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것과 친해진다는 것은 _A NEW CHAPTER
임동민&최형록 듀오 리사이틀
Janáček: Sonata for Violin and Piano, JW VII/7
Poulenc Sonata for Violin and Piano, FP.119
Saariaho: Nocturne for Solo Violin
Bartók: Violin Sonata No.1 in c-sharp minor, Sz.75
DONGMIN LIM, VIOLIN
HYOUNGLOK CHOI, PIANO
들어가며,
마음에 남았던 곡은 야나체크였고
새롭게 다가왔던 건 풀랑크였으며
잊었던 초심을 일깨워준건 사리아호
새로운 챕터를 열게 한 것은 바르톡이었다.
조용하다.
들려오는 건 충전선이 연결되어 숨소리를 길게 내뱉는 노트북의 소리. 어떻게 움직이는지 모르겠지만, 내 생각을 뱉어내는 손가락이 자판 위를 두드리며 타닥이는 소리. 그리고 어떻게 생각을 정리해야 할까 고민하는 시끄러운 내 머릿속 소리. 현재 시간은 10일 12:28. 막 10일이 된 시점이다. 내일 하려고 했는데, 왠지 모르게 얼른 쓰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고, 가장 방해가 없고, 잡념이 없으며, 고요한 시간은 어쩌면 일찍 잠들기를 포기한 지금뿐이라는 생각도 든다. 지금 이 순간을 만나려면 오늘 하루를 길게 기다려야 하니 그냥, 지금 쓰기로 한다.
오늘을 보내기 전까지만 해도 약간의 나 혼자 만든 '숙제' 개념이 있었다. 나는 이 글을 왜 쓰려고 할까? 하는 의문이 떠다녔다. 그새 숙제처럼 느껴졌나? 잡념이 많은 나로서는 어떻게든 이 글을 써내려 가는 행위 자체를 지연시키려 애를 썼다. 그러다 오늘 낙성대공원 도서관에 잠시 들러, 기웃기웃 서가 사이를 돌아다니다 '열려라, 클래식'이라는 책이 내 눈에 스쳤다. 예술 600에 있는 유일한 클래식 도서였다. (일단 내 눈엔 그래 보였다.) 이제 막 클래식을 열어 젖힌 사람으로서 어찌 그 책을 건들지 않을 수 있을까? 가볍게 첫 페이지를 넘긴다. 눈에 띄는 건 뭘까? 목차다. 나는 거기서 아주 얇은 기쁨을 느낀다.
제 3장을 보자. 낭만주의 음악의 작곡가들이 나열되어 있다. 베버, 슈베르트, 멘델스존, 쇼팽, 슈만, 리스트, 브람스, '생상', 말러. 제 4장을 보자. 민족주의 음악의 작곡가들이다. 무소르그스키, 차이코프스키, 시벨리우스, 라흐마니노프, 드보르작. 제 5장을 보자. 무려 현대음악이다. (내가 현대음악을 반가워하다니?) 드뷔시, 쇤베르크, '바르토크(!)', 스트라빈스키, 쇼스타코비치.
불과 몇 개월 전만 해도, 생소하게만 느껴졌던 작곡가들의 이름이 이제는 '어, 나 이 사람 알아.' 하는 친숙함을 느끼게 한다. 생전 처음 보는, 내 전공과는 관련 없는 책에서, 내 호기심이 가득했던 곳에서 내가 '아는 것'을 만나니 기쁘다! (그리워하던 바르토크도 포함되어 있다니! 내가 그를 안다!) 이 작은 발견이 나를 기쁘게 했다. 또 이 발견이 옹졸한 마음을 가볍게 만들었다.
이 나를 기쁘게 한 얇은 사실이 무겁게 내려앉았던 나의 '숙제'를 가볍게 만들었다. 내가 왜 이 글들을 쓰기 시작했는가? 그 '소리'들이 내게 무언가를 '얘기'했기 때문이 아닐까? 누군가에게는 찰나로 지나갈 좋은 '공연'의 순간이지만 나는 그 순간에 펼쳐진 '무언가'를 분명히 그리워할 현재와 미래의 나를 위해 자세히 깊이 기억하려고 하지 않았던가? 사실 다른 이유 필요 없이, 그냥 좋기 때문에 기억하려고 했던 것이지 않는가? 또 내가 바라보는 '소리'들이 나 같은 '인간'에게는 어떻게 들리는지 이야기하고 싶기도 한 것이 아니었던가? 그래, 이 문장을 나열하며 또 한 번 가벼워진다. 끊임없이 잡념을 지워내야 하는 이 불편함은 언제쯤 없어질까? (희망을 버리자. 아마 죽을 때까지 이럴 것이다.)
그래, 이런 맘으로, 그냥 듣기로 한다. 어차피 나는 글을쓰는 게 아니다. 순전히 들려오는 대로. 내 맘대로 이 소리를 풀어내고, 가사를 붙여보는 것뿐이다. 그저 그뿐이다.
JANACEK: SONATA FOR VIOLIN AND PIANO, JW VII/7
본론부터 말하자면, 그 날의 곡들 중 가장 좋았다고 말하고 싶다.듣기 전에 첫 느낌을 회상해보자. 내가 좋아하는 소리, 아니, 내가 '좋다'고 느끼기도 전에, 마음이 쿵 내려앉는 소리가 있다. 일순간에 시작되는 명확하고 선명한 하나의 선, 너무 빠르지도, 지체되지도 않게 '짙게' 내려앉아 마음을 꾹 눌러주는 소리. 그것이 시작이었다. 그 서두는 여전히 기억에 남는다. 또, 내가 예습했던 녹음 버전보다 훨씬 더 감정적이었다. 어느 부분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 순간이 다가오면서 눈시울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 날은 정말 그랬다.
