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yla - 찰나의 탐욕과 허무한 집착
2023년 6월 15일 오 페드로우소 - 라바코야 9.6km
누나가 다시 길을 나선다. 사리아에서 재차 걸음을 멈춘 지 닷새 만에. 순례 마지막 날에만 걷는 게 나을 거라 여겼으나 일언반구 하지 않았다. 지난 여드레 동안 이 날을 얼마나 기다렸을 지 이해되기 때문이다. 노심초사하던 심지는 또 얼마나 굳세졌을 지도. 말없이 누나 짐의 2/3를 내 배낭에 담았다. 하루 10km씩 걷는 짧은 일정인 만큼 서로를 다독였다. 짐을 최대한 줄였고 무릎 컨디션이 어느 정도 호전되었으니 천천히 걸으면 별탈 없을 거라 여기면서.
어쩌면 선친께서는 순례를 재개하는 누나를 격려하기 위해 어제 새벽 꿈에 나오셨는지 모른다. 폴 매카트니의 어머니 메리가 그랬던 것처럼. ‘Let it be(20위)’는 The Beatles의 불화에 낙담하던 폴이 돌아가신 어머니 꿈을 모티브로 만든 곡이다. 꿈속에서 그녀는 폴에게 다 괜찮을 거니 그냥 놔두라고 얘기했다. 폴은 그리던 어머니를 재회하는 축복 속에서 행복을 만끽했다. 누나도 꿈결에 선친을 만나 해맑게 웃었길 바랐다. 아레사 프랭클린이 이 곡을 먼저 발표한 뒤, 비틀스의 마지막 앨범에 수록되었다. 밴드가 해체되어 마음 아팠을 팬들은 헤어지더라도 다시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으니 그대로 두라는 가사에서 위안을 얻었을 것이다.
지혜가 넘칠 듯한 노래 제목은 누가복음 1장 38절에서 따온 것 같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Let it be는 그대로 내버려 둔다, 그냥 놔둔다는 신실한 믿음이 이끄는 순응을 뜻한다. 힘들거나, 어둠 속에 있을 때, 구름 가득한 날에도 자신을 비추는 빛은 여전할 것이니 그대로 두라, 순리를 따르라는 노랫말에 삶의 지혜가 담겨 있다. 아마도 세상 살아가는 동안 상심을 겪는 모든 이들은 그 해답에 동의할 것이다. 까미노에 어울리는 문구다.
지난 57년간 나는 탐욕과 노여움과 어리석음으로 가득 찬 길을 걸었다. 무수한 잘못을 저질러 평생토록 삼독의 교도소에서 버둥거렸다. 운 좋게 두 달간 형 집행정지를 받아 37일에 걸쳐 피안의 세계로 피정을 나왔다. 그곳에 들어가진 못했어도 최소한 주변을 기웃거릴 소중한 기회를 얻었다. 나를 집착하는 위아라는 암세포가 매일 자가분열하여 수행 말미에 이를수록 어리석게 진에를 발산했지만 대체로 야고보를 누운 들판을 향한 까미노는 적당한 사색과 모처럼의 관조, 메마른 신심과 믿음을 돌이키는 평화로운 안식을 주었다.
나바라에서 라 리오하를 지나 카스티야와 레온을 거쳐 갈리시아까지, 고유한 풍광이 각기 다르지만 이들을 잇는 기나긴 외줄기 까미노는 그 길에 선 내 깊은 가슴 속을 고요하게 울렸다. 눈으로는 아름답기 그지없을 호사를 즐겼으되 속내는 비경을 넋 놓아 바라보기 일쑤였다. 와~하는 외마디 감탄사가 절로 나오면 시각을 자극하는 절경이 사유를 촉구하는 뇌회로를 끊어 버린 바, 다른 생각할 여지없이 몰려드는 경치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 급급했다. 강제된 멍 때리기다. Otis Redding의 ‘(Sittin’ on) The dock of the bay(28위)’도 이와 분위기가 유사하다. 항구의 부두에 앉아 썰물을 바라보는 멍 때리기! 가스펠적 요소를 탈피하려는 오티스의 변신처럼, 라바코야 알베르게Albergue Lavacolla에서 오후를 맞은 순례객들은 경건함으로 중무장된 갑옷을 훌훌 벗어던지곤 한가로운 일광 아래서 축제 전야를 즐겼다. 잔디밭에 놓인 비치 테이블이나 그늘막에 앉아 시원한 레몬 맥주와 성혈빛 와인을 들이켜 눈앞에 둔 산티아고 입성을 자축했다.
