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약서 내용은 또 나만 진심이었지? -
뙤약볕이 내리쬐는 어느 날이었다. 나는 네이버 지도 어플을 확대해가며 모처를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잰걸음으로 걷기를 이십여분. 내 눈앞에 나타난 것은 낡고 허름한 칠층짜리 빌딩이었다. 빌딩을 올려다 보는데, 그 사무실 밑층의 성인용 PC방이 제일 먼저 내 눈에 들어왔다. 고무장갑 컬러의 하트 스티커가 창문마다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참으로 혼돈스러웠다. 나는 저 회사를 들어갈까 말까를 한참동안 고민했다.
내 이력서와 포트폴리오를 보고 연락이 온 것은 주말 저녁 즈음이었다. 전화를 걸어온 누군가는 아주 친절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자신들은 네 편의 유머러스한 콘텐츠를 준비 중이며 유능한 작가님을 찾고 있는데, 내가 딱 적임자라는 사탕발린 말을 늘어놓았다. 나는 몇 분간 묵묵히 이야기를 다 들어준 뒤 물었다.
그래서 페이가 어떻게 되나요?
그러자 그 누군가 씨는 답변에 앞서, 지루하고 긴 니쥬를 깔기 시작했다. 나는 TV 방송 퀄리티를 원하지만 싼 맛에 작가를 부려먹고 싶어하는 이들을 여러 차례 만난 적이 있다. 이것은 그들에 대한 나의 고찰이다.
그들의 니쥬 깔기는 보통 이렇게 시작된다.
① 먼저, 제작비가 적다는 사실을 토로한다.
② 하지만 저희는 작가님과 꼭 함께 하고 싶다고 한다.
③ 당사에서 진행 예정인 프로젝트가 많기 때문에, 지금 이런 프로젝트도 하고 있거든요. (강하게 어필해야 하기 때문에 두 번 강조) 그래서 앞으로도 작가님과 쭉 함께 하고 싶다고 한다.
④ 이번 한 번만 도와주시는 셈 치고 함께 진행하시죠 라고 한다.
∴ 마지막으로,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정도로 택도 없는 페이를 부른다.
그래서 나는 처음엔 좋은 모양새로 거절하고 전화를 끊으려 했다. 하지만 누군가 씨는 만나서 논의를 해보자고 했다. 내가 꼬치꼬치 따져묻자 누군가 씨는 페이 조율, 미팅·회의 등 참석 조절 등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했다.
그렇게 미팅 차 찾아온 회사는 첫 인상부터 안 좋았다(특히나 나는 엘리베이터 층수 버튼을 잘못 눌러서 성인용 PC방이 있는 층에 내릴까봐 안절부절 못했다). 뭐 세상은 넓고 다양한 회사는 많으니 그건 이제 아무렇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 시국에 다들 당당히 마스크를 안 쓰고 내 앞에 몰려 앉아있는 건 아니지 않은가? 어떻게 된게 대표부터 사원까지 어느 누구 하나 마스크를 안 쓰고 있을 수가 있을까. 나는 마스크를 쓰라는 뜻으로 내 마스크를 눈밑가까지 올려봤지만, 다들 그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 외에도 그들은 하기로 확정도 안 했는데 아이디어 강요하기, 당장 내일까지 기획안 달라고 하기 등등 참 진상 같은 짓들만 했다. 나는 더이상은 참기 힘들어서 내가 책정한 페이를 불렀다. 물론 많은 페이는 아니었지만, 미팅·회의 참석 횟수를 줄이고, 후반작업 등도 떠넘기지만 않는다면 잠자코 할 수 있는 정도로 딱 책정한 값이었다. 그러자 그들은 당황한 듯 서로를 곁눈질하다가, 왠 작자 하나가 입을 열었다.
작가님한테 이 정도 페이도 못 드리면 쪽팔리죠. 카메라 렌탈비에서 떼서라도 드릴게요.