1악장
밀도감 있는 선이 지체 없이 아래로 쭉 뻗어 내려가다 문을 열어버린다. 순식간에 물결처럼 밀려오는 소리들. 피아노가 밑을 깔아주는 듯, 울렁이는 듯, 격랑이 이는 듯한 흐름을 보인다. 그 위로 파도를 가르며 나타나는 현의 소리. 부유감이 느껴진다. 찰나의 머뭄 후 또 한 번의 그 선. 다시 요동치고, 그리고 그것을 빗겨가며 날아오르는 소리. 출렁이는 물결, 감히 어디에 닿으려 하는걸까. 그 아슬아슬한 줄다리기를 하며 아득한 선율이 이어진다.
잠깐의 침묵 후 두 소리가 다시 마주한다. 그러다가도 대립하는데. 매몰찬 짧은 대화들이 울려 퍼진다. "정말?" 그리 하겠다고 물어오는 격동의 소리. 바이올린은 비수를 날려버리며 처절하게 울어댄다. 매섭고 아프게. "너는 버텨낼 수 있는가?" 마주하는 듯하면서도 점점 거칠어지는 피아노. 얇게 울리는 바이올린의 이야기와 대답하는 피아노의 소리가 마구 교차한다. 가볍게 울리는 현과 둔탁한 건반 소리가 가라앉으며 조용해진다.
2악장
이제 싸움이 끝난 듯, 동시에 갈라져 두 갈래로 피어낸다. 하나는 아래로, 하나는 위로 휘날리며 소리를 만든다. 엮이려다, 엮이지 않는 듯한 그 흐름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템포로 시작된 이후 끊임없이 이어진다. 종결 없이 아주 작은 소리로, 부드럽게 사라지지 않고 계속 이어진다.. 예고 없이 커졌다가 작아졌다가.. 다시 사라질 듯 하다가... 피아노는 바이올린이 피어날 수 있도록 계단을 만들어 주고, 바이올린은 점점 더 높게 날아오른다.
점점 더 강하게, 높이 솟아 오르려는 바이올린. 그런데 떠나지 않고 그 곁에 머물며 시선을 맞춘다. 끝까지 이어지는 호흡, 현과 건반은 발을 맞추고 시선을 떼지 않으며 템포를 맞춘다. 또 한 번의 계단. 이번엔 신중하게, 분명히 짚어가며 올라온다. 잠깐의 흔들림 후, 동시에 터뜨린다. 뻗어 오르는 현의 소리, 밑에서 깊이 있게 받쳐주는 피아노. 날아오른 것이 높게, 아득하게 사라지는 그 순간을 바라보는. 이제 닿을 수 없이 멀리 사라진다.
3악장
또 다른 이야기. 피아노와 현이 대립하며 서로의 주장을 내세우고 싸운다. 피아노가 달려가면 바이올린은 위아래로 찔러댄다. 짧은 순간에 피아노가 소리치면, 바이올린도 이에 질세라 소리친다. 세 번의 갈등. 현의 간절한 염원이 담긴 외침을 피아노는 그저 듣고 있다. '직선'으로 바로 뻗지 않는 소리. 아주 잠깐의 머뭄으로 간절함을 표현한다. 바로 뻗지 않았기에 처연함이 더해진다. 피아노와 바이올린은 짧게 대답하며 하나는 달리고, 하나는 찌른다. 타협의 여지가 없는 대립이 이어진다. 또 한 번의 엇갈림 속 끝을 향해 달려간다.
4악장
여유를 가지는 피아노와 달리 바이올린이 갈수록 점점 짧고 신경질적으로 변한다. 피아노의 선율이 달래려 하지만 멈추지 않는다. 점점 더 강하게 신경질을 부리며 다른 이야기를 한다. 그러다가 이내 '선명'하게 흐름에 맞춰 타오르는 소리. 이젠 괜찮을까? 여전히다. 피아노의 호흡을 따르면서도, 다시 참을 수 없는 신경질이 치고 들어온다. 하지만 이번엔 조금 자제된 톤으로, 속도는 여전히 빠르다.
피아노는 바이올린을 감싸며 흐름을 잡아 당기려 한다. 바이올린은 고함을 지르며 안 된다고 외치지만, 피아노는 그 소리에 맞먹으며 흐름을 잡으려 한다. 계속해서 발버둥치는 두 사람. 결국 바이올린은 조금씩 가라앉으며 차분해지고, 이제는 피아노와 호흡하며 내려앉는다. 조금씩, 천천히, 고요히...
