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 Lonesome I Could Cry - 유월 초의 동화
2023년 6월 9일 리나레스 - 트리아카스텔라 17.5km
거칠게 몰아치는 돌풍이 표홀히 흐르던 구름을 가끔씩 주렴처럼 좌우로 젖히면 푸르른 창공의 속살이 부끄러운 듯 살포시 내비치는 아침. 리나 도르 레이의 거실은 방풍복을 걸치며 출발 준비에 몰두하거나 공복을 해결하려는 투숙객들로 분주했다. 저마다 바쁜 순례자와 달리 나는 천천히 출발할 작정이었다. 누나는 오늘 택시로 이동하되 통증이 꽤 가라앉아 내일 사리아 구간을 같이 걷기로 했다.
남은 식재료를 쓸어 모아 스파게티를 요리했다. 면과 소스만 있으면 되거니와 셰프가 된 기분이 들어 뿌듯하게 면을 삶아 소스에 비벼냈다. 요즘들어 라면이 역하게 느껴진다. 삶은 면의 텁텁한 질감과 밀가루 냄새, 속에 부대끼는 자극적인 국물. 한국에서 전혀 느끼지 못한 미각이다. 까미노에서 소금, 후추 외에 조미료를 거의 쓰지 않은 고기와 샐러드를 많이 접한 탓일까? 입안에 물컹이는 감촉이 싫어 육식을 즐기지 않았는데 뒤늦게 고기 맛을 알았다. 귀국하면 라면을 끊되 정 면이 당기면 스파게티를 해먹자고 결심했다.
해발 1,200m 위로 바람이 매섭게 불었다. 잔뜩 낀 비구름 사이로 푸른 하늘이 얼굴을 내비췄다. 비바람에 홍진을 말끔히 씻어낸 초록색 대지가 생명어린 제 빛을 완연히 되찾았다. 거센 바람에 새들도 잠든 적요한 숲길. 흩날리는 비 속에서 수려한 산세를 감상하며 산 로케 언덕으로 향했다. 1,270m 높이의 산 로케 언덕에 순례자 동상이 외로이 서있다. 내 앞을 씩씩하게 걷던 할머니들이 동상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궂은 날에 인적마저 드문 게 걱정스러워 일다경 동안 티 안나게 뒤따르던 터였다. 두 분이 같이 서보라며 핸드폰을 건네받았다. 동상을 중심으로 구도를 바꿔 가며 몇 컷 찍어드렸다. 할머니가 나도 서보라 권유하셔서 기꺼이 기념사진을 남겼다.
모진 역풍에 상체를 앞으로 숙이고 고개를 기울인 채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한 손으로 모자를 잡은 순례자. 어떤 고난과 역경일지라도 이겨내려는 의지가 담긴 그의 발길은 머나먼 산티아고를 향해 있다. 오 세브레이로를 넘느라 지친 순례자들은 이 동상을 보고 힘을 냈을 것이다. 폰프리아Fonfria까지 가는 길에 오늘 따라 연세 지긋한 할머니들을 많이 만났다. 비바람 매섭고 을씨년스러운 날에 만난 할머니들 모두가 산 로케 언덕의 동상에서 힘을 얻으셨길 바랐다.
오스피탈 다 콘덴사Hospital da Condesa로 향하다 낯익은 할머니가 보였다. 그간 여러 차례 마주친 헝가리 할머니다. 여든이 넘은 연세에도 아직까지 건강하게 순례중이시다. 흐드러지게 핀 하얀 들꽃 사이를 씩씩하게 걷는 그녀의 모습이 감동적이다. 고단한 까미노에서 할머니가 기댈 존재는 무엇일까? 시련의 파도가 밀물처럼 몰려들고 절망의 늪이 사방을 가득 메워도 그녀의 곁을 지키는 고마운 존재. 그것은 소중한 가족 내지 사랑의 연인이거나 깊은 신앙일 것이다. Ben E. King의 Stand by me(121위)는 성직자 찰스 앨버트 틴들리가 만든 성가곡 풍의 노래다. 초기에는 가스펠처럼 불렸다고 한다. 솟구치는 감정이 절제된, 울림 가득한 목소리. 30대 초반에 애청하던 곡, 언제 들어도 위로를 받는다. 내 곁에만 있어주면 뭐든지 헤쳐나갈 수 있는 힘과 위안이 되는 당신. 정치적 격랑이 밀려올 우리 사회에도 곁에 있는 것만으로 용기를 줄 당신이 존재하길 기원해 본다.
창공을 가린 희뿌연 구름이 하얘질수록 하늘은 점차 파랗게 제 모습을 찾아가고 대지엔 생명의 빛이 차올랐다. 평소와 달리 아직 잠이 덜 깬 키다리 그림자의 음영이 도드라지지 않았다. 구름이 물러난 틈새로 태양이 부끄러운 햇살을 훤히 드러내고 산허리 벌판 위에 흐드러진 나무와 풀밭 위로 눈부신 광채를 쏟아냈다. 햇살은 치마폭에 얼굴을 묻은 새색시마냥 구름 속으로 숨어버리고 여우가 시집가는 듯 이슬비가 흩뿌리기를 반복했다.