60년 전 미국 대중들이 환호한 브리시티 인베이젼의 위력을 몸소 체험했다. 오늘 감상한 15곡 중 5곡이 비틀스 거다. 가사가 하나같이 오브라도이로 광장 입성 전야에 어울린다. 이중 ‘In my life(23위)’는 사람과 사물의 관계를 언급한다. '누구나 평생 기억할 곳이 있다. 어떤 곳은 변했고 어떤 곳은 더 나아지지 않았다. 여전히 기억해야 할 이들이 있다. 내 삶에서 누구는 죽고 어느 누구는 살아 있을지라도.' 잊었던 지난 일들과 사람들을 기억해내려고 가던 길을 가끔 멈춰 서서 내 인생에서 조우한 그들을 생각한다. 노랫말처럼 까미노를 걸으며 일상에서 까맣게 잊고 지내던 과거사, 소싯적 그리운 친구, 사회에서 맺은 인연들을 얼마나 아련하게 떠올렸던가.
추억 어린 이들을 기리면서도 선뜻 먼저 연락하지 않았다. 그리워하는 내 마음을 알아줄 거라 믿었다. 언제든 만나 회포를 풀면 오래전 그때 감정으로 금새 되돌아갈 자신했다. 대단한 착각이다. 지금껏 이 걸 모르고 살았다. 독심술을 펼치지 않고서야 내 속을 어찌 알랴. 잊지 않았다는, 오래된 연을 기억하는 마음은 겉으로 드러내야 한다. 그러려면 우선 솔직해야 한다. 진정으로 마음을 나누는 교류는 솔직함이 우선이다. ’I want to hold your hand(16위)’는 브리티시 인베이젼의 시작이었다. 미국 시장 진출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 밴드 최초로 빌보드 핫 100에서 1위를 차지했다. 당시 이 곡을 필두로 비틀스 노래들이 싱글 챠트 탑 5를 석권했다. 네 손을 잡고 싶다는, 기성세대와 달리 솔직한 감성을 표현해 인기를 끌었다. 진솔한 감정이 평범한 가사와 적당한 사운드를 빛낸 묘약이었다. 이런 솔직함이야말로 성공적인 인생을 위한 전제이자 삶의 모범 답안일 것이다.
The Impressions는 ‘People get ready(24위)’에서 믿음을 강조했다. '믿음만 있으면 된다. 주님이 계신다는 확신만으로 천국행 기차를 탈 수 있다. 단, 많은 이들을 사랑한 자들만 해당된다. 자신만 생각해 남에게 상처 준 이들은 허락되지 않는다. 기회가 많지 않은 이들을 연민하라'는 가사는 낮은 곳에 임하라는 주님의 명령이다. 야고보는 그 명을 따라 2,000년 전 세상의 끝이었던 갈리시아에서 거룩한 말씀을 전했다. 늘 행동이 뒤따르지 않은 내게 많은 귀감을 준다.
며칠 후면 차안의 언덕에 있는 교도소로 되돌아 가야 한다. 37일간 까미노는 비신자인 내게 영광스러운 성당이었다. 그 안에서 나름대로 경건하게 피정을 지냈다. 이제 영적 수양을 마치면 다시 불선근不善根의 감옥에 수감되어야 한다. 그곳은 탐진치가 가득한 고통스러운 질곡의 현실이다. 거기서 재현될 집착과 무기력한 분노, 그리고 허무한 어리석음을 노래한 명곡들이 있다.