POULENC SONATA FOR VIOLIN AND PIANO, FP.119
마음을 남기기 전에, 무엇을 느꼈는지 떠올려보자. 사실 이 곡은 내가 가장 기대했던 곡이다. 아침 8시 30분, 노란 햇빛이 도로 위에 내리쬐는 그 길목에 내가 발을 내딛는 순간, 이 곡의 2악장이 울려오면 그만큼 행복할 수 없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애정했던 그 '부분'이 어떻게 해석될지 궁금했다. 나는 이 곡에서 느껴지는 특유의 '서정성'을 굉장히 아름답게 바라봤다. 그 아름다운 음악을 들을 때마다 둥둥 뜨는 행복한 느낌을 받았었는데, 임동민 바이올리니스트의 풀랑크는 너무나도 '처연'했다. 그 서슬퍼런 기운이 예고 없이 다가와 당황스러울 지경이었다. 그 깊게 짚어 내려오고, 예리하게 찔러오는 소리가 이 곡을 이렇게 '처연'하게 표현할 줄은 생각 못했다. (진부한 거 안 하신다더니... 성공하셨어요.) 그 정도로, 아직도 친해지지 못한 바르톡보다 더 낯설게 느껴졌다. 인터미션 동안 친구와 로비를 거닐며 갑자기 만난 깊은 소용돌이에 애써 마음을 다독여야 했다.
1악장
시작부터 도입부의 세밀하게 쪼개진 소리가 귓청을 때린다. 내가 흐름을 따라갈 틈도 없이, 먼저 앞서 나가는 바이올린과 능숙하게 따라오는 피아노. (너무한 거 아니에요?) 나는 멍하니 바라보다 정신을 차리려 한다. 기다릴 틈도 없이 진행되는 흐름. 위아래로 찔러대는 소리가 귀를 찔러댄다. 이 속도감, 뭐지? 난 지금 어안이 벙벙하다. 순식간에 튕겨오고, 그 아래에서 달려가는 두 사람. (나 좀 기다려!!)
예고 없이 예쁜 소리를 내어내는 바이올린. 방심할 틈도 없이 또 앞질러 나간다. 그 후 멈춰서더니 재즈처럼 늘이기를 하듯 갈고리 같은 선을 부드럽게 그어낸다. 또 사라지지 않고 강약 조절하는 바이올린. "들려? 놀랐어?" 하며 기다려주는 그 모습이 웃음을 자아낸다. (중성마녀 같다) 마음을 놓으려는 찰나, 서서히 강해지고 빨라지는 흐름. 일순간에 휙 도약하는 현의 소리. 다시 내려와 전진한다. 반복하는 피아노의 소리. 흐름을 맞추는 듯 작아졌다가 다시 크게 도약한다.
자꾸만 농락당하는 느낌, 끌려가는 느낌. 빈번하게 현을 그어대다 멈추는 순간, 잠시의 침묵. 갑자기 차분하게 짚어내며 휙 치고 빠지기를 반복하는 바이올린. 밀당하듯, 갑자기 길게 늘이고 다가가며, 소리가 장난치듯 진심을 담아 나를 뒤흔든다. 넓게 뒤로 갔다가 서서히 다가오고, 깊게 짚어줄 듯 넓게 공명하려는 듯 하다가, 그 판을 깔아주는 피아노의 아름다운 소리. 서서히 강해지는 바이올린. 흐느끼는 듯 깊게 아리아하는 바이올린. 가성이 아닌 진성으로 노래하는 소프라노의 모습이 떠오른다. 다시 한 번 달려 나가는 두 사람. (진짜 못 따라가겠다) 순식간에 확 피어내고, 풀어내고, 흘러가고, 아름다워지고, 바이올린이 튕겨내면 피아노는 전진한다. 같이 짙어졌다가, 머물렀다가, 짚어냈다가, 튕겨낸다.
2악장
피아노가 서두를 이끈다. 바이올린이 작게 튕겨내며 아까의 느낌을 가지고 흐름을 이어간다. 고무줄처럼 늘였다 줄였다 하는 그 느낌. 또 한 번 튕겨내는 바이올린. 피아노의 흐름에서 하프처럼 튕겨내듯 작게, 그러다 다시 고무줄을 집어든다. 지체되지 않고 분명히 짚어내는 그 음들이 귓가에 박힌다. 다시 홀로 노래하는 피아노. 다시 끼어드는 바이올린. 서서히 고조될 듯 사라져가는 피아노. 아득하게 노래하는 바이올린. 바이올린이 높게, 피아노가 낮게 서로의 위치에서 각자의 노래를 한다. 바이올린이 아득하게 펼쳐내면 피아노는 그 아래를 짚어준다. 서로의 위치에서 하나의 흐름을 만들어내는 두 사람. 각자의 역할을 충실히 임하며 흐름을 탄다. 조금은 더 강하게 소리 내는 바이올린. 기다림, 적당한 이끌림, 멀어짐, 그러다 다가오는 내 염원의 순간.
일순간에 현의 소리가 네 갈래로 그어져 버린다. 피아노가 그 밑을 깔아준다. 잠시의 딜레이와 펼쳐지는 그 흐름. 그 갈래에 나는 마음이 쿵쿵 두드려진다. 충분히 느낄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이 흐름. 높게 소리 내다 더 높은 위치에서 노래해주는 현. 기꺼 기다려주며 내가 그 음을 느낄 수 있도록. 그 음이 귓가에 남을 수 있도록. 조금 더 선명하고, 강하게, 강렬하게 박혀오는 소리들. 소리가 함께 만난다. 하나가 되는 순간, 피아노가 이어가고, 다시 바이올린이 이어받아 여운을 남긴다. 다시 피아노의 이야기. 튕겨내는 바이올린. 말을 얹으며, 아래로 가라앉아 노래하는 바이올린. 피아노와 닿을 듯 멀어질 듯 왈츠를 추듯 음이 펼쳐진다. 여지를 주지 않으나 놀랍도록 가까이 다가오는 소리가 사라질 것처럼 하다가, 아주 짧은 눈맞춤과 함께 소멸된다.
