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요우 Nov 02. 2021

떨어지고 있는 중입니다.

덜어내기

  어느 계절과 계절 사이에는 붙잡고 싶은 미련이 남는다. 봄과 가을처럼 스며들  없이 지나가는 찰나의 계절이 그러하다. 영속적인 지속성까지 바라는 건 아니지만, 조금 더 오래 머무르기를 은연중 소망하고, 다음 계절이 지척에 당도해 대기하고 있는것이 결코 달갑지 않다.

  몸은 겨울의 더깨를 덜어내지 못했는데 어느새 개나리, 목련이 성급하게 존재를 알린다. 뒤이어 살구꽃, 벚꽃, 진달래, 철쭉 등이 피어나 촬영장에서 여배우들을 비추이는 반사판처럼 세상을 향해 빛을 발하고 겨울의 묵은 공기를 말갛게 씻기운다. 약 2~3주 봄꽃의 향연, 내 마음 속 빙하가 스르르 녹으며 바지런히 봄의 도래를 영접할 시이다. 신정이 아닌 개화에 맞춰 한 해를 시작함이 옳다며 혼자 고개를 주억거리고 심기일전을 한다.

하지만 애꿏은 봄비 몇 번, 아직 가시지 않은 겨울의 매서운 바람에 가냘픈 꽃잎들은 금세 종적을 감추고 퇴장한다.

다행스럽게도 곧 다가올 계절에는 풍성한 대지의 녹음이 펼쳐진다. 꽃이 진 그 자리에 푸릇한 생명들이 양산될 것이기에 성급히 작별을 고한 봄에 아쉬움이 덜하다.

  반면 수확의 계절 가을은 봄과는 다르다.

옷장에서 트렌치 코트와 머플러를 꺼내고 떨어지는 모든 것들-심지어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은행일지라도-을 사랑해야겠다는 마음을 가지는 찰나 홀연히 겨울에 흡수되어 버린다.

  초여름-장마-한여름-인디안 썸머-태풍, 그리고 초겨울-겨울-늦겨울. 이것이 내가 체감하는 한국의 계절이다.


  가을은 한 해의 결과물을 우수수 떨어뜨려 자연으로 다시 환원시킨다. 때로 여분은 솎아내고, 비와 바람의 도움으로 마지막 잎새까지 떨구며 무로의 회귀를 준비한다.

기만의 방식으로 소멸 의식을 마친채 내면의 휴식, 동면에 들어간다.

  두세 장 남은 달력을 넘겨보며 복잡한 심경으 미처 마무리짓지 못한 한해의 다짐과 결심을 되내인다.

  가을은 분명 존재하지만 준비가 덜 된 나는 마주 바라볼 심적 여유가 들지 않는다.마음마저 꽁꽁 얼려버릴듯한 시베리아산 냉기를 맞이할 채비도 되지 않았지만 그 해의 마무리를 지어야한다는 것이 못내 부담스럽다.

가을에는 온전히 계절을 만끽하지 못하고 그 너머 다음 계절의 도래를 미리 걱정하고 염려하는 것이다.


  차 후면 유리창과 뒷 트렁크 경계면에 은행잎을 잔뜩 내려앉힌 차들이 지나간다. 무심한듯 태연하게 가고 있지만 차주는 알고 있을 것이다. 단지 덜어낼 여유보다 재촉해야 할 걸음이 먼저일 뿐일테다.

차가 지난 자리로 흩날리는 낙엽이 동그랗게 원을 그리며 파르르 소용돌이친다. 가을의 향기가 그 안에 봉인된 것만 같다.

넓적하게 퍼진 플라타너스 잎은 청량한 바삭 소리를 낸다.

오감으로 가을을 느끼며 이제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작별을 고하고, 텁텁하고 부담스러워 찾지 않던 라떼류와 몸을 뜨겁게 재부팅해줄 유자차, 생강차를 상비약처럼 구비해야함을 느낀다.

  지난 겨울 세탁소 나들이 후, 오래도록 옷장의 수문장 역할을 했던 두께감이 있는 옷들을 흘긋거리며 겨울이 들어올 자리를 가늠해본다.


  늘  때가 되면 차례로 계절은 바뀐다. 틀림없이. 어김없이. 한결같이.

  변화의 족적이 느껴질때면 성찰의 시간을 내어본다. 직장에서 분기별로 자기평가를 매기듯이. 정량적인 기준은 모호하기에 정성적인 평가를 내려본다.

  내 인생이 찬란하게 개화해 만개하던 시기는 언제였을까. '떨어지고 있는 시간'은 언제인걸까. 떨궈내고 솎아내야 할 삶의 부분은 어느 구간인건가. 내 삶을 무사히 안착시키고 충분한 동면을 취한 뒤 다시 부활의 시간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인지.

  미약하고 설익은 결과물은 알차게 발화시키고 싶고, 부끄럽고 숨기고 싶은 기억은 동토의 땅에 영원히 봉인시켜 소멸되길 바란다.

걔중에는 싹이 트지 않거나, 단단한 얼음장을 뚫고 뾰족이 고개를 내미는 '변수'라는 녀석도 있을 것이다. 솎아낸 줄 알았던 것들이 강인한 생명력을 자랑하며 잡초처럼 무성히 자랄지도 모를 일이다. 떨어져야 할 때까지 버티다 찬 서리를 맞고 도중에 꺽여버릴 수도 있다.

  현명하게 계절을 나는 동식물처럼 계절을 건너는 방법을 알고싶다. 거듭된 진화를 통해 탄생한 현생  인류이지만 아직 나는 모르겠다.




이전 08화 퇴사, 삶에서까지 은퇴는 아니지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