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에 한 드라마 ‘직장의 신'을 아는가? 김혜수가 주연을 한 드라마로 파견직 여성이 회사에 가서 뛰어난 잡일 (본 업무 아님 주의!) 실력으로 사무실을 평정한다는 내용이다. 각종 자격증을 보유한 그녀는 지게차 운전으로 회사 직원을 살리기도 한다.
이 드라마는 원래 '파견의 품격'이라는 일본에서 히트한 원작에서 왔다. 알바 천국인 일본에서는 뛰어난 실력자 알바들이 있다. 한국 알바의 세계에도 그런 언니들이 있다. 일명 칼잡이 언니들.
의류 포장 공장 중에 여름이 다가오면 바빠지는 회사들이 있다. 여성 속옷 포장 공장이다. 보통 의류 포장 공장들은 겨울에 일이 많고 여름에는 일이 적어진다. 당연히 겨울에는 사람들이 옷을 많이 입고 여름에는 덜 입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성 속옷 공장은 여름이 성수기이다. 여자들이 속옷을 자주 갈아입기 때문이다. 단지 안에는 유명 속옷 메이커의 포장 공장이 있었는데 알바들이 선호하는 일터였다. 서로 김상무에게 자신을 보내 달라고 청탁을 한다.
여성 속옷이다 보니 예쁘고 가벼운 데다 반장의 관여가 작고 알바들이 주도적으로 일을 조직했다. 늦봄부터 일이 많아지는데 창고가 커서 에어컨 영향이 거의 없어 쉬는 시간도 많이 줬다. 하루 목표량이 달성되면 1시간 정도 일찍 퇴근하면서도 하루 일당을 다 받았다.
사진 출처 : Unsplash
그래서 모든 알바들의 최애 일터였다. 그 회사는 창고를 여러 개 가지고 있었는데 반장이 모두 관리를 해야 해서 아침에 한번 와 일거리를 주면 중간중간 체크만 하지 알바들이 일하는 걸 지켜보지도 않았다.
그래서 알바들끼리 일 공정을 조직하기도 한다. 효율적으로 일하고 빨리 일을 끝내기 위해. 홈쇼핑으로 나가는 다양한 팬티, 브래지어 세트를 구성해 포장하는 것이 주요한 일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중간중간 박스를 따야한다. 이 순간 언니들은 일제히 앞치마에서 칼을 뽑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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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서 칼을 주기는 하지만 창고 자체가 넓기도 하고 여러 창고를 돌아다녀야 해 필요할 때 적시 적소에 칼을 받기는 힘들다. 언니들은 그래서 칼을 가지고 다닌다. 각자의 손에 맞춘 문구용 칼.
주인의 손아귀에 꽉 잡혀야 하고 칼심을 항상 날카로워서 박스 안에 푹 들어가거나 박스를 묶은 끈을 샤프하게 베야 한다. 칼심의 길이도 적당해야 하고 많이 써도 부러지지 않을 만큼 단단해야 한다. 그런 조건을 잘 맞춘 칼을 언니들을 각자 들고 다닌다.
그래야 일을 빨리 할 수 있다. 야들야들한 팬티와 섹시한 브래지어가 가득 담긴 박스에 칼을 꽂아 옷 손상이 가지 않으면서도 빠른 속도로 열어낼 수 있으려면 좋은 칼과 함께 칼을 휘두르는 각도가 좋아야 하고 적당한 힘이 동반되어야 한다. 칼잡이 언니들은 킬러의 포즈로 박스를 빠르게 뜯어낸다. 마치 알바의 신처럼.
그래서 나도 칼 하나를 장만했다. 전문 오피스용 칼이라 칼심도 단단하면서 날카롭고 손으로 잡았을 때 그립감이 좋다. 늦봄부터 여름까지 여성 속옷 공장에 알바 나가면 칼잡이 언니들에게서 수련을 받았다. 재미있었다.
그러나 함정은 있었다. 여기도 알바들이 사실상 작업을 주도하는 곳이라 아침 출근 명부를 고참 알바 언니가 작성했다. 더운 창고에서 뻘뻘 땀을 흘리며 칼을 휘두르고 온 다음날 나는 내 통장에 일당이 꽂히지 않은 걸 발견했다. (알바 일당은 일한 다음날 지급된다)
김상무에게 전화했더니 나에게 출근했느냐고 물었다. 울분을 담아 대답했다
"당연히 출근했죠"
김상무는 알아본다고 하더니 바로 일당을 입금해 주었다.
문제는 고참 언니가 내 이름을 적지 않은 거였다. 그 고참 언니가 나를 모를 수는 없었다. 박스를 나를 때 함께 든다든가 작업대를 옮길 때 함께 했다. 고참 언니는 일부러 나를 누락시킨 게 틀림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