3악장
또 기다려주지 않는다. 나는 멍하니 먼저 달려가는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바라본다. 이제는 방관자가 되어, 따라가기를 포기하고 그 흐름에 마음을 담는다. 순식간에 휘몰아치며 엮어내는 현과 건반. 닿지 않을 것처럼 하더니 계속해서 소용돌이치는 두 소리. 젓가락 행진곡처럼 딱 맞는 호흡. 피아노가 또랑또랑 하면 바이올린이 높게 치고 빠진다. 바이올린이 참 성격 있다. 신이 나서 춤을 추면, 피아노가 반주를 해준다. 신이 난 자를 누가 말리겠나. 또 잽싸게 나가 버리고 사라져버리는데 (어이없다) 참새처럼 짹짹이는 것보다 더 빠른 흐름으로 찔러오는 틈새를 지나 소리가 튕겨지고 난리가 났다. 정신도 못차렸는데, 소리는 예뻐졌다가, 새소리가 들렸다가, 빨라졌다가, 짙어졌다가, 갑자기 화음이 범벅된 소리가 가격해온다.
쿵. 내려치는 피아노와 이에 질세라 날카롭게 내려오는 바이올린. 몇 번을 찍어내더니, 피아노가 맞대응하니까 바이올린은 차분하지만 날카롭게 아리아를 한다. 그러다가 갑자기 사이가 좋아진 두 사람. (어이없네)... 은근히 긴장감을 조성하는 소리들.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강해지는 소리. 왈츠처럼 발을 맞춘다. 분명했다가, 아닌 듯했다가, 템포를 맞추는데. 둘 다 참 강렬하다. 누구 하나 성질을 죽이지 않는다. 바이올린은 더 강해지고, 더 짙어지다가 놓치지 않다가... 머물러 있더니... 일순간의 날숨과 함께 종결되며 작은 소리로 사람을 안심시킨다. 피아노가 어깨를 흠칫하게 만들며, 바이올린과 엇갈린다. 소리를 잔뜩 긁어내어 일순간 그 공간에 잔향이 길게 머문다. 얇게 소멸하는 그 소리가, 침묵 속에서 길게 길게 머물다 고요히 조금씩 사라져가며 곡이 끝이 난다. 정말... 풀랑크다.
SAARIAHO: NOCTURNE FOR SOLO VIOLIN
감상을 위해 특별한 지식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음색, 리듬 등 각 요소에 치중된 작품이기 때문에, 느끼는 바가 사람마다 다를 텐데, 그저 그대로 받아들이면 좋을 것 같다. - 임동민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받아들였는가? 사실 이 곡은 레파토리를 예습하면서 가장 직관적으로 강렬하고, 특색 있다고 느꼈던 곡이었다. 전형성에서 벗어나, 그 흐름이 존재할 수 있는 근원적인 소리에 집중한 클래식? 그게 또 녹턴? (제목도 알고, 딱 들으면 모두가 다 아는 그 곡인가 싶겠지만 아니다.)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누구누구의 녹턴이다라고 명명하는 것만으로도 흥미롭지 않은가?
그렇다면 (내가 아는) 임동민 바이올리니스트의 첫 번째 녹턴은 무엇일까? 아, 무려 사리아호다. (정말! 내가 못 살겠다!) 그의 연주나 해석을 특정 지을 수 없게, 어떤 스타일이라도 확정적인 편향된 생각을 가질 수 없게, 소리의 근원을 탐구하는 쪽을 택하셨다. 난 또 미지의 세계에 던져졌다. (;;;)
오히려 좋다. 해석할 여지도, 판단할 필요도 없이 그저 정말 듣기만 하면 된다. 이게 바로 진정한 녹턴이 아닐까. 깊기도 하다. 녹턴의 뜻이 무엇인가? 밤에 어울리는 야행성의 곡이다. 우리의 밤이 매번 가장 유명한 녹턴처럼 부드럽고 잔잔했는가? 아니다. 오히려 그 무섭도록 가득한 침묵 안에서, 우리는 찢어버리고 싶을 만큼 시끄럽다. 과거와 현재, 미래가 뒤섞인 번뇌와 고민이 우리를 휘감고, 잡념들이 잠들기를 거부한다. 그 잡념을 잔잔한 선율에 맡기기엔 너무 날것이고 지나치게 신경질적이라 쉽게 잡히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 근원을 냉정할 만큼 도려내야 한다. 내 생각보다 더 무섭고 차가운 것으로 찢어내버려야 한다. 그 역할을 이 곡이 해낸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무서운, 더 잔인한 소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시키며, 내가 하는 모든 것의 무형성을 일깨운다. 그저 소리의 존재 여부를 확인시켜주는 행위로서, 나는 이 곡이 '녹턴'이라는 것에 동의한다. 너의 잡념이 얼마나 가치 없는지, 너는 그저 인간답게 잠에 들라는 일침을 가하는 이 곡이.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야상곡이 아닐까. 이 흐름에 따라 내 숨이 내찢겨 지다보면, 어느새 아침이 올 것이다.