노천명 시인은 ‘푸른 오월’의 시에서 밀물처럼 밀려드는 향수를 어찌할 수 없어 눈은 먼데 하늘을 본다 했지만 바람 따라 시시각각으로 화풍감우和風甘雨)와 담장농말淡粧濃抹이 그리는 유월의 동화 같은 풍경은 잃어버린 동심을 절로 일으켰다. 11살 마이클 잭슨이 The Jackson 5의 일원으로 부른 ‘I want you back(120위)’은 앳된 소년 시절 그의 순수한 동심이 엿보이는 곡이다. 경쾌한 베이스 리프와 미소년 마이클의 감미로운 미성이 일품이다. 이 곡으로 마이클은 US 싱글 차트 최연소 1위에 등극했고 ‘ABC’, ‘The love you save’, ‘I’ll be there’ 와 함께 잭슨 파이브는 네 곡 연속 싱글 차트 1위에 올랐다.
나도 모르게 시를 읊게 하는 경치와 시적인 가사가 어울렸다. '우는 얼굴을 감추려 구름 속에 숨어든 달로 인해 시간은 기어가듯 더디게 흐른다. 고요한 별똥별은 보랏빛 하늘에서 빛나는데 당신은 어디에 있나요? 나는 너무 외로워 울어요.' Hank Williams의 깊은 외로운 감정을 아름다운 시구로 표현한 감성적인 멜로디가 빛나는 명곡. ‘I’m so lonesome I could cry(111위)’다. 컨트리 음악의 정서적 깊이를 각인시키는 곡을 들으며 누나가 뭘하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어제는 우리 포함 여덟 명의 아세안들이 한 방을 썼다. 몰리나세카에서 만난 한국인 부부, 홍콩과 대만에서 온 젊은 여성 넷. 사흘 전 땡볕에 서로 기진맥진하다 바에서 만난 처자가 옆 침대를 배정받아 눈인사했다. 그날 별일 없었냐는 무언의 안부를 알아들은 듯 미소로 답했다. 빈 숙소에 혼자 남게 되어 조금 무서웠다는 누나. 홍콩에서 온 처자가 늦장을 부려 마음이 놓였단다. 10년 전 이화여대로 유학왔다는 그녀는 누나를 어머니라 부르며 여보야는 어디 갔냐고 물었단다. 한참 웃다가 남동생이라 알려주니 인상이 비슷하다며 우리 나이를 물어보는 붙임성을 자랑했다. 누나와 사진 한 장 찍고 먼저 길을 나섰는데 택시 타고 가다가 예쁘장하게 우산 쓴 그녀를 보자 무지 반가웠단다. 누나의 오전은 그렇게 천천히 흘러갔다.
낮게 깔린 구름을 벗 삼아 걷다가 폰프리아에 들어섰다. 사납기로 악명 높은 대형견 두 마리가 있다던 마을. 까친연 카페에 다른 순례자들에 묻어가거나 차라리 마을을 우회하라는 경험담이 많아 걱정되던 곳. 덩치 크고 건장한 순례자들을 기다릴까 주저하는데 때마침 프랑스 할머니 두 분이 걸음을 멈추고 얘기를 나눈다. 잘 됐다 싶어 할머니들 뒤에 바짝 붙었다. 바로 달려들 것처럼 컹컹 짖어대는 개들이 무서워 곁눈질도 못하고 바짝 쫄았다. 셋이 별 반응 없이 마을을 벗어나자 졸졸 따라붙다가 관심이 없어졌는지 되돌아갔다. 이로써 사나운 대형 견을 만나야 하는 세 고비 중 두 번을 무사히 통과했다. 우람한 남성이 아닌 연약한 할머니들의 위대한 도움으로.
James Brown은 ‘It’s a man’s man’s man’s world(123위)’에서 남성 우월주의가 팽배한 당시 사회 풍토를 다뤘다. 남성들이 자동차, 기차, 선박 등을 만든 업적과 남성 중심 사회를 강조했다. 고대 중동의 가부장적 사회를 답습한 것 같다. 고대에 정치와 종교의식은 남성의 전유물이었다. 여성은 출산과 육아 등 가사만 담당하며 상속에서 제외되었다. 구약과 유대교의 율법도 남성 위주였다. 제사장은 남자 몫이고 월경이 끝난 여성들은 정결의식을 수행해야 했다. 그러나 마지막 구절에서 노래가 극적으로 반전된다. 여자와 소녀가 없는 남자만의 세상은 결코 아무것도 아니라 일갈한다. 여성해방운동이 막 태동한 1960년대. 이 곡은 양성 평등을 성찰하려 했던 건 아니었을지.
