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아름답고 찬란했던 시절이라는 뜻인 ‘화양연화.’ 너무나 유명한 이 홍콩 영화는 90년대 트렌디했던 감독 왕가위가 만들어 2000년에 개봉했다. 수 리첸 (장만옥)과 초 모완 (양조위)가 남녀 주연을 한 이 영화는 왕가위 감독 특유의 스타일리시한 연출과 홍콩 영화 팬들의 열광적인 지지로 유명한 영화다.
그러나 이러한 트렌디함과는 다르게 매우 애국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걸 눈치채는 사람은 많지 않은 듯하다.
1962년 한 건물로 같은 날 이사 진 부인(수 리첸)과 주 씨 (초 모완)는 서로 자주 마주친다. 진부인은 주 씨 아내와 같은 가방을 들고 있고 주 씨의 넥타이는 진부인 남편의 넥타이와 같은 걸 두 사람은 눈치채고 대화를 시작한다.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지만 진부인의 남편과 주 씨의 부인은 불륜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영화 속에서는 두 사람의 얼굴이 나오지 않는다. 다만 진부인의 남편은 자주 해외 출장 중이고 주 씨의 아내는 자주 야근을 한다.
진부인은 치파오 (중국 전통 여성 원피스)를 몸에 붙게 입는 아름다운 여자이고 주 씨는 문학적인 향기가 있는 깊은 남자이다. 주 씨는 무협소설 쓰기를 시작했다며 무협 소설에 관심이 있는 진 부인에게 도와 달라고 부탁한다. 소설 쓰기를 핑계로 두 사람은 집에서 떨어진 곳에 방까지 마련하고 자주 만난다. 그런데 두 사람이 사는 건물 이웃 사람들이 의심하기 시작하고 진부인은 직접 얘기까지 듣는다.
이 영화는 대사가 거의 나오지 않는다고 할 정도로 절제되어 있다. 왕가위 감독은 특유의 스타일리시한 연출로 장면 하나하나 여러 장치를 통해 남녀 주인공의 감정을 드러낸다. 낮은 주황색 조명, 화려하지만 빛바랜 듯한 벽지, 흐릿하게 빛나는 거울, 남루하고 초라한 회색 건물벽, 무성한 담배 연기, 갑작스럽게 내리는 비 등등.
특히 수 리첸이 입은 치파오는 여성적인 몸매의 실루엣을 그대로 살린 섹시미가 넘쳐흐른다. 영화 미술의 기교가 대단한다.
지극히 일상적이고 남루한 현실 장면 속에는 깊은 감정이 흐른다. 그 위에 남미풍 카사노바 음악을 흘려 나와 보는 사람들에게 아주 색다른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너무나 홍콩의 일상적인 풍경과 남미의 음악이라는 매우 이질적인 두 요소를 결합하여 짙은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데 성공한다.
그들은 불륜이 아니라고 부정하지만 누구나 그리고 그들 자신마저도 이것이 불륜인 걸 알고 있다. 그들의 배우자들이 불륜 관계인 것처럼. 왕가위 감독은 스타일리시한 카메라 앵글과 감감적인 미술, 그리고 수 리첸의 미모로 현실의 구질구질한 면을 가렸다. 하지만 이 영화의 본질은 기혼 부부의 사각 관계 막장에 가깝다.
세월이 흘러 주 씨는 싱가포르로 이사해 신문사에서 일을 하고 진부인은 홍콩에서 아이를 낳아 기른다. 몇 년 후 진부인이나 주 씨는 그들이 살았던 집으로 찾아가 각자 상대방을 그리워한다. 주 씨는 캄보디아의 사원을 찾아가 오래된 거대한 사원의 허물어져가는 벽 한쪽 작은 구멍에 입을 대고는 그들의 비밀스러운 로맨스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야기가 흘러나오지 않도록 구멍을 흙으로 막는다.
이 영화가 그토록 아름다운 건 1970년대 성룡의 무협 영화로 시작해 1980년대 주윤발 주연의 ‘영웅본색’ ‘첩혈쌍웅’ 등으로 아시아 시장의 판도를 휘몰아쳤던 홍콩 영화의 실력이 차곡차곡 쌓여 1990년대 왕조위 같은 예술 영화감독에게 전수된 탓이다. 그러나 1997년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면서 홍콩 영화는 하락기에 접어든다.
1997년 홍콩 반환기 직후에 구상되고 제작된 ‘화양연화’에는 홍콩 본토인들의 깊은 상실감이 짙게 배어 있다. 영화 속에 나오는 노래를 듣고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꽃다운 시절, 달 같던 생기, 아름답던 삶, 다정하던 그대,,. 갑자기 이 외딴섬이 자욱한 안개와 구름으로 뒤덮였네. 사랑스러운 조국...’
너무나 직설적인 홍콩 애국가이다. 로맨스 영화에서 쓸 수 없는 정치적인 내용이다. 이 노래에 대한 얘기는 많이 들었지만 이 영화를 보기 전에는 당연히 두 남녀의 사랑과 상실을 이야기한 노래겠지 생각했다. 그러나 ‘화양연화’ 노래의 주인공은 홍콩 반도이다.
왕가위 감독은 이 영화의 배경을 1960년대로 하면서 그 시절이 홍콩의 ‘화양연화’ 임을 그리고 있는 게 아닌가?! 사랑이 아름답게 피어났던 시절, 그러나 끝내 상실해야만 하는 사랑. 1970년대 유쾌한 쿵후 영화와 1980년대 화려한 액션 영화를 거쳐 홍콩 영화는 1990년대 우울하고 불안한 감정을 토로하고 있다.
‘화양연화’는 홍콩의 아름다운 전성기 1960 년대를 그리며 몰락해 가는 홍콩 영화의 시대와 홍콩의 자유를 대변하는 시대적인 로맨스 영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