작은 들이쉼과 뻗어오는 직선, 하지만 야나체크와는 다르다. 야나체크가 조금 더 밀도 있고 분명한 아랫선이었다면, 이 선은 보이지 않는 안개 속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며 뻗어나가다가 다시 자취를 감춘다. 잠깐의 울렁이는 공기의 박동, 불규칙적인 파동이 삐걱거리며 공기를 두드린다. 익숙하지 않다. 또 다른 기울어진 소리, 옆으로 파고드는 넓게 펼쳐지는 영역, 또 사라졌다. 이번엔 마구 파고들어 귀를 찢어내고, 날카롭게 소멸하며, 그 파동들이 하나로 엮여 나를 찔러온다.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알 수 없는 혼란스러운 침잠하는 기분. 조용히 치솟다가 나만 두고 사라지는 흐느끼는 파동의 소리. 사정없이 복잡한 마음이 결로 나를 파고들어오는 둥근 선이 계속해서 움직이고 진동하며 물들여온다. 멀어지는 듯 물러났다. 서서히 얇아지는 소리. 퉁. 두드렸다. 더, 더 멀어졌다. 또 다시 두드려 나를 건드린다. 서서히 소멸하는 듯 마지막 여운의 두드림과 함께 찢어지는 공기의 흐름, 그 찢겨진 것의 흩날림과 이별. 아, 또 나만 남았다.
BARTOK: VIOLIN SONATA NO.1 IN C-SHARP MINOR, SZ.75
언제 처음 이 곡을 만났더라. 기억이 잘 안 난다. 한창 이자이에 머릿속이 버무려져 있을 때쯤 새롭게 나타난 레파토리의 마지막 장식이었다.
신이 난 상태로 제목을 음원 검색창에 붙여넣기 한다. 1악장부터 3악장까지 쭉 담아 놓고, 가벼운 마음으로 재생버튼을 누른다. 내 귀에 일반성을 어째 허락하지 않으시는 이 흐름과 그동안 들어왔던 귀가 있으니까 안심하고 들으려 했는데... (어리석었다) 갑자기 그냥 꿀렁거리면서 울렁거리며 시작하는 피아노와 바이올린. 혼자 내질러 나가버리는 1악장. 무슨 흐름인지 알다가도 모를 (배경 설명도 모르니까) 것이 10분 이상 지속된다. (!!!) 일단 들어보자 하는 맘으로 버텨봤지만 역시나 "헉!". 이튿날 다시 들어봤다. 다시 "헉!" 일주일 있다 들어봐도 "헉!" 배경 설명을 찾을 생각도 못하고 그냥 냅다 들었다. 이자이도 그렇게 친해졌으니까. 근데 공연이 며칠 안 남은 시점에도 이상하게 친해지기 어려웠다. 내가 그 곡의 탄생 배경이나 이렇게 음이 배치된 이유를 알고자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도저히 안 되겠어서 C랑 같이 악장을 들어보며 친해지면서 이 곡이 특유의 헝가리 민속적 요소가 가미된 곡인 것을 알았다. 걔가 말하는 게 진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이 곡과 정식으로 인사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왜 그런 요동침이 있었는지, 2악장은 왜 그렇게 아프고 길게 소리쳤는지, 3악장은 왜 그렇게 뒤흔들었는지. 존재의 이유를 알고 나니 후미에는 가장 기대했던 풀랑크보다 바르톡이 더 친근하게만 느껴졌다. 그리고 난해한 곡을 좋아하는 연주가를 좋아하는 내가 바르톡과 친하지 않으면 되겠는가? 하는 생각을 가지고 열심히 그 근처를 뱅뱅 멤돌았다. (친해지려고 오전에 더 어려워 보이는 현대 미술까지 보고 왔다. 피에르 위그의 얼굴 없는 인간이 보여주는 좌절 어린 걸음걸이를 보고 나니, 바르톡의 곡은 너무 발랄했다. 효과가 있어서 기쁘다. 정말!)
이미 살짝은 알고는 있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본인께도 물음을 던졌다. 어느 파트가 가장 재밌었는지. 혹시 모르니까! 여러모로 정신없던 와중이었지만, 역시나 바르톡이 재미가 있었다는 답변을 들을 수 있었다. 바르톡. 바르톡. 아직 이 곡으로만 만나 뵈어 어떤 분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토록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가장 솔직하게 자신의 내면과 감정을 드러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야나체크나 풀랑크 모두 자신의 내면을 서정적인 선율에 담아냈지만, 바르톡만큼 솔직하게 그 안을 드러냈는가? 하면 나는 바르톡이 조금 더 솔직하지 않았나 싶다. 그래서 어찌 보면 더 정이 간다. 사람은 누군가의 앞에선 어찌됐든 거짓된 모습을 보일 때가 있다. 순수하게 내 본심을 보이거나, 무언가를 내던졌을 때 무엇이 돌아올지 모르기 때문에. 그런 와중에도 그냥 날것을 드러내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을 본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보다 깊게, 천천히, 아프게 읽어보고 싶었다.
1악장
이미 고저가 매우 출렁이는 상태로 시작한다. 고조된 감정선 중간에서부터 몰아쳐 들어오는 피아노. 울렁이는 틈에 바이올린이 또 다른 소리를 지닌 채 동시에 쳐들어온다. 열린 문 안으로 피아노와 바이올린이 일방향적으로 쏟아져 내려 온다. 쭉쭉 뻗어내는 짧은 것들이 삐걱거리며, 뒤뚱거리며, 마구잡이로 순서를 지키지 않은 채 다가온다. 시선을 치켜 드는데. 밑바탕을 까는 피아노 소리. 힐끗거리는 바이올린. 사위를 살피는 시선. 주위를 둥글게, 넓게 넓게 살피는 현의 소리. 영역을 빠르게 점령해 나간다.
