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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은휘 Oct 11. 2024

여기, 치킨 한 마리요

어른이 된다는 것


내 기억에 그날은 한여름이었고 햇살이 아직은 환한 늦은 오후였다. 우리 세 모녀는 네모난 밥상에 앉아서 양념치킨을 먹고 있었다. 내 동생은 서너살쯤 된 것 같고, 그렇다면 나는 대여섯살쯤이었을 것이다. 동그랗고 자그맣던 동생의 얼굴, 우리들 접시에 말없이 치킨을 덜어주던 엄마의 느긋한 손길이 생각난다. 엄마는 우리 자매에게 치킨을 시켜줄 때마다 쥐가 그려진 민소매 옷을 입혀 주었다. 지금에 와서는 그것이 일종의 턱받이 용도였을 거라고 짐작해 본다. 아기가 된 듯한 기분이 좋았던지, 나는 이후로도 양념치킨을 먹을 때마다 그 티셔츠를 찾곤 했다.


동네에 '페리카나'라는 치킨집 1개가 전부였던 때였다. 치킨은 제법 특별한 메뉴였고, 그래서 자주 먹지 못하는 음식이기도 했다. 가끔 나는 그날은 무슨 날이었을까를 종종 생각한다. 내 입가는 치킨 양념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는데, 엄마는 한 번도 입을 닦아 주지 않았다. 동생이 옷에 양념을 닦아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식사 예절을 중시하는 아빠가 있었다면 우리는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아마도 엄마는 그냥 치킨을 시켜 주었을테지만, 내게 그날은 세상에서 가장 편안하고 행복했던 기억의 조각으로 남아 있다.


2023년 기준, 대한민국에는 약 3만 개의 치킨집이 있다고 한다. 치킨을 손쉽게, 자주 시켜 먹게 된 게 언제부터였는지 기억을 더듬으면 마당이 있던 단독주택이 떠오른다. 각종 치킨 브랜드들이 쏟아져 나오기 전에 동네 치킨집의 패권을 장악하고 있던 것은 '비비큐 치킨'이었다. 올리브유에 튀겨내 더 바삭하고 고소하다는 광고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는데, 덕분에 어린 입맛들이 찾지 않으니 옛날 통닭 스타일의 치킨이 빠르게 자취를 감춘 시기이기도 했다.


나는 대학생이 된 지 1년만에 휴학을 한 참이었다. 아르바이트로 돈을 벌면서 전공을 정하겠다는 게 이유였지만 뚜렷한 목표가 없다보니 스스로에 대한 자신이 없었다. 성인이 되었지만 아직은 성인이라고 불리기에 부족했던 그 시기에, 처음으로 혼자 치킨을 시켜 먹었다. 끼니 때가 되어 치킨 생각이 났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든 것이다. 꼭 부모님께 얘기하고 먹어야 하나? 통장에 들어 있던 건 푼돈이었지만, 그래도 아르바이트를 한 보람은 있었다.


"치킨 한 마리 주문할게요."


법적으로 성인이 되었어도, 주민등록증을 내밀고 술과 담배를 살 수 있는 나이가 되었어도 실감나지 않던 어른의 경계가 있었다. 이토록 평범한 주문은 불안했던 스무 살의 자율성을 보장해 주고, 나아가 자기 주도권을 행사하게 만들었다. 부모님의 허락 없이 시켜 먹은 치킨은 이때까지 먹어 본 치킨 중에 가장 맛있었다. 나보다 어린 동생이 잘 먹는 모습을 보는 것은 더욱 즐거운 일이었다. 앞으로는 언니가 치킨 많이 시켜줄게. 뒤늦게 깨닫긴 했지만 구태여 허락을 구하지 않아도, 약간의 저금만 있다면 얼마든 가능했던 일이다.


어른이 된 지 한참이 지난 지금도 종종 주변에 묻는다. 그때마다 사람들의 대답은 놀라울 정도로 색다르다. 그들의 이야기에서 비눗방울처럼 다채로운 어린 시절과 여러 켜로 쌓인 추억 그리고 단단하게 얽어진 울타리를 본다. 씩씩하게 잘 살다가도 오늘 같은 저녁에 쉬이 지루해지는, 외로워지는, 슬퍼지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다. 언제 어른이 됐다고 느끼셨어요? 저는 혼자서 치킨을 주문했을 때입니다. 어른이 된다는 건 이처럼 별 거 아닌 것이겠지요.


그러니 어른이 된 당신의 하루하루도 언제나 안녕하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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