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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개로왕의 죽음과 개로왕 국서

개로왕은 멍청한 바둑 바보는 아니었다

by 이메다

이 글은 https://www.fmkorea.com/best/7121182203 아래의 인터넷 화제글을 보고 작성한 글이다.



고구려와 백제 사이의 기나긴 마찰 이야기는 다음에 하도록 하고, 일단은 개로왕 이야기만 해보겠다.



개로왕은 455년에 즉위했고, 이 때는 고구려 장수왕(421-491)의 치세가 절정이던 시기다. 장수왕은 국왕이 바뀌어 혼란스러웠을 백제를 한 차례 공격한 것으로 보이나, 그 후의 별다른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39년(455) 겨울 10월에 고구려가 백제를 침범하니 왕이 군사를 보내 구원하였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3 눌지왕39년(455)


개로왕은 천천히 남조, 왜와 교류하며 내정을 정비했다. 국력을 회복하던 개로왕은 오랜 시간을 기다렸고 즉위 15년, 드디어 고구려를 향한 복수의 칼날을 드러낸다.


15년(469) 가을 8월에 장수를 보내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쳤다.
- 삼국사기 백제본기3 개로왕15년(469)
57년(469) 가을 8월에 백제 군대가 남쪽 변경을 침입해왔다.
- 고구려본기6 장수왕57년(469)

백제는 그 후에도 쌍현성을 수리하고 청목령에 목책을 세우고 북한산성에 군사를 두는 등, 고구려와의 전쟁을 열심히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472년에 문제의 사건이 발생한다.



개로왕은 고구려와 국경을 맞대고 있던 당대 최강국 북위에게 사신을 보낸다. 함께 고구려를 공격하자는 내용이었다. 남조와 교류하던 백제가 굳이 북위에 이런 문서를 보낸 이유는 당시의 국제관계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당시 고구려와 북위의 관계는 썩 좋지 않았다.


북위는 북연의 멸망을 계기 삼아 고구려와의 국교를 단절하고 있었다. 고구려와 북위가 동시에 북연의 수도를 공격했는데, 고구려군이 먼저 수도에 입성해 북위군을 막아낸 것이다. 고구려군은 북위로부터 성을 지킨 다음 약탈과 함께 주민들을 고구려로 이주시켰고, 북위는 불타버린 성만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이를 계기로 북위는 고구려와 20여 년 간 단교를 했으며, 462년에야 비로소 외교관계가 복구됐다. 472년은 고구려와 북위의 외교관계가 재개된 지 10년밖에 안 된 때였기에, 둘의 관계가 그리 밀접하지는 않았다.


466년에도 고구려와 북위 사이에 마찰이 있었다. 당시 북위의 실권자는 문명태후였다. 문명태후는 성이 풍 씨라 풍태후라고도 불리는데, 훗날 효문제의 섭정으로서 뛰어난 정치력과 행정력을 보이며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된다. 태후는 고구려와의 화친을 이유로 장수왕의 딸을 효문제의 후궁으로 요구했다. 장수왕은 처음에는 자기 딸은 이미 혼인했다며 동생의 딸을 보내겠다고 약조했고 태후 역시 이를 허락했다. 북위는 혼인 준비를 마치고 국경에 폐백까지 준비시킬 정도로 정성이었다. 하지만 고구려 내부에서는 반대 여론이 일었다. '북위가 예전에 북연과 혼사를 맺은 직후 북연을 정벌한 사례가 있다'며, 기만책이라는 여론이 대두했고 여론을 따른 장수왕은 북위에 '동생의 딸도 죽어버렸다'며 거짓말을 해 혼인을 뭉개버렸다. 북위 입장에서는 상당히 자존심이 상할만한 일이다.


백제는 이 틈을 타서 그동안 교류하던 남조가 아니라, 국력이 더 강하면서 실질적으로 고구려를 견제할 수 있는 북위에게 손을 벌린 것으로 보인다.



개로왕 국서의 내용은 심상치 않다. 그 전문은 위서와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실려 있는데, 문제가 될법한 부분만 옮겨 적자면 아래와 같다.


