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금주일기
나는 모든 것에 장단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술’은 장단점이 명확하다. 아직까지도 나한테는 술의 장점 밖에 보이지 않지만 객관적으로 봤을 때 단점이 많다고들 하니.. 술의 수많은 장점 중 하나는 친구를 쉽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술을 못 마시면 친구를 못 만든다는 말은 아니다. 술을 좋아하고, 또 즐기면 친구를 만들기가 훨씬 빠르고 쉽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
때는 대학교 2학년. 교수님께 휴학하겠다고 말씀드린 뒤 며칠 지나지 않아서 연락이 왔다. 휴학하는 김에 일을 해보라는 소개의 전화였는데 회사 이름도 못 듣고 면접 장소와 날짜, 시간만 알고 갔다. 면접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지만 합격할 것 같지도 않았다. 내 전공을 살리는 일이긴 했지만 나는 너무 어렸고, 회사는 너무 큰 곳이었다. 아쉽지도 않은 며칠을 보낸 뒤 합격 연락이 왔다. 그때부터였나. 나는 면접에서 떨어진 적이 없다.
내가 일하게 된 곳은 인원이 적고 생긴지 얼마 안 된 팀이었다. ‘역시 나를 실험용 쥐로 합격시킨 거야!’ 싶었는데 지원도 잘 나오고 월급도 고작 이십대 초반한테 주는 월급치고는 높은 금액이었다. 우리 팀에는 나이가 좀 있으신 부장님, 팀장님, 그리고 선배 둘과 나 다섯이 전부였다. 소수의 인원이라 똘똘 뭉쳤고, 동시에 회식도 잦았다. 직업상 일주일에 한두 번은 꼭 외부에서 일을 진행했는데 나가는 날이 곧 회식날이었다. 어려서부터 술을 좋아했던 나는 팀이 그렇게 마음에 들었다. 특히 부장님은 술을 빼지 않는 나를 조금 이뻐라 해주셨는데 그게 지금까지 인연이 돼서 이어질 줄은 몰랐다.
일 년을 채우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옮기게 됐을 때 부장님이 유독 아쉬워하셨다. 나도 좋은 팀에 있고 싶었지만 옮기려는 곳이 내가 더 원하는 곳이었고, 쉽게 자리가 나는 곳이 아니라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당연히 회사를 옮겼으니 연락도 끊기겠지, 생각했지만 부장님은 꾸준히 연락하셨다. 내 생일이 다가오면 미리 연락해서 맛있는 음식과 함께 술을 사주셨고, 고민이 있을 때도 언제든 편하게 연락하라면서 한 잔씩 따라주셨다.
삼촌이 생긴 기분이었다. 물론 부장님의 나잇대가 좀 더 높지만 나에게 삼촌이 있다면 이런 기분이었겠구나 싶었다. 일과 관련된 고민뿐만 아니라 인생을 살아가면서의 고민도 들어주셨고 명쾌한 해답보다는 길을 알려주셨다. 내가 믿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어른 중에 한 분이었다.
그래서 생각했다. 만약 내가 술을 안 좋아했고, 그래서 회식도 멀리했으면 부장님과 이렇게 친하게 지낼 수 있었을까? 한 회사에서 10년을 일하기 쉽지 않은 세상인데, 술의 도움을 받아 10년이 훨씬 넘도록 인연을 이어갈 수 있었던 거다. (합리화를 잘하는 편이다.) 사실 최근 들어 부장님이 술을 줄이라고는 했다. 예전과는 몸이 다르니까 컨디션 조절을 하라고는 하시지만, 그런 말을 술을 따라주시면서 한다. “부장님. 말씀과 행동이 다르세요.” 하고 싶지만 이젠 더 이상 부장님도 아니고, 괜히 그러면 술을 줄이실까봐 마음으로만 내뱉었다.
금주가 끝난다면 또 다른 인연을 만들고 싶다. 왜 이렇게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걸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어린 나이도 아닌데 말이다. 그때는 나와 정반대의 사람이거나 아예 다른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을 만나보고 싶다. 예를 들어 바다에서 일하는 사람이거나 우주에 다녀와본 사람? 사실 상관없다. 술먹고 다음 날이면 반 정도는 까먹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