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요우 Oct 06. 2021

낭만산책-안양천 합수부

찾아내기

  햇살 눈이 부신 쨍쨍한 날을 정말 좋아한다.  마나 좋아하냐면 스무살 대학생이 되어 처음 만든 이메일 아이디가 '화창한'이란 형용사였다. 얼마나 일차원적인 사고방식을 지녔는지 이변이 없 지금까지도 쓰고 있다.

아우라를 두른 듯 태양빛처럼 빛나는 오렌지색 역시 애정해 마지않았다. 얼마나 맹목적이었냐면 옷과 신발은 물론이요, 학용품이나 소지품까지도 그 색상을 고집하고 모았을 정도였다. 입시 미술학원에 다닐 무렵 이런 편파적인 색상 사용으로 자제를 권고받을 정도였다.

  왜 그랬을까?한낱 해프닝으로 웃어넘기기에는 뭔가 심리적인 원인이 있었을 것이다.

비루한 학창 시절을 어서 종결하고,활기찬 에너지를 담아 찬란하게 날아오르길 바라는 마음에서였을까? 남루한 일상에서 탈피해 제법 괜찮은 내가 되고 싶은 바람이 담겨있던걸까?  애써 억지로 꿰맞춰본다.

태양을 사랑한 화가 고흐는 본인이 선호해 마지않던 태양빛 노랑을 작품에 즐겨썼다. 비록 우울증에 시달리며 비참한 말로를 맞이했지만 그림 속 그의 흔적은 지금까지도 찬란하게 빛을 비추인다. 그는 어떤 마음으로 그런 색상을 좋아하게 된것일까?

  

  활기차고 싱그러운 것들에 대한 동경, 태양 아래 한점 부끄럼과 모자람없이 당당하고 완벽해고 싶은 열망, 도드라지게 부각되어  특별해지고 싶은 갈망이 있었다. 품었던 욕심들이 반영되어 훌륭한 어른으로 장성하고, 여분의 욕망들이 어느 정도 해갈될 상황은 결국 오지 않았지만. 그저 그런 무색무취의 밋밋한 모양새로 성장해 버렸지만. 

  희한하게도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남들과 다른 것에 자부심보다 불안감이 몰려오고, 특화되는 것보다 적당히 섞여들어가 융화되는 것이 좋아졌다. 튀는 것보다 스며듦이 좋아지는 것은 어쩌면 [이솝우화] 속 신포도 에피소드와도 비슷한 심리일지 모르겠다. 결국 못가질거면 어차피 별로였을거라며 평가절하하고, 지레짐작 포기하고, 애써 별것 아닌듯 태연한척하는 그런 마음이 발현된 것일지 모르겠다.

찬란한 태양빛이 선사하는 아름다운 색의 향연을 사랑했던 나는 그 마음을 고이 접어넣고 한때의 객기와 망상, 착각으로 치부하며 지극히 현실과 타협하는 사람이 되었다.


  드러낼 밑천 바닥나고, 숨길 것이 많아지는 나이로 접어드니  속내 비추이고 어두운 내면까지 구석구석 후벼팔 것 같은 햇빛을 민낯으로 마주할 용기가 사라졌다. 흙탕물마저 구성 성분을 낱파헤쳐 밝혀줄 것만 같은 햇빛 눈이 부신 날이 어느 순간부터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착색된 기미의 흔적 외양뿐만 아니라 내면의 밑바닥까지 들춰내어 탄로날까 두려운 햇빛을 회피하기 시작했다.

적당히 감출 수 있는 그늘지고 꾸물거리는 음흉한 속내를 가진듯한 날에 마음이 가기 시작했다. 우중충하게 낮게 드리운 구름이 어둠을 쏟아낼 것 같은 음산한 한기가 드는 날이면 어김없이 비를 마중나온 지렁이처럼 길위로 산책을 나섰다.

  이런  날은 할 이야기가 많아지는 구름이 주인공이다. 하늘이라는 무대에 태양을 주연으로 자리매김해보는 일차원적인 대응 구조를 그려본다면 해에 가려져 있던 구름이 드디어 주연 자리를 꿰차는 순간이다. 치 모노극의 주인공처럼 독백을 통해 홀로 쌓아둔 이야기를 풀어낼것만 같다.