어느 정도 살펴본 듯. 눈을 내리까는 모습. 고갯짓을 위아래로 끄덕끄덕이며 한 곳을 응시하기 시작하더니, 이내 맹렬히 다가가는. 그 흐름이 반복적으로 이어진다. 빠르게 치켜들고 계속해서 진동하는 그 짧은 흐름이 몇 번씩이나 찾아온다. 잠깐의 차분한 이어짐. 귀를 어딘가로 귀 기울이는데. 아까보다 넓고 천천히 파동치더니 불현듯 치켜세운다.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넓게.. 넓게.. 고요히 바닥에 가라앉아 내려까는 위협. 쉼없이, 사라짐 없이 이어진다. 나뭇잎의 검은 그림자처럼 소리 없이 흩날린다. 똑딱이는 피아노. 다시 진동하는 현. 얇고 가냘픈 듯 하지만, 잃지 않는 분명한 질감. 똑딱이는 피아노. 또 다시 나부끼는 바이올린.
그리도 바람이 세찬가? 이제는 옆으로. 대각선으로 보일 듯 말 듯 사라질 듯 사라지지 않게 소리 친다. 존재를 잊지 않으려는 피아노의 발걸음 소리. 그 곁을 빙글 멤돌며 움직이는 불편한 소리들. 그리고 잠시 아주 잠시 더 멀어졌다 아주 서서히 다가오며 바닥을 적셔오는 얇은 '무언가'. 순식간에 위로 치켜 올라와 파동치다, 찔러내더니 내려 앉아버리는. 아주 옅은 바람에 까닥이며 이제는 분명히 주장한다. 내가 여기 있음을. 위로 또 아래로. 아주 날카롭게 찍고 내려오는. 예기할 수 없이 순식간에 홀로 속도감을 붙여온다. 강하게 밀착해 오는 감정선. 집착적이다. 광기에 어지러버린 채 온 회색빛 공간을 점령하는 검보라색의 물감. 젖어 들지 않은 데까지 까맣게 물들이려는 심산이다.
다가온다. 이제는 내 발치까지 점점 더. 그 흐름이 피아노를 타고 점점 내 발목을 타고 올라온다. 비웃는 바이올린. 무릎까지 차오른다. 그저 바라만 보며 내 주위를 나부끼는 현. 흥미로운 시선을 던지다, 짧고 높게 손을 휘젓다가 천천히 리듬을 타고 올라오는 듯 순식간에 높이 올라와 천장 아래에서 흐르고 흐르고 흐르는. 끝을 보이지 않는 그 소리. 단 한 번도 사라진 적이 없는. 작게라도 존재하는. 점점 다시 삐걱거리는 소리. 빨라진다. 더 빠르게 삐걱거린다. 더 높게 차오르는 물감. 맹렬한 속도로 나를 잠식시킨다. 더 빠르게 움직이라고 재촉하는 듯 저주를 퍼붓는 바이올린. 더 빨리. 더. 더. 더. 더. 더. 더. 끝내 코와 입으로 차올라와 숨을 막아버린다. 그 물감에 잠식 된 머리 위로 둥둥 떠다니며 유영하는 현. 한껏 비웃고 있지만 연민하는 '척' 하는 소리. 가식적이다. 어떻하니? 어떻하니? 입가에 손을 올린 채 웃음을 지워내며 휘젓는 위로의 손짓. 살풀이를 하듯 공간을 둥글게 멤돌다 홀연히 소멸해버린다. 또 나만 두고.
2악장
이명을 닮은 소리가 사람의 목소리를 따라 해보려는 듯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드러낸다. 이래도 되나 싶은지 망설이는 듯 주춤하며 뒤를 돌아본다. 남은 건 없다. 결국 다시 뒤돌아 정면을 향해 조금씩 드높이는 소리. 내가 이래도 될까요? 그 물음에 피아노가 말없이 답한다. 대답을 느껴낸 현. 가냘프고 긴 흐름을 타고 긴 선을 뽑아낸다. 아직까진 흔들린다. 세 번의 주춤. 그러다 멈춰 서서. 긴 그림자가 보인다. 티내지 않았다 생각했는데 새카만 것이 너무나도 길다. 눈을 질끈 감은 채, 목이 메여온다. 들려오는 그 소리가 아득하다. 다시 피아노의 대답. 괜찮다. 조금은 확신을 얻은. 이전보다는 자신감을 얻어낸. 보다 선명해진. 숨을 고르다 뻗어내는 차분한 선. 깊이 짚어내기 시작하는. 빠르지 않아도 괜찮다.
흝어내는 감각. 집중하는 시선. 얇은 숨소리. 피아노의 기다림. 두드리기 시작하는 바이올린. 서서히 강해지는 강도. 때려오는 느낌이 아주 조금씩 거세진다. 거칠어진다. 짙어진다. 울퉁불퉁한 벽을 긁는다. 어느새 자리를 잡아선 소리. 이제는 흔들어보기도 한다. 흐름에 타오른다. 마구 돌아다닌다. 주체할 수 없는 속도. 갑작스레 갈라지는 모양새. 또 사라질 듯 아득해졌다가 다시 두드린다. 찢어진 채로. 긁혀낸다. 가라앉아서. 긁어낸 것을 만져본다. 긁힌 손에 흐르는 핏 방울. 툭툭 떨어지는 소리를 나타내는 피아노. 그 방울들을 바라보는 광기 어린 시선이 박혀온다. 멀리서 들리는 또 다른 이명의 소리에 뒤로 시선을 던지면, 말려오는 듯한 느낌이다.
