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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메론 Mar 02. 2021

11. 저는 1도 맵지 않습니다만?

- 누가 내 혀를 무디게 만들었을까? -



  회의가 끝나고 난 뒤, 늦은 점심 메뉴를 선택했다. 팀원들의 의견이 분분하던 차에 마라탕과 마라샹궈로 결정됐다. 볼에 파릇파릇한 청경채와 배추, 버섯 등을 담고 유부, 떡, 분모자도 담는다. 고기는 모두의 혀를 수용시킬 수 있는 소고기로 픽했다. 매운 맛 또한 보통으로 통일한다.

  김이 모락모락나는 마라탕과 마라샹궈가 나오자, 팀원들이 한 입씩 먹고 음료를 주문하거나 물을 들이켰다. 혀 끝이 아리다는 사람도 있었고, 입안에서 불이 나는 느낌이라는 사람도 있었다.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너는 안 매워?

  응. 하나도 안 매운데? 그냥 적당한 맛이야.

  나는 찬찬히 마라탕과 마라샹궈를 왔다갔다하며 마라 맛을 만끽했다. 그러고 보니 최근 들어 이런 대화를 자주 했던 것 같다. 함께 식사를 하는 이는 음식이 맵다고 호소하고, 나는 전혀 매운 걸 모르겠다며 신나게 식사를 하는 장면과 함께 말이다. 덧붙이자면, 나는 식사를 전부 끝낼 때까지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




  늦은 새벽에 잠들기 전, 습관적으로 하는 것이 배달의 민족 어플에 접속하는 것이다. 얼마 전 한 방송에서 가수 아이유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오늘 뭘 시켜먹지?’ 생각한다. 설레고 기대하는 마음으로 눈을 뜬다”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나 또한 1일1배달 주문을 하는 배달 VVIP다. 심지어 회사에 출근을 해야 하는 날은 ‘저녁은 뭘 시켜먹을까?’를 고민하며 배달 어플에 접속할 정도니 말 다했다.

  여기서 1일1배달순이의 주문 내역을 공개한다.

  

노랑통닭 : 알싸한 마늘치킨(순살)
코코이찌방야 : 비프카레 2단계
모 중국집 : 매운 소고기 짬뽕
모 파스타 집 : 버섯 필라프
↳ 요청사항 「필라프 매콤하게 조리 부탁드려요」
모 분식집 : 불맛 김치볶음밥
모 쪽갈비집 : 양념쪽갈비


  무의식적으로 시켜먹었던 것들이 전부 새빨간 음식이거나, 매운 맛의 음식들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일부러 매운 음식을 찾아다니거나, 굳이 최고 매운 맛을 선택해 먹는 사람은 더더욱 아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종종 단골집 훠궈를 먹으러 가면, 매운 음식을 즐기던 친구가 어느 순간부터 너무 맵다고 종종 이야길 하곤 했다. 또 떡볶이를 순한 맛으로 시켰는데 자칭 맵찔이라 하는 팀원은 쿨피스를 두 잔이나 비우기도 했다.   