그들이 바람에 밀려 느리게 형태를 바꾸고 위치를 이동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름의 다양한 변주에 감탄을 금치 못한다. 그저 태양의 간접 조명을 받아 은은하게 그 위치를 알리거나, 빛의 부재시 묵묵 자리를 지키며 존재를 알리 구름 단연 그날 원탑의 주연이다.

층층이 자리한 적란운들이 두텁게 층을 이루고 중첩되고 갖가지 형상 만들어낸다. 흰 구름과 파란 하늘이라는 단순 명료한 도식구조가 아니라 구름안에도 하늘과의 경계면 상으로 미묘한 그라데이이 펼쳐진다. 하늘보다 은 면적을 지닌 구름이 보여주다양한 칼 스펙트럼이 있다. 보카시는 노을하늘에만 존재하는 건 아니었다.

  

  지리한 장마철, 비가 잠시 소강 상태를 보일때 신산한 기운이 감도는 무거운 공기 지면까지 내려앉을 듯한 중압감을 주는 구름사이로 언뜻 비추이 열기 식은 태양빛을 본 적이 있다. 따갑게 비추이지 않기에 눈을 찡그릴 필요없이 한결 마주하기 편다.

  그날 나는 안양천 합수부에 있었다. 영등포 언저리 안양천 둘레길서 문래를 지나 한강과 접하는 인근이었다.

  일렁이는 바람결 사이로 황야의 풀들이 누웠다가 흔들리거나 곧추선다. 바람의 결이 바뀌어가는 대자연 속에 흔적없는 태양빛이 가늘게 숨죽이고 있다. 낮게 숨죽여 동요하는 이파리들의 소리는 흡사 종이 연필이 사가각거리며 일으키는 마찰음과도 같다. 아직 가본 적 없는 [폭풍의 ] 속 히스 황야가 이런곳이?

  사람키-흔히 통용되는 표준 신장이 아닌 키작는 여자 정도 되는 높이로 빼곡히 자란 덤불속에서 홀로 적막 체험을 즐긴다. 슬으슬할 정도로 서늘한 날씨에 오로지 나뭇잎 바스러지는 소리와 내 숨소리만 존재하는 것 같은 착각빠진다. 내가 아는 한 그곳에서만 느낄 수 있는 기분이다.

  간혹 바람이 핑그르르 돌아 바닥의 흙먼지와 모래알이 눈에서 작게 원을 그리며 소용치기도 한다.  사이를 지나칠때면 마치 범접할 수 없는 주문이 걸린 관문을 통과하는 전사가 된 듯한 특별하고 신비로운 기분에 빠진다.

  초가을에 접어들 무렵 그곳을 지다면 여름이 지날때까지 미처 알아보지 못했던 담이 덩굴을 마주하기도 한다. 생각지도 못한 별책부록, 외전이다.

초록의 신록으로 우거진 수풀들어울더울 뒤섞여 혼재여름 담쟁이 가을이면 미운오리새끼가 백조로 탈바꿈되 도드라지게 존재를 알리며 변신한다. 특히 우중충한 공기중의 습기를 잔뜩 머금은 흐린 이면 이파리의 색상은 더욱 선하기 돋보인다. 빛이 반사될때 미처 보이지 않던 잎맥마저 선연히 드러난다.

  역사와 시간을 더해주고 차가 건축물의 외관을 따스하게 덮어주는 담쟁이 덩굴 보며 유서깊은 역사 품고 있는 식물에 경외심이 들었다. 세월의 더깨 고스란히 맞 채 얼마나 오래도록 인고의 세월을 굽어보고 었을지 상상해본다.

얼마나 많음 사람들이 여기를 오갔으며, 숱한 역사의 풍파를 맞고 버텨왔을.

담쟁덩굴이 얽힌 아치형 문앞에 서서 나도 지갈 역사의 일부가 겠다는 영광스러움을 등에 업는다.


  안양천 합수부서 태양빛이 최대절제되고 제된 채 구름과 자이 만어내는 변주에 스며들다. 하늘이 보여주 다른 세계를 목도했다.

  밝 않아도 괜찮음을, 음지도 충분히 매력이 있음을, 빛나는 것만이 소중한 것은 아닐것이다.

꾸물거리며 조심스레 펼쳐놓는 나름의 미학이 있고 나는 그것을 발견하는 것이 제법 좋아지고 있다.

이전 12화 느슨한 운동이 주는 편안함, 겨울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