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력서

8년 1개월의 역사

by 살랑

갑작스런 퇴사였다. 에둘러 말하면 타이밍이 나빴던 거고 정확히 말하자면 곪을 대로 곪은 문제가 터진 거였다. 커다란 대봉투 두 개에 그 동안의 소지품을 담아 지하철을 탔다.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꽂혔지만 그런것에는 사실 별로 관심이 없었다.


당장 일자리를 구해야 했다. 곧바로 정규직에 지원하고 싶지는 않았다. 검정 정장에 실크 캐미솔, 스프레이가 잔뜩 뿌려져 굳을대로 굳어진 올림 머리를 또 다시 하는것은 생각만 해도 지겨웠다. 취업준비를 할 때에는 신입사원 타이틀을 달기 위해 아둥바둥 했었는데, 사실 그 정규직이라는 세 글자가 주는 단어의 경중은 생각보다 무거웠다. 이틀 동안이나 출근하는 것은 내게 너무 버거운 일이어서 1일 단기 아르바이트 위주로 지원했다.


오랜만에 접속한 아르바이트 구직 사이트의 내 이력서는 2018년도에 멈춰있었다. 스물 여덟의 나는 8년 1개월의 아르바이트 경력이 있었고 참 다양한 일을 전전해왔다. 문득, 과거의 기억이 스쳐갔다. 스무 살 겨울, 설날에 아르바이트를 가다 빙판길에 크게 미끄러져 엉엉 울던 기억, 사장님 앞에서 금방 튀긴 빵판을 쏟아 호되게 혼났던 기억, 성격 모난 교직원에게 따돌림을 당했던 기억. 좋은 기억보다 나쁜 기억이 더 많았다.


난 왜이렇게 삶이 기구한가. 매일 품던 의문이었다. 비빌 언덕 하나 없었고 한순간도 일을 쉴 수 없었다. 모은 돈은 하나뿐인 내 엄마와 나의 생계비로 빠져나갔고 엄마는 나를 어느샌가부터 감정의 쓰레기통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넌 눈치가 빨라서 좋아." 전 회사에서 상사가 지나가는 말로 건넸던 그 말은 내 기억속에 아직도 깊게 자리하고 있다. 살아남기 위해 빨라졌던 것 뿐이다. 고의가 아니었다. 스스로가 문득 짠해졌다.


자기소개서의 성장 과정을 보다 한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아르바이트를' , '사교육 없이' 등의 어구가 눈에 띄었다. 자기연민의 끝판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까짓 아르바이트를 위해 작년의 나는 나의 가난을 전시했었구나, 환멸이 들었다.


취업 준비때 잠깐 다녔던 토익학원에서 선생님이 항상 강조하던 말이 생각났다. 수식어는 빼야 한다,덜어내야 한다, 문장의 주어와 동사에만 집중해야 한다 가 그녀의 요지였다.

환경, 조건, 배경은 어쩌면 자기연민일 뿐일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나 자체를 부연설명할 수 있는 수식어는 될 수 있으나 근본적으로 나를 설명하지 못한다.


새로운 직업을 얻기 위해 내가 또 다시 얻게 된 시간, 나는 내게 붙은 수식어를 떼내는 연습을 해보려 한다. 근본의 나, 날것의 나를 알게 되는 순간 나는 더 타인앞에서 당당해지고 스스로 단단해진 내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