제작 미팅에서 쪽팔리다라는 워딩을 들은 건 처음이었다. 거기다 당당하게 다른 파트의 제작비에서 떼서 내 페이를 지급하겠다고 이야기를 하다니. 나는 그게 더 쪽팔렸다. 불안했지만, 이번 주 내로 계약서를 보내주겠노라 하는 그들의 말을 믿고 일을 진행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 귀하다는 계약서는 계속해서 늦어졌다. 내가 계약서를 언제 보내줄 수 있냐 물으면 오늘 중으로 보내주겠다고 하면서, 자꾸 대본은 언제 나오냐고 역질문을 했다.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만큼 그들은 진상이었다. 나는 그만두겠다고 두 번이나 선언했지만, 그들은 이미 발을 담궜으니 안된다고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
결국 보다못한 나는 최종 대본을 보내는 날, 대본을 인질로 붙잡아 놓고 최후의 통첩을 날렸다. 오늘 계약서에 페이를 맞춰주지 않을 시, 대본을 전달하지 않겠다고 말이다. 그러자 발등에 불이 떨어졌는지, 내부 상의 후 계약서가 전달되어 왔다. 아마도 그들은 끝까지 계약서를 주지 않을 셈이었나 보다.
이윽고 촬영날. 나는 그들과 마주앉아 밥 먹기도 싫어서 김밥을 사갔다. 그리고 쉬는 시간에 혼자 구석에서 묵묵히 김밥을 먹었다. 기분이 최악일 것 같아서, 일부러 먼 길 돌아서 사간 최애 김밥이었는데도, 김밥 맛은 그냥 그랬다. 그 회사 사람들은 왜 자기들이 준비한 도시락 안 드시냐고 유난이었다.
촬영날에서야 내 밥을 그렇게 챙겨줄 정신으로
먼저, 함께 일할 작가의 계약서부터 챙겨줬다면
얼~마나 좋았게요?
어찌저찌 촬영이 끝나고 그들은 나를 처음부터 몰랐던 사람인 것 마냥 연락을 하지 않았다. 편집이며 자막, 납품 등 후반작업을 하느라 바쁠 것을 염려하여 나는 한 달 반을 기다려줬다. 그 사이에 나는 혹시나 싶어서 일한 내역들을 모조리 캡쳐했고, 통화 내용을 녹음할 것을 대비해 녹음기를 장만했으며, 그 회사에 제작을 맡긴 곳의 연락처를 수배해뒀다.
그리고 참다못한 내가 카카오톡으로 대표에게 왜 페이를 입금하지 않느냐고 연락을 한 것은 정확히 한 달하고도 십팔일이 되던 날이었다. 오히려 대표는 입금이 안 됐냐고 나에게 물었다. 그걸 왜 나에게 물어볼까? 나는 돈이 안 들어온지 벌써 한 달 반이 다 되어간다고 답했다. 그러자 대표는 구구절절 니쥬를 깔며 사정을 설명했다. 너무 바빴고, 마무리 작업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고 했다. 또한 정산 시즌에 담당자가 회사를 그만 두어서 지급이 누락된 것 같다며, 조금만 일찍 연락을 줬다면 일찍 신고해서 일찌감치 드렸을텐데 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지급 금액이 얼마냐고 질문하는 것이었다. 왜 자기들이 예정된 날짜에 페이 지급을 안 해놓고 내 탓을 하며, 도대체가 내가 썼던 계약서는 어디로 갔길래 이걸 나에게 물어보는 걸까? 나는 화를 억누르고 친절하게 계약 금액을 이야기해줬고, 제날짜에 꼭 입금을 하라고 신신당부했다.
입금을 기다리는 동안, 나는 수십번 제작을 맡긴 곳의 전화번호를 눌렀다가 지웠다가를 반복했다. 며칠을 기다린 끝에 페이가 입금됐다. 그들이 나에게 그토록 어필하고 자랑하던 또다른 프로젝트 제안 같은 건 없었으며 (내가 그만두겠다고 선언할 때마다 나를 달래려 쓰던 사탕 같은 것이었다. 애시당초 내게 하자고 할 거라 생각도 안 했자만 그 프로젝트라는 것이 존재했는지도 의문이다), 내 앞에서 담배나 뻑뻑 피워대며 그만두면 안된다고 호소하던 PD는 촬영 종료 후 단 한 번도 연락이 없다.
그걸로 이들이랑 인연 같지도 않은 이년은 끝인 거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이력서에 그 경력을 적긴 했다. 종종 내 이력서를 볼 때마다, 내가 좋아하는 그 김밥을 먹을 때마다 자꾸만 생각이 난다. 나를 다른 프로젝트로 회유하던 그 누군가 씨와, 비흡연자 면전에 대고 담배를 피던 PD와, 페이를 못 받았는데 빨리 연락을 안 했냐고 내 탓을 하던 대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