  사실 나는 2012년 대한민국을 강타했던 불닭볶음면이 매워서 중도포기했던 사람이었다. 특히 인터넷에서 유행했던 냉불닭볶음면(①삶은 면을 차갑게 헹궈낸다 ②슈퍼에서 파는 1,000원짜리 살얼음 냉면 육수를 준비한 다음, 면과 함께 합쳐준다 ③그 위에 불닭 소스를 올리면 끝!)을 시도했다가 채 한 입도 먹지 못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모짜렐라 치즈의 힘을 빌려 조금씩 불닭볶음면을 접하게 됐고, 지금은 치즈 없이도 불닭볶음면 하나 즈음은 완식할 수 있게 됐다. 그 외에도 맵다고 소문난 떡볶이나 오징어볶음도 처음만 매웠지, 요즘에는 즐겨먹는 수준이 됐다. 언제부터 내 혀가 이렇게 무뎌졌을까?
  그때마다 나는 면역력이 바닥 수준인 내 몸을 떠올린다. 대학 시절에도 나는 컨디션이 그리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체력이 더 떨어진 것은 정확히 말하자면 막내작가 일을 시작하면서부터다. 밀려드는 자료조사 때문에 매번 놓치던 점심시간, 책상 앞에서 몇 초만에 후루룩 때우던 컵라면, 정신이 없어서 한 입 먹고 굳어버린 감자 샌드위치까지. 일이 너무나도 많았던 내게 온전한 점심시간이나 메뉴가 주어지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도 했다. 나는 점점 더 극한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부산에서 촬영을 끝내고 온 PD님이 촬영지에서 얻어온 떡볶이를 한 입 얻어먹은 적이 있다. 지금도 그 떡볶이를 생각하면 코끝이 아리고 침이 고일 만큼, 아주 매운 맛이었다. 그 떡볶이를 먹고난 뒤 나는 혀가 마비되서 한 두 시간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회사 복도를 여러 번 왔다갔다 하기도 하고 얼음 물을 몇 분간 머금고 있기도 했다. 하지만 두피가 간질간질하고 뱃속에서부터 무언가 뜨거운 것이 올라오는 느낌은 쉬이 가라앉질 않았다. 시간이 조금씩 지나자 하지만 조금씩 얼얼한 맛이 사라졌는데, 신기한 것은 복잡했던 머릿 속이 말끔하게 정리된 느낌도 함께 받았다는 것이다. 내 인생에서 그렇게 매운 음식은 처음이었다.

  그 이후로 나는 매운 음식을 먹으러 다닐만큼 매니아가 되진 않았다. 하지만 머리 끝까지 차오른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무의식 중에 빨간 음식을 선택했던 것 같다. 김치찌개와 된장찌개가 있으면 김치찌개를 선택했고, 물냉면과 비빔냉면 중 무얼 먹겠냐고 하면 굳이 비빔냉면을 선택했다. 그랬던 이십대의 나는 쑥쑥 자라서 위염을 앓는 어른이가 됐다. 최근 몇 년동안 위가 쓰라려 병원을 자주 찾았는데, 하필이면 꼭 주말 밤마다 적신호가 울렸다. 나는 울며 겨자먹기로 대학병원 응급실에 기어갔다. 그때마다 굵은 주사 바늘이 혈관을 찾지 못해 양쪽 팔에 피멍자국을 남기곤 했다. 응급실을 찾으면 9만 원씩 깨지는 건 일도 아니었다. 특히나 혼자 살면서 아픈 것만큼 서러운 일도 없었다.
  그때만 해도 나는 내게 주어진 일을 해내기에 바빠서, 정작 나 자신은 돌봐주지 못했다. 내 몸은 어떤지, 내가 얼만큼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지도 몰랐다. 이제 나는 내 몸이 어떤지도 알고, 스트레스를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도 안다.


무엇보다도 삼십대의 나는, 나를 극한의 상황으로 몰고 가지도 않는다.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일찍 깨달아주지 못해서 미안할 따름이다.


  그래서 나는 몇 년 사이에 챙겨먹는 것들이 많아졌다. 위가 안 좋으니 양배추 환을 챙겨먹고, 또 홍삼이나 콜라겐, 비타민도 챙겨먹는다. 그리고 호박과 팥이 들어있다는 건강티백도 주문해서 하루에 물 마시는 양을 늘리고 습관을 만들었다. 매운 음식에 무뎌진 혀는 쉽게 돌아오진 않고 있지만 먹는 양이나 횟수를 줄였다.

  아직 이 어른이는 고생을 덜 했다. 그러니 나쁜 습관들을 쉬이 버리지 못하는 거겠지. 하지만 나는 내 나름의 스탭으로 걸어가봐야겠다. 조금씩 천천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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