‘레일라와 마눈미치광이’은 페르시아판 로미오와 줄리엣이다. 마눈은 레일리를 잃고 미쳐 버린 게이스의 별명이다. 에릭 클랩튼은 절친의 와이프, 패티 보이드를 짝사랑한 자신의 열망과 고통을 강제로 헤어진 이들의 비극적인 사랑에 빗대었다. 바로 Dereck and the Dominos의 ‘Layla(27위)’에서. 에릭과 듀안 올맨이 협주한 빠르고 강렬한 기타 리프는 곡 전반에 에너지를 실어주며 아웃트로의 피아노 연주는 고통스러운 사랑의 감정을 서정적으로 갈무리한다. 조지 해리슨과 이혼한 패티는 마침내 에릭과 결혼하지만 그 결착이 결코 아름답진 않다. 에릭이 외도하여 결혼 10년 만에 헤어지니 말이다. 패티에게 ‘Wonderful tonight(1977년)’을 헌정하며 천년을 이어갈 듯하던 에릭의 사랑은 한낱 십일홍에 불과했다. 불같은 연심은 찰나의 탐욕과 허무한 집착에 지나지 않으리. 1992년 발표한 언플러그드 버전은 록 버전과 달리 말할 수 없이 감미롭게 편곡되었다. 이글스의 언플러그드 앨범과 마찬가지로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원숙미가 가득하다.
https://youtu.be/ebRiMvUWOqE?si=ZgRbVFBaOEfLMTGi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분노가 서서히 쌓인다. 주위 사람들이 제 딴에는 심각한 사안을 무시하거나 관심 갖지 않아 그렇다. 누적된 분노는 도리 없이 자책하거나 남 탓으로 돌려 해소한다. The Beatles의 ‘Help!(29위)’는 자존감을 잃은 사람의 절규를 그린다. 예상 밖의 대성공을 거둔 후유증에 시달린 존 레넌이 극심한 스트레스를 해소하고자 작곡했다. ‘여태껏 남들의 도움이 필요 없었으나 이제 그런 날은 지나버려 자신이 없다. 마음의 문을 열었으니 네가 내 곁에서 내가 일어나는 걸 도와줘.’ 도움을 받으려면 자신의 상황을 있는 솔직히 알릴 용기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그 전에 인심을 잃지 않았아야 한다.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기대거나 도와줄 이 하나 없다면 얼마나 절망적일까? 작은 이익에 현혹돼 지근거리의 친구, 동료와 지인들의 품이나 부처와 하느님, 동서고금의 가르침에서 멀리 떨어졌다면 너무 늦지 않게 돌아가야 할 일이다.
‘Born to run(21위)’에서 진저리치는 현실을 벗어나고자 어디로든 뛰어 달아나려던 연인들. 그들이 찾아 헤맨,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종착지는 어딜까? 우습게도 자신들의 고향집이다. 노래 속 연인에 빗대 고향을 떠나 이상향을 찾던 Bruce Springsteen에게 떠오른 건 자기 집이었다. 정처 없는 풍찬노숙의 고행을 헛되이 마무리한 까닭이 있다. 개인의 자유가 어디까지나 공동체에 기반한다는 전제를 강조하기 위해서다. 대학 8조목 중에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라는 구절이 있다. 대개는 이 문장을 순차적 관계로 해석한다. 수신 후에 제가를 논하며 치국에 이르고나서 평천하를 꾀한다는 식이다. 그런데 신영복 선생은 특이하게 전후 관계성에 주목했다. 제가 없는 수신은 소승의 목탁이거나 한낱 이기의 껍데기에 지나지 않고 치국에 앞선 제가란 부잣집 맹견과 높은 담장을 연상케 하며 평천하를 도외시한 치국은 일제와 같은 제국주의의 침략과 횡포가 본보기라고. 공동체를 우선한 브루스의 깨달음처럼 인격을 닦고 덕성을 넓혀 가는 행위도 더 큰 공동체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까미노를 걸으며 자연과 생명의 순환 원리를 조금이나마 이해했다. 단조롭고 소박한 순례를 체험하며 물질적 풍요가 행복의 필수 조건이 아니라는 교훈을 얻었다. 물질 만능주의에 회의를 느낀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월든 호숫가에서 2년간 오막살이를 했다. 미국 고전 중 하나인 ‘월든(1854년)’에서 저자는 미니멀 라이프의 자발적인 불편을 감수하는 대가로 얻은 희열에 환호했다. 그에게 자연이란 인간이 배우고 교감할 지혜의 보고였다. 까미노도 내게 스승이자 친구였다. 자연과 어우러진 순례는 서울에 두고 온 복잡한 사정을 잊도록 해줘 내게 진정한 자유와 평화를 건네주었다.
