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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요우 Oct 12. 2021

라면이 맛있게 끓여지는 시간

참아내기

  아이들이 어설픈 뒤척임 속에 렘수면으로 정착하는 10시 무렵은 내가 라면물을 조심스레 올리거나 냉장고 문을 바삐 여닫으며 주전부리를 찾는 시간이다. 왜 꼭 그 시간이어야하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딱히 할말은 없다. 그냥 그 무렵은 마음의 평화, 입맛의 회귀가 접점을 이루는 때이다. 특히 밤 시간의 라면맛은 한강 라이딩 후 강바람을 맞으며 먹는 사발면만큼의 가치를 지닌다.

단 아주 가끔이어야 희소성이 주는 아쉬움의 미학을 느낄 수 있다.

야식의 종류는 매번 바뀔지라도, 어느날은 야식이 늦은 저녁을 대체할지라도 포기할 수 없는 루틴이다. 이는 고단하고 수고스러운 하루를 마감하는 나만의 신성한 의식과도 같다.

  새 생명을 잉태하기 위함이 아닌데도 중독적으로 그 시간이면 먹을 것을 찾고, 기어코 먹고야 마는 이 증상을 입덧 빗대어 먹덧이라고 스스로 명명했다.


  분주히 돌아가는 시간대에 미처 누리지 못한 여유를 되찾는 그 시간. 좋아하는 티브이 프로그램을 켜두고 아이들이 깨지 않도록 사부작거리며 주전부리를 먹는다. 피곤 지쳐 아이들과 함께 잠든 남편의 코골이 소리를 배경삼아  혼자 하루를 끝맺는 홀가분하고 안온한 의식을 치른다.

  야식의 메뉴는 그다지 특별할 것이 없다. 아이들에게 건강상의 이유로 금지하고 자중시켰던 것, 늘 접하는 저염식이나 자연식에서 벗어난 자극적인 것, 무엇보다 빠르고 쉽게, 조용히 조리 가능한 것이어야 한다. 그렇게 물망 오른 것 중 하나가 라면이다.

배달의 수고로움, 한밤 중 뜬금없이 울리는 벨소리는 차치하고라도 혼자 미각의 사치로 즐기기엔 치킨, 족발, 보쌈 같은 배달 음식은 너무 거창했다. 더구나 나머지 가족들을 배신하면서까지 독점으로 먹기엔 죄책감마저 밀려왔다.

그보다는 늘 찬장에 비치된 각양각색의 라면들 중 하나를 집어드는 편 도의적으로 옳았다. 간편성, 조리과정, 가성비, 접근성, 다양성 측면에서 이만한 건 없었다.

  대부분은 포장을 뜯고 그대로 끓여내 마성의 스프가 전하는 고유성을 즐기지만 가끔은 계란, 매생이, 굴, 만두, 꽃게, 치즈 등 첨가다. 주로 냉장고 안 구비 여부나 유통 기한의 임박성, 그날의 영양 상태에 따라 곁들임은 달라진다.

여하 5분에서 10분 내외로 탄탄한 기본기 갖춘 만찬은 차려진다.

  모두 잠든 밤 혼자 먹는 라면의 맛이란 단순히 음식이 지닌 의미를 넘어 소박한 일탈을 안겨준다. 기본적인 영양 보충의 기능을 넘어 정서적 허기까지 달래주는 것이다. 무사한 하루의 끝맺음을 알리는 마중물이 되는 것이다.


  회사 다닐 때만 해도 여유롭 한갖지게 만찬을 즐 여유따윈 없었다. 집중해야 할 업무들이 산적해 있었고 해결해야 할 일들은 화수분처럼 늘어나서 퇴근을 붙잡았다. 그런 상황 속에서 저녁 식사는 '일을 하기 위한 에너지 섭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저 빠른 속도로 허기를 채우기에 급급했다. 어찌보면 식사 시간조차 잔업을 위한 연료의 개념이요, 야근의 연장이었던 셈이다.

야근으로 점철된 17여년의 시간이 흐른 뒤 가정으로 돌아왔을 때도 저녁 식사의 행태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끝없이 무한정 반복되는 가사 안에 호기로운 식사가 들어설 자리는 없었다.

  식사에 제법 공을 들여야했던 모유 수유 기간을 제외하고는 생략과 결핍이 다반사였다. 아이들을 위해서는 시간과 정성을 담뿍 쏟고 정작 나에게는 간편식 위주로 최소한의 노력을 들였다. 하루 일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장보기와 음식 장만의 결과물인 식사를 나까지 마음놓고 하기에는 제살 파먹기처럼 노동의 강도가 커질것임을 알기에 썩 내키지 않았던 것이다.


  가끔씩 보온 도시락을 두 개씩 싸주던, 급식이 없던 시절을 지낸 30여년 전 엄마의 노고를 헤아려보고는 한다. 밀키트도, 배달도, 외식도 없거나 흔치 않던 시절, 매일의 끼니를 준비하던 모습을 떠올려본다. 가공 식품이나 조미료도 다양하게 세분화되지 않았던 때였다. 이른 새벽부터 굽고 가시를 발라낸 생선들이 어묵이나 햄, 소시지 등의 인스턴트 대신 들어차 있었다. 기름 냄새를 감내하며 튀겨졌을 수제 돈까스가 자리했고, 밥 사이로 꾹꾹 박혀 숨겨진 장조림, 거의 바닥을 보일때쯤 계란 후라이가 등장했다. 딸이 양질의 단백질을 독점해 섭취하길 바라는 엄마의 치밀한 계략이었다.

맛의 기교나 변주가 크지 않은 자연식, 저염식이었지만 그 덕분에 지금까지 고른 식성을 가진채 탄탄하게 성장하게 되었다. 2년마다 한 번 씩받는 위내시경에서 핑크색 영롱한 속살을 지닌 위 내시경 사진을 마주할때마다 제 역할을 다해준 몸속 장기들과 올바른 식습관을 잡아준 엄마에게 감사한 마음을 품는다.

  반면 엄마는 열과 성을 다해 그 많은 분량을 해내고 정작 부실하게 영양실조에 가까운 식단을 고수했다. 식탁에서 라면이나 국수등의 간소한 식단으로 때우곤 했던 모습이 뇌리에 남아 있는데 아마 지금의 나와 비슷한 이유에서였을 것이라고 가늠해본다.

  아무리 라면이 맛있다한들 그 옛날 집밥과 도시락에는 가닿지 못하는 결핍이 분명 존재하리라 본다. 라면물을 올리며 정작 최소한의 끼니로 삶의 위안을 얻었을 엄마에게 좀 더 자주, 좋은 음식을 사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해다.

같은 동지로서 마주해보는 풍성한 식탁을 그려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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