로 반응하고 말았다. 이런 젠..


https://blog.naver.com/desunny/2222638307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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