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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요우 Oct 03. 2021

통증을 줄이는 방법

찾아내기

  혼자 산책하는 것을 즐긴다. 집에서 가장 먼 곳까지가 그날의 목표이고 록을 갱신한 날이면 육체의 고통보다는 쾌감이 앞선다.

나에게 산책은 운동을 대신하는 대체제로서이기도 하지만 생각을 가다듬기 위한 수련의 일종이기도 하다.

  어느날 도서관에서 <산책하는 마음>, <걷는사람> 두권을 발견하고는 걷는 자들만이 느낄 수 있는 희열을 이토록 잘 표현해 놓은 글들이 있음에 감탄하며 음미하 오래도록 읽었.

그들이 소개하는 산책과 걷기는 정적이면서도 동적이고, 고단할지언정 끊을 수 없을만큼 매혹적이다. 아마 마라토너가 느끼는 러너스 하이처럼 통증을 동반하는 즐거운 성취감이 있다면 그런 것이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산책하는 마음>의 박지원 작가는 치열하게 성취하는 것이 아닌 그저 느리게 흐르는대로 자연스럽게 걷는 행동의 중요성을 설파한다.

  <걷는 사람>의 하정우 배우는 촬영이 있는 날마저 촬영장까지 걸어갈 정도로 극한까지 몸을 밀어부치며 체력의 한계를 넘어 온 에너지를 모아 걷는데 할애한다.

수단과 방법은 다를지언정 우직하게 나아간다는 점, 좋아하는 일을 일상 생활에 루틴으로 받아들여 습관화시키고 고착시켰다는 점, 그 일련의 기록과 생각들을 놓치지 않고 기록으로 정리해 승화시켰다는 점 공통점이었다.

걸으며 삶을 관조하고, 인생을 관통하는 혜안을 얻은 현자들의 대담집을 보는 기분이었다.


  이쯤에서 나의 유형을 말해보자면 산책보다는 강도가 조금 더 쎄고, 감히 마라톤까지는 근접할 수 없는 조금 잰 걸음의 도보파이다. 웰시코기처럼 짧은 다리로 종종거리며 산책 내지는 걷기 그 어느 애매한 중간 지점에서 부유하는, 먼지같은 떠돌이 유랑자이다.

  그렇게 경의선 숲길, 서대문 안산 자락길, 광천 안양천 수변길, 북한산과 백련산, 인왕산과 북악산, 낙산 성곽길, 남산 등지를 맴돌았다.

트레킹화나 등산화, 등산 스틱이 필요할 정도의 강도는 아니었다. 그저 낡고 가벼운 런닝화와 에코백에 이어폰, 커피와 약간의 간식이면 되었다.

  

  계절마다 다른 수목의 내음과 미묘하게 변하는 색상을 알아채는 것, 상전벽해를 이루는 도시 건축물 속에서 아직 보존되고 있는 옛 흔적을 찾아내는 것, 높은 곳에 올라가 도시를 내려다보는것은 뭔가 울컥하며 이루말할 수 없는 감흥을 준다.

장대한 대서사시같은 도시의 변천사 속에 나도 그곳의 일원으로 잘 살아냈다는 결속감이 든다. 분주한 거대 도시 속에서 들림없이 내 자리를 지키며 발을 건재함에 스스로에 대한 대견함도 밀려온다.

이처럼 이유모를 자긍심에 빠지는 내려보는 걷기에서 평행선으로 합쳐지거나 올려보는 도보로 접어들면 또다른 느낌이 든다.

시점의 차이, 소실점의 위치로 머리속 생각과 떠오르는 연상이 달라진다니 걷기는 얼마나 창의성을 발현시켜주는 일인지! 어딘가를 향해 발을 떼는 순간부터가 생각의 영역이 확장되는 시작이다. 유랑하듯 의식의 흐름이 꿈틀거리며 자연스럽게 생각의 물꼬가 트인다.


  동네를 어슬렁거리며 기웃대고, 무모하리만치 진득하게 걷고 또 걷는 것은 중독성이 강한 매혹적인 일이다. 동네마다 품고 있는 이야기를 서랍열듯 꺼내어보는 것과도 같다. 그 중에는 유난히 마음에 박히는 곳이 있다. 호흡, 햇살, 바람의 결까지 특별한 기운을 주는 곳이 있다. 그렇게 한번 들어가보고 싶은 집이나 카페, 다시 걷고 싶은 길을 발견하면 아르키메데스가 된 듯 유레카!를 외친다.

  무작정 걷는 것은 해내야 할 성취 목표가 없는 것의 홀가분함, 다양한 길 앞에서 어디로 향할지 선택하는 즐거움, 한쪽 길을 선택하며 놓치는 나머지 길에 대한 아쉬움, 다음에는 다른 길도 봐야겠다는 희망과 기대를 준다.


  때로는 순수한 걷기에서 벗어나 목적성을 띤 도보를 행하기도 한다.

추사 김정호처럼 갈 곳을 정하고 지도를 그려보고, 골목골목을 누비며 수정•보완 작업을 거친다. 15세기 대항해 시대의 바르톨로유 디아스처럼 도시 항해자가 되어 거리를 나선다. 바다의 항해자, 탐험가 혹은 시각에 따라 침입자, 약탈자인 것처럼 나의 여정도 걷기의 맥락에서 본다면 순수한 의도가 배제된 임장일 때가 있다.

시장조사를 통 도시를 스캔하며 가치를 매기고, 실거주의 장•단점들을 면밀히 살핀다.

발전 가능성이 농후한 곳, 현재 정점에 이른 곳, 과거 유서깊던 곳을 찾아다니며 차후 거주지를 고민다.


  간혹 아이들과의 추억을 쌓기 위해 도보를 함께한다. 걷기는 우리가 같이 할 수 있는 운동이자 취미였다. 각자의 체력 상태, 운동 신경, 취향이 다르니 함께 배드민턴, 농구, 인라인, 수영 등을 즐길 수는 없지만 같은 공간을 걷는 것은 가능하다. 러닝 메이트처럼 시간과 장소를 맞추어 나란히 걸어나가평소에는 하지 않던 별의별 대화를 나누고는 한다. 


  이렇게든 저렇게든 걷고 난 뒤에는 통증이 밀려온다. 정확하진 않지만 대략 7.7km를 기점으로 종아리의 뭉침이 찾아오는데 그건 꽤나 기분좋은 쾌감이다. 스스로에게 허락할 수 있는 한도 내의 아픔이다.

아들1은 안양천부터 한강까지 도보 한 날 그 행적을 일기장에 이렇 묘사했다.

'신체에 자발적으로 물리적 압박을 가해 얻을 수 있는 기분나쁘지 않을 정도의 고통과 통증. 그로 인해 얻는 즐거움'

걷기의 속성을 이렇게제대로 간파했다니.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 일기를 끝으로 아들은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즐거운 통증의 화 과정은 체험하지 못했다.

  언젠가는 다시 릴레이 걷기가 이어질 것이다. 건실한 청년으로 성장해 노모와 걸어줄지도 모른다. 꼭 그렇지 않더라도 혼자 혹은 누군가와 걸으며 걷기의 고통과 즐거움을 견주고 있게 되길 바란다.

  이쯤해서 방언터지듯 간증한 걷기 예찬을 마칠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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