이미 늦었음을 감지하는 바이올린. 손가락을 벽 위에 얹어 흐름을 그려낸다. 부드럽게 그어지는 검붉은 선이 만연하다. 장미를 닮은 모양새다. 같이 바라봐주는 피아노. 바닥에 내려앉아 높고 또 낮게 음미하는 소리. 자기가 하고 싶은 얘기가 슬슬 나타난다. 조금씩 아주 작게. 아득하기도 하다. 평범한 바램 같기도 하다. 아주 작은 소망이다. 비웃을 수 없는 간절한 무언가다. 이젠 바닥에 머리를 맡대어 본다. 차가운 기운이 닿아온 곳에 서려온다. 눈을 서서히 감아낸다. 고요하다.
3악장
한순간에 현실 밖으로 끌어당겨져 맨땅에 확 놓여진다. 그 맨땅에 디딛기 매섭게 치고 나가는 바이올린과 피아노. 둔탁한 소리들이 마구 뒤섞인다. 무거운 발걸음과 빨라지는 손짓이 재빠르다.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없이 그저 달려나가버린다. 멈출 수 없는 흐름 속에서 발을 높게 띄우며 전진하는 모양새. 통통 튀겨대는 발. 여기서 가벼울 수도 있구나. 트렘펄린을 타듯 바이올린은 무거운 피아노 위를 뛰어오른다. 그러다 물웅덩이를 마구 휘젓는다. 더 세차게. 빠르게.
물방울이 사방에 퍼진다. 수면 위에 퍼져나가는 것들. 길을 내어주는 피아노. 그 뒤를 마구 짓밟는 바이올린. 마구 짓밟으며 길을 따르다. 우뚝 멈춰 서는데. 절벽임을 일러주는 피아노. 방법이 없다. 단순해진 바이올린. 뚱땅거리는 피아노를 내버려둔 채 혼자 뛰어내려버린다. 바람을 역행하여 끊임없이 하강하는 바이올린과 피아노. 그 속도가 매우 빠르다.
내딛는 피아노. 다시 또 앞질러 간다. 뒤쫓아 가는 바이올린. 잡아채 마구 찢겨낸다. 길게 또 길게. 어기적거리는 피아노. 잃어버린 무언가. 광기 어린 채 가볍게 리듬을 타는 바이올린. 온 손에 피를 묻힌 채 맞잡은 두 손. 홀로 추는 춤. 말릴 수 없는. 부추기는 피아노. 자기 자신마저 찢어내는 두 번의 손짓. 흩날리는 피아노와 바이올린. 마지막 하나. 없는 손 팔로 흔들어대는 소리. 눈만 깜빡이는 모양새. 스스로 찢겨낸 것을 흥미롭게 지켜본다. 흩날리는 것이 마구 춤을 춘다. 최후의 발악이다. 점점 더 빨라진다. 미쳐가는 모양새. 뭘 위해서 이렇게까지 하는가?
정체를 알 수 없는 흐름의 연속.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스스로를 더 갉아먹어버리는 내면으로 파고드는 칼날과 비수들. 사정없이 날아들어와 누구도 말릴 수 없다. 모든 게 사라지고 나서야 멈춰 선 피아노. 정신 차린 바이올린. 장난스레 스스로를 둘러보는 만신창이. 푸흡거리며 웃음을 터뜨리다가, 광기어리게 웃는다. 마지막 발악을 펼쳐낸다. 신이 난 모습이다. 마지막을 그려내는 피아노와 바이올린. 선명하게 마무리하며 자취를 감춘다.
ENCORE
이지 리스닝이다. (오예) 아, 어려운 거 잔뜩 듣고 나서 이렇게 따뜻한 곡을 들으니까.. 좋긴 하다! 약간 폭설이 잔뜩 내려온 길목을 자박자박 부츠로 걸어오다 벽난로가 있는 통나무집에 들어온 기분. 빨갛게 익어버린 손을 타닥이는 불 앞에 놓고, 따듯한 온기에 깊게 숨을 내뱉어 보는 기분. (핫초코도 건네받았다. 마음으로.)
F. POULENC: LES CHEMINS DE L‘AMOUR
피아노가 "놀랐지.." 하며 다 안다는 식으로 내려와준다. 바이올린은 아주 높게 또 낮게 날지 않고 그 중간 언저리에서 부드럽게 머물러 놀란 마음을 살펴준다. 지나온 시간을 감싸려는 마음이 보인다. 그럼에도 충분히 울려주고, 기다려주는 건 여전하다. 한 음이 놓여질 때마다 작은 미세한 파동이 보인다. 이 부드러운 흐름이 좋다. (정형적인 것도 좋긴 해!) 마음이 안정적인 기분이다. 내가 그냥 눈을 감고 듣기만 하면 되는 길목이다. 하늘빛의 바람이다. 약간의 오렌지색도 섞여 있다. 진짜 감정의 고저가 안정적이다. 오늘 했던 곡이 모두 정말 많이 깊었는데, 이 소리가 나를 진정시킨다. 살짝 위안도 되는 것 같고. 다독이는 것 같기도 하고. 끝까지 머무르다 결국엔 사그라진 바이올린 소리가 살짝 그립다.