피레네 산맥에 인접한 나바라 지방은 축산업이 유명해 목장이 많다. 산비탈 초지대마다 소와 말, 양 떼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어먹는다. 갈리시아 지방도 목축업이 성해 풀 먹이러 소떼를 몰고 가는 장면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목초지를 향해 목축견牧畜犬이 앞장서면 목동과 우두머리 소를 따라 소떼가 우르르 몰려간다. 순한 눈망울에 커다란 뿔이 위협적인 황소들이 떼 지어 가는 난생 처음 장관에 길섶으로 물러난 순례자들이 정신없이 셔터를 누르기 바쁘다.
다부진 체구의 남자 말고 나이 지긋한 아주머니나 젊은 처자가 소를 모는 게 이채롭다. 남자들은 부인과 딸에게 소떼를 맡겨놓고 뭘 하는 중일까? The Animals의 ‘House of the rising sun(122위)’이 떠올랐다. 영국의 록밴드가 부른 이 곡의 원제는 뉴올리언스가 배경인 미국의 전래 가요 ‘Rising sun blues’다. 해 뜨는 집을 가리켜 유곽이거나 루이지애나주의 어느 감옥이라는 일설이 있다. 다른 가설로는 술만 마시면 어머니를 폭행하는 주정뱅이 노름꾼 아버지를 살해하고 감옥에 수감된 젊은 여성이 회한 끝에 부른 노래라고 한다. 어쨌든 부디 갈리시아의 시골 남자들은 아내에게 소떼를 떠맡기고 나 몰라라 술 퍼마시는 한량이 아니기를 바란다.
피요발Fillobal을 거의 다 내려오다가 시래기 국밥 집을 발견했다. 메뉴판에 ‘시래기 국밥’이라 적힌 한글이 반가웠다. 몸이 으슬으슬해 뜨끈한 국밥을 먹기로 했다. 사실 시래기 국밥의 정식 명칭은 칼도 가예고Caldo Gallego. 우거지처럼 말린 순무잎과 깍둑썰기한 감자와 살코기에 사골 육수로 낸 갈리시아 전통 수프다. 햇반을 말아먹으니 제법 우거짓국 같다. 한 그릇을 뚝딱 비우니 몸이 후끈해진다. 한국인 순례자들이 즐겨 찾을만했다. 스페인 서북부 전통 수프에 파프리카 가루로 고춧가루를 흉내낸 재치는 미국 남부에 머물던 The Rolling Stones가 재미삼아 행크 윌리암스의 블루스 ‘Honky tonk blues’를 연주하다 작곡한 ‘Honky tonk women(116위)’에 비할만했다. 전설적인 브리티시 록밴드가 R&B, 블루스에 이어 지미 로저스의 컨트리까지 받아들여 미국의 전통 리듬을 차용한 점이 흥미롭다.
트리아카스텔라에 도착했다. 펜션 콤플레소 사코베오Albergue-Pensión Complexo Xacobeo 는 천장고가 무척 높아 산장에 머무는 착각이 들었다. 따스한 온수로 샤워한 후 이층 침대에 누워 박공천장 사이 유리창에 내리쬐는 햇볕 아래서 병아리 잠을 잤다. 격무에 지쳤다가 휴가내고 해변에서 망중한을 즐기는 기분이었다 스트레스에 찌든 회사원들이 고층건물 옥상에서 휴식하며 위안을 찾는 The Drifters의 ‘Up on the roof(113위)’처럼 말이다. 직장인들은 자신만의 스트레스 해소법이 있을 게다. 주가 변동에 시달리거나 고민이 있을 때 나는 증시가 마감되는 오후 3시 반이 되면 1층에서 건물 꼭대기까지 계단 오르기를 두 번하며 머리를 비운다. 운동 삼기에도 적당하다.
저녁 먹고 돌아오는 길에 삼색 냥이를 만났다. 한국인 여성 순례자 두 분이 대문 밑에 숨은 냥이에게 습식 캔사료를 하나 따주었다. 생수병을 든 내게 아이가 마실 물을 부탁한다. 냥이를 챙기는 게 고마워 병을 건네주며 말문을 텄다. 전남 고흥에서 독채 펜션을 운영한다는 그녀들은 길냥이 여럿을 거두는 중이라 소개했다. 돌보는 이가 없으면 힘들게 살아야 하는 터라 그녀들의 마음씀씀이가 고마웠다. 숙소까지 길냥이와 일순간이나마 동행하게 되어 행복했다. The Crystals의 ‘Da doo ron ron(When he walked me home,114위)’에서 월요일에 운명을 만나 집까지 배웅받은 그녀의 마음도 그랬을 것이다.
이제 칠 주야만 지나면 산티아고에 도착한다. 역사상 위대한 팝송 순위가 오를수록 매일 소개하고 싶은 노래가 많아진다. 순례가 막바지에 다다른 오늘도 명곡의 향연이 펼쳐졌다. 대미를 뭘로 장식할까 고민 끝에 시구절처럼 아름다웠던 하루에 어울릴 곡으로 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