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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큰 Sep 03. 2022

카페는 오늘도 깜박깜박

여름에는 도서관 | 세 번째 이야기


노트북을 들고 별다방 같은 곳에 가서 일하는 번역가들이 참 많던데, 번역 일이 딱히 없어 반백수 상태인 나도 출근하듯 자주 가는 단골 카페가 있다. 바로 내가 산책 가는 도서관의 별관 2층에 있는 카페다. 나는 그곳을 별책다방이라 부른다.

얼마나 자주 갔던지, 도장 10개를 모으면 주는 공짜 아메리카노를 벌써 여러 잔이나 얻어마셨다. 출근 도장을 찍듯 카페 쿠폰에 도장을 찍어댔더니 그렇다.


처음부터 별책다방을 이용했던 건 아니다. 리모델링 공사를 끝내고 재개관한 도서관 안에 새로운 카페가 생겼다는 사실은 진작에 알고 있었지만, 종합열람실에서도 충분히 편하게 책을 읽고 노트북을 사용할 수 있거니와 내가 마실 음료는 늘 들고 다녔기에 굳이 카페에 가서 돈을 쓸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러다 하루는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데 그날따라 너무 졸리고 커피는 막 땡기는데 가져간 게 하필 물 밖에 없던 차에 '그럼 카페나 한번 가볼까' 했다가 그날 이후 단골이 된 것이다.



별책다방은 바리스타 할머니(사실 외모는 전혀 할머니처럼 보이지 않으심 ^^) 두 분이서 커피를 내려주는 카페다. 노인복지사업의 일환으로 여러 명의 바리스타 할머니들이 날마다 돌아가며 일하시는 듯. 비록 주문을 받고 계산을 하고 음료를 만들어주는 과정은 다소 느리지만, 정겨운 사랑방 같은 분위기가 있다. 쥐 죽은 듯 조용한 도서관에서 책만 읽을 때나 번잡한 일반 카페에서 비싼 음료를 마시며 글을 쓸 때와는 다르게 왠지 부담이 없다. 가격 또한 착하다. 나는 여기저기서 생긴 잔돈과 우리 집 남자들이 아무 생각 없이 흘리고 다니는 동전들을 모아두었다가 이곳 커피를 사 먹는데 잘 쓴다.


별책다방에 앉아있으면 재미있는 일들을 종종 목격한다. 주로 바리스타 할머니의 소소한 실수 때문에 벌어지는 해프닝이다. 가령 손님이 분명 카페에서 마시고 간다고 말을 했는데도 음료를 만드는 사이에 깜박하고는 테이크아웃 잔에 담아준다거나 하는.

한 번은 어떤 손님이 음료를 마시다 말고 바리스타 할머니에게 가서 조용히 물었다.

“저… 저기… 여기에 혹시 연유가 들어가는 거 아니었나요?"

그러자 할머니는 잠깐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아이고! 그렇네요. 미안해요. 깜박했어요.”

알고 보니 그 손님이 연유 라테를 시켰던 모양이었다.


웃긴 건, 아니 웃픈 건 가끔 나도 그런 해프닝에 동참한다는 사실이다.

하루는 내가 음료를 받아 와 맛있게 마시며 책을 읽고 있는데 갑자기 바리스타 할머니께서 내게 뛰어와 이렇게 말했다.

“아까 아이스 아메리카노 시키셨죠? 깜박하고 제가 500원 거스름돈을 안 드렸어요.”

“앗! 어머나! 그렇네요. 저도 받는 걸 깜박했네요.”


또 한 번은 내가 와플과 커피를 함께 시킨 적이 있었다. 바리스타 할머니는 한참이 지난 뒤에 “주문하신 와플과 음료 나왔습니다”라고 외치면서 나를 부르더니 미안해하며 이렇게 말했다.

“너무 뜨거운 데다 찬 걸 넣었는지 안에 있는 게 흘러 나와 와플이 눅눅해졌어요. 미안해요.”

나는 괜찮다고 말하고 자리로 돌아와서는 눅눅해진 와플을 어찌어찌 수습해가며 먹기 시작했다. 그런데 먹다 보니 뭔가 좀 이상했다.

‘아차차! 커피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내가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시켜놓고서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받아와서 맛있게 마시고 있었던 거였다. 와플 굽느라 바빠서 엉뚱한 음료를 만든 바리스타나, 와플 먹느라 바빠서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빨대를 꽂고 시원하게 마실 때까지도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시켰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손님이나 똑같지 뭔가.




뭐 아무튼 벌써부터 이렇게 깜박깜박해서 심히 걱정스러운 나지만 ;; 지금보다 더 나이가 들고 진짜로 번역 일이 없으면 도서관이나 서점에서 일하고 싶다는 작은 소망을 가지고 있다. 사실 예전에는 도서관 어린이실에서 일하시던 사서 할머니가 그렇게나 부러웠었다. 혹시나 해서 도서관 홈페이지를 검색했다가 고령자를 우선으로 뽑는 사서직 대체인력 채용 공고를 본 적도 있다. 응시 자격을 살펴보니 만 50세 이상의 사서 자격증을 가진 경험자를 뽑더라는. 지금이라도 준사서 자격증을 따야 하나 하면서 안타까워했던 기억이 있다. (지금은 몇 년째 그런 모집공고조차 없는 걸로 안다)


공교롭게도 당시 사서 할머니가 일했던 어린이실은 리모델링 공사 후에 바리스타 할머니가 일하는 카페가 되었다.

나는 별책다방에 앉아서 사서 할머니가 못 된다면 바리스타 할머니가 되는 건 어떨까 하고 생각한다. 알아보니 60세 이상에 신체 건강하고 바리스타 자격증이 있으면 일단 지원 가능하단다. 그뤠요? 마침 바리스타 자격증도 얼마 전에 땄으니까, 번역 일하면서 딱 10년만 기다렸다가 지원하면 됩니까? ㅎㅎ


그나저나 날마다 고운 미소로 커피를 만들어주시는 바리스타 할머니는 손님인 내가 자기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모르시겠지? 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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