신은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선대에는 우의를 매우 돈독히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선조인 쇠(釗)가 이웃 간의 우호를 가볍게 깨뜨리고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신의 국경을 짓밟았습니다. 그리하여 신의 선조인 수(須)가 군사를 정돈하고 번개처럼 달려가서 기회를 타 돌풍처럼 공격하여, 화살과 돌이 오고 간지 잠깐 만에 쇠(釗)의 머리를 베어 높이 매달으니, 그 이후부터는 감히 남쪽을 엿보지 못하였습니다.
- 위서 권100 백제전

쇠(釗)는 고구려 고국원왕의 이름이고, 수(須)는 백제 근구수왕의 이름이다. 위 사료는 고국원왕과 근초고왕의 평양성 전투를 묘사하고 있는데, 당시 백제는 태자였던 부여구수가 따라서 참전했다. 평양성 전투 당시 고국원왕은 눈먼 화살에 맞아 부상을 입어 결국 사망했다. 이것이 글 서두에 언급한 인터넷 화제글에서 이야기 한 사건이다. 그런데 개로왕은 이를 더욱 과장해, 근구수왕이 고구려 본진을 직접 타격해 고국원왕의 목을 따 효시했다고 표현한 것이다. 고구려군을 왕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부대로 만들고 고국원왕 역시 바보로 만들어버리는 서술이자 고인모욕이니 고구려 입장에서는 화가 머리끝까지 날 수밖에 없는 서술이다.


다른 대목도 살펴보자.


지금 연(璉)의 죄로 나라는 어육(漁肉)이 되었고, 대신(大臣)과 강족(强族)들의 살육됨이 끝이 없어 죄악이 가득히 쌓였으며, 백성들은 이리저리 흩어지고 있습니다. 이는 멸망의 시기이며 도움을 받아야 할 때입니다.
- 위서 권100 백제전

연(璉)은 고구려 장수왕의 이름이다. 장수왕이 정치를 잘 못해서 나라가 완전히 고깃덩이가 되고, 대신과 귀족들을 죄 없이 죽이고 있다는 말이다. 이는 아마 평양 천도 과정에서 있었던 장수왕과 귀족세력 간의 권력 다툼을 의미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에 갑자기 고구려가 스스로 남긴 기록들이 빈약해져 정확하게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평양 천도는 상당히 지지부진하면서도 힘겨운 과정이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내전이 일어났으리라 주장하는 학자까지도 있다. 어쨌거나 이유가 뭐든 '고구려 국왕이 잔인해서 죄 없는 신하들을 막 죽여대고, 이것 때문에 민심이 심상치 않대요~'하는 셈이니 장수왕 입장에서는 모욕적이다.


사실 이 소식이 고구려의 귀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별 문제는 없었을 것이다. 북위는 당시 전성기를 맞았던 고구려를 공격하는데 부담을 느끼고 온건하게 돌려 말하며 개로왕의 요청을 거부했다. 그러면서 무려 장수왕에게 조서를 내려 백제 사신들을 백제로 안전하게 보내주라고 명령했다.

장수왕은 당연히 이를 거부했고, 어쩔 수 없이 북위로 돌아온 백제 사신은 산둥에서 뱃길로 백제를 향해 떠난다. 하지만 이들은 풍랑을 만나 떠다니다가 끝내 백제로 돌아가지 못한다. 개인적인 상상력을 추가하자면, 이 일련의 과정에서 북위가 고구려에게 넌지시 백제의 입장을 알려주거나 국서 자체가 장수왕의 손에 들어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고구려 몰래 바다를 통해 건너온 사신들을 굳이 안전한 육로로 귀국시키겠다며 고구려 장수왕에게 배웅을 부탁했으니 말이다.


백제는 이를 계기로 다시금 북위와 단교했고, 장수왕은 북위와의 관계를 다지며 전쟁준비에 돌입한다. 개로왕이 국서를 보냈던 472년 가을을 기점으로 고구려가 북위에 보내는 공물의 양이 두배로 늘어나기 때문이다. 이는 고구려가 북위와 백제의 협력을 견제하고, 후방의 위협을 차단하기 위한 속셈으로 보인다. 그리고 백제 쪽에도 공작을 가하는데, 그게 그 유명한 승려 도림이다. 결국 고구려는 3년에 걸친 준비 끝에 백제의 수도 한성을 급습해 단 일주일 만에 한성을 함락시키고 개로왕을 사로잡는다. 사서에는 개로왕에게 침을 뱉으며 모욕한 다음 개로왕을 죽였다고 돼있다. 이를 계기로 한성 백제는 몰락하고 백제는 웅진으로 천도하면서 암흑기를 보내게 된다.


개로왕은 대체 왜 그런 공격적인 편지를 보냈을까?


북위가 그렇게 나를 쌩깔 줄 몰랐으니까!!



참고문헌

구영모, 『2024 선생님을 위한 한국사』, 박문각, 2023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6: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 - 백제』, 국사편찬위원회, 2013

변태섭, 『한국사통론, 삼영사』, 2007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 사료로 본 한국사

국사편찬위원회, 한국고대사료DB,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국사편찬위원회, 한국고대사료DB, 「삼국사기 백제본기」

국사편찬위원회, 한국고대사료DB, 「삼국사기 신라본기」

국사편찬위원회, 한국고대사료DB, 「위서 고구려전」

국사편찬위원회, 한국고대사료DB, 「위서 백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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