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의 이야기
언젠가부터 영화를 즐겨보지 않게 되었다. 2시간이 넘는 시간을 오롯이 스크린에 집중하기엔 내 머리엔 항상 생각이 많았고 복잡했다. 감정이입이 심한 편이라 영화가 끝나면 여운이 심해져 꺼리게 된 이유도 있다.
그렇기에 내 여가생활은 주로 '보는 것'보다는 '읽는 것'에 집중되어 있는 편이다. 텍스트는 언제든 읽는 것을 멈출 수 있고 영상에 비해 여운이 덜 남는 편이어서 그렇다. 조남주 작가의 원작은 거의 출간되자마자 사들였지만 영화는 아직 보지 못했던 것이 그 이유였다.
"82년생 김지영 봤어?"
영화가 개봉한 후, 여자 친구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메시지를 보내왔다. 차마 요즘에 집중력이 바닥이 나서 영화를 볼 수가 없어, 라는 말은 하지 못했다.
그것이 내키지 않는 발걸음으로 영화관으로 향한 이유였다.
영화를 보는 내내 흐르는 눈물에 주체를 못할 정도였다. 물론 여배우처럼 또르륵 흐르는 눈물은 아니었다. 거의 나이아가라 폭포같은 대차고 거센 눈물이었다. 오랜만의 외출에 찍어발랐던 아이섀도우가 덕지덕지 흉하게 달라붙었다.
요즘 이 영화에 대한 말들이 많다. 혹자는 이 영화가 남성과 여성의 젠더갈등의 원흉이라고도 하고 몇몇 네티즌은 평점테러나 악플을 달기도 한다.
그러나 몇몇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이 영화가 강조하는 바는 여성이 남성보다 낫다는 우월의식도 아니고 여성이 남성들을 위해 희생해왔다는 희생정신도 아닌것 같다.
'82년생 김지영'은 어쩌면 한국 사회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는 모두에게 위로의 한 마디를 건네기 위해 만들어진 영화인지도 모른다.
영화에 나오는 상황 하나하나가, 남성은 공감하지 못하는 오롯한 여자만의 이야기라서 그렇다. 아침에 물건을 사러온 아주머니가 가게 주인에게 부정이 탈까봐 우려된다며 미안해 하는 부분, 지하철 화장실에서 몰래카메라가 있을 까봐 마음이 철렁 내려앉는 주인공의 모습들이 그러한 것이다.
영화의 어떤 장면에서도 남성과 여성의 갈등과 대립은 크게 부각되지 않는다. 오히려 극 중의 여성들은 이러한 현실을 인정하는 동시에 타협점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사실 이 글의 제목을 붙이면서 고민을 많이 했다. 이런 표현이 과연 옳은걸까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2019년 한국 사회에서 여성에 대한 차별과 페널티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누가 봐도 새빨간 거짓말이다. 그렇기에 오늘의 나 또한 스스로를 '92년생 김지영' 이라고 칭할 수 있는 것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