솔직히! 앵콜은 무슨 곡을 해주실까 여러 가지 추측을 했었다. 다만 이미 했던 건 잘 안 해주는 느낌이었으니까 새로운 곡을 해주시겠다 하면서도 일정이 그렇게나 바빴고, 새로 음반도 내셨는데 '사랑의 인사' 해주시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30% 정도 했다. (왜 이렇게 낮은 기대치냐면 너무 뻔하니까 안 해주실 것 같았다;) 근데, 알고 보니 첫 번째 앵콜의 제목이 '사랑의 길'이었다. (허참내. 인사는 안 해줘도 길은 찾아주신다) 마침 또 풀랑크의 곡이구나. (하콘 때 스트라빈스키가 생각난다) 이렇게 다정한 곡이 또 있었구나 알게 된다.
M. PONCE: ESTRELLITA
작은 별! 내가 아는 작은 별은 동요뿐이다. (반짝반짝 그거) 그래서 이번에 이 곡을 처음 들어보는 거라 다른 버전은 어떨까 싶어서 그대로 제목을 복사해서 가장 먼저 뜨는 것들을 검색해 봤다가 깜짝 놀랐다. 내가 들었던 소리랑 너무 느낌이 다르다! 어떤 것은 특유의 간드러짐, 연륜, 여유가 미묘하지만 강하게 느껴지고, 아주 살짝 얇은 참기름이 발려진 느낌, 어떤 것은 약간 닭살이 올라오는 달콤함이, 어떤 것은 또 재즈 느낌의 스윙이 느껴지는. 오글거리는 것은, 간지러운 것을 못 참는 나로서는, 시작을 상당히 담백한 마음으로 담아낸 버전으로 들어버린 나로서는, 역시나 제자리로 돌아오게 된다.
마냥 다정하지 않은 느낌으로 곧게 뻗어오는 직선. 그 직선이 보여주는 따뜻한 빛을 그저 띄워 놓고 있는. 그 소리가 좋다. 참 신기한 게 날 한껏 째려보고 있는 것 같은데 왜 다정하지? (???)
별이 꼭 꼭지점이 5개가 있는 그 모양일 필요는 없다. 뻗어오는 그 '선' 자체가 하나의 별이다. 그 자체로 길고 넓게 빛을 내어주는 것. 길을 내어주는 것. 그 자체가 이미 또 하나의 별이다. 아, '이정표'겠다. 별을 찾으러 온 누군가에게 별의 방향을 말없이 일러주는 '무언가'. 눈을 맞춰주진 않아도, 별다른 표현은 없어도, 그 선이 내가 닿고자 하는 곳을 일러주는 기분. 천천히 걸음을 내딛다 저 멀리 보이는 것이 있다. 눈이 아득할 만큼 강한 빛은 아니더라도 그 존재만으로 생각에 잠기게 하는 무언가.
길을 잃지 않도록 시리도록 선명하게 짚어주는 '선'의 소리. 한 번은 웃어주지. 장난스런 생각도 들고. 끝자락에 펼쳐지는 네 갈래와 피아노의 두근거림. 그렇게 또 사라져버린다. 또 나만 남았다. 이번 공연은 참 여러 번 남겨진다. 하지만 끝은 미소다.
행복의 기운으로! 안녕!
끝내며,
C:
예상했던 곡이 아니었지? 하지만 제목부터가 너무 기가 막혀. 너는 ‘Salut’를 살짝 기대했지만, 대신 ‘Chemins’을 받았어. 너무 뻔한 선택은 하지 않는 그 바이올리니스트의 성향이 여기서도 드러나. 그런데 이게 더 적절한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어. 왜냐하면, ‘인사’는 순간의 감정이지만, ‘길’은 여정이거든. 이 공연이 끝나도, 이 감정이 끝나도, 이 음악과의 관계는 끝나지 않아. 바이올리니스트가 ‘인사’를 건네는 대신 ‘길’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이 앵콜이 공연의 감정을 가볍게 닫아주는 게 아니라, 공연 후에도 계속 생각이 남을 무언가를 남긴 것 같아.
마음이 어느정도 정돈된 것 같다. 기쁜 건 바르톡을 이렇게 듣고 나니, 이제 그 흐름이 조금 더 익숙해졌다.(공연은 끝났지만 내 청취 시간은 아직 이어지고 있다) 이 시점에서 다시 한번 물음을 던져보면 좋을 것 같다. 나는 이 글을 왜 쓰려고 할까? (...) 그냥, 재밌으니까. 내가 그 하루를 특별하다고 생각했으니까. 그 값어치를 내보이기로 택했으니까. 당신은 이 공연의 부제를 아는가? A NEW CHAPTER 이다.
고전 시대, 낭만 시대와 같은 큰 틀이 잡혀 있는 시대에서 넘어와 인상주의 등 다양한 사조가 등장하는 시기여서 새로운 장이 열린다는 느낌이 있어요. - 임동민
그렇다면, 나는 새로운 장을 열었는가?
C에게 다시 물어보자.
네가 ‘새로운 장을 열었냐’고 묻는다면, 그 답은 YES. 너는 이번 공연을 통해 음악과 네 자신을 다시 바라보게 됐고, 그 결과물이 바로 이 글이야. 그냥 듣고 지나가는 게 아니라, 네 삶 속에서 살아남아 기록되고, 다시 떠올려지는 것이 됐어. 그게 바로 A NEW CHAPTER. 그 장(章)을 열어버린 건 바로 너야.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