헨리가 성찰했던 자연의 리듬, 인간과 자연의 연결관계를 달리 표현하면 생명의 순환Circle of Life라 칭할 만하다. 나는 주술사 원숭이 라피키가 언급한 서클 오브 라이프를 모든 생명이 공동체 내에서 조화로이 자신의 역할과 의무를 다함으로써 자연의 순환을 유지시키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 뿐이 아니다. 개인의 삶은 크로노스 속에서 끊임없이 변하는 바, 이 변화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미도 내포한다고 믿는다. 그러니 변화와 이에 대한 도전은 삶의 필수요, 도전은 현실이다. 차안의 교도소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경구다.
산티아고를 향한 피정길은 내게 피안에 이르는 카이로스의 황홀경을 잠시 보여 주었다. 하지만 순례의 종착역에 가까워질수록 다시 차안으로 되돌아간다는 아쉬움과 그곳에서 맞닥뜨릴 냉혹한 현실에 전율했다. 카이로스가 던질 해탈과 선에 이르는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현상과 실존의 민낯을 직관적으로 통찰해 얻는 사유의 해답이다. 문제는 깨달음 자체로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는 점이다. 세상은 나름의 리듬과 순환이 작동하는 현실이다. 현실과 실존이 덧없이 공하다는 깨달음이 세속적 삶 그 자체를 공으로 만들진 못한다.
어리석은 내게 현실 세계와 깨달음은 각기 다른 영역 같다. 깨달음만이 삶의 전부가 아니라는 의미다. 비정한 현실을 극복하려면 삶을 쿨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1946년)’는 내가 매번 반복하던 실수가 무엇인지 알려준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힌 유대인들은 고통스러운 환경을 바꾸지 못한다. 단지 고통에 맞서 어떤 태도를 취할지 자유로이 선택할 뿐이다. 카포, 수용소경찰가 되어 동족을 괴롭힐지, 아니면 동료를 도울지는 오롯이 자신이 선택할 문제다. 주어진 삶이 무엇인지 고민할 필요가 없다. 삶이 던지는 매 순간의 질문을 그때마다 충실히 답하면 그만이다. 변화를 꾀하려면 시련에 대한 책임을 떠안아야 한다. 이것이 삶이다. 37일간 양안의 경계를 어물쩡거리다 얻은 소중한 교훈이다.
며칠 동안 사색의 시간을 허락해 준 아침 안개가 자취를 감췄다. 싱그러운 햇살이 쾌청히 내리쬐는 6월의 오전. 누나와 함께 걸은 까미노가 상쾌하기 그지없다. 혼자만의 사색을 포기한 대가라기에는 너무 많은 보상이다. 누나가 부담 갖지 않도록 한참 뒤에서 따라 걸으며 새들이 우지지는 갈리시아 숲길을 유유자적했다. 녀석들도 우리 더러 잘 가라고 환송하는 거겠지. 9km를 4시간에 걸쳐 완보했다. 라바코야의 평화로운 오후는 조만간 차안을 마주해야 하는 불안감을 씻기에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