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이 준 선물
잃어서 얻은 것들.
아침부터 에너지를 탕진하듯이, 새벽기도회의 셋째 날을 채우고 돌아왔다. 아무도 주지 않은 눈치를 엄청 본 탓이었다. 성향이 infp인 나는 주목이 늘 어렵다. 심지어는 내 이름이 평이한 것에 늘 감사하는 편인데 이유는 잊히기 쉬운 편안한 이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한번 들으면 강렬히 잊히지 않을 만한 이름을 가진 이들을 안타까워할 정도다. 그러나 반전! e형인 사람들은 그런 자기의 이름을 자랑스러워한다. 잊히지 않을 만한 이름을 가졌다고 말이다.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나는 고요한 예배의 시간을 너무 좋아하지만 사람들이 잔뜩 쳐다보면 찬양대에 서는 게 참 부담스럽다. 오늘은 우리 교구 사람들이 특별새벽기도회 성가대를 하는 날이었다. 우리 딸들이 극렬히 싫어하며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던 성탄 특집 특송 탓도 있었다. 아마 절대 안 가겠다고 할 텐데….
새벽 4시에 일어나서 뒤척거리다 열심히 아이들을 깨워본다. 오늘은 큰 딸은 부지런히 일어났는데 작은 딸이 영 잠에서 깨는 것이 개운하지 않다. 아무래도 같이 잠을 자면 제일 불편한 것이 우리 둘째가 아닌가 싶다. 엄마 곁에 누웠다가 깊이 잠들지 못한 듯하다.
모두 깨나서 겨우 옷을 입고 나니, 이제는 빵과 음료수를 먹겠노라고 자리에 앉는다. 밥을 먹지 않고 나가거나 당이 떨어지면 쉽게 화를 내거나 보채는 부계 유전을 지닌 두 딸을 데리고 나가려면 꼭 무엇이든 먹고 가는 게 좋다. 다행히 빵과 핫초코도 잘 먹이고 교회에 도착하니, 예배를 준비하기에 딱 좋은 시간이다. 하지만 성가대에 합류하기엔 너무 늦어버린 시간.
차를 주차하고 지하에 가서 어린이 출석 스티커를 먼저 붙인다. 스티커 붙이고 본당에 들어와서 예배를 드린다. 어제까지는 그저 감사하기만 했던 시간이었다. 내 곁에 있는 아이들과의 이 기도 시간, 이 평안한 기쁨.
오늘은 왠지 죄스러우며 복잡하고 불안한 마음이 나를 채우고 있다. 사랑스러운 아이들도 밉게 보인다. 조용히 예배를 드리다가 내가 건넨 연습장에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는 둘째도, 졸리니깐 수학 문제 내달라는 첫째도 곱게 보이지 않던 아침 시간. 어제까지만 해도 함께 함만으로도 감사한 시간이었건만 이제는 나도 모르게 아이들에게 경건한 자세마저 요구하고 있었다.
무사히 예배를 드리고 마무리가 되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자동차 안에서 갑자기 모두의 마음이 편해졌다. 이곳을 벗어났다는 나의 기쁨(많은 사람들 사이를 벗어난 기쁨)이 모두에게 퍼졌던 걸까?
빠르게 집으로 돌아와 맛있게 아침을 먹는다.
집으로 돌아와서 키보드 앞에 앉은 이 시간. 나의 복잡했던 마음을 돌아본다. 오늘 내가 가장 힘들었던 건 자기 자신에 대한 비판이었다.
‘왜 구역 전체 성가대 모임에 가지 않니? 문자를 받고도 안 가면 되겠니? 그렇게 자기 마음대로 하면 어떻게 해? 싫다고 안 하면 어떡해! 네 마음만 중요한 게 아니야! 어쩜 이리 이기적이니?’
스스로를 다그치는 그 목소리에 이미 지쳐버린 내가 보는 세상이 정말 피곤했던 것이다.
나랑 협의된 사항도 아니고, 약속한 것도 아니건만. 안 가도 되는데… 의무도 아닌 것들을 종종 만나게 된다. 그 고지된 어떤 명령(?) 조의 이야기를 보면 나도 모르게 따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못 지키면 괴롭다. 이유는 타인에게 비난받을 거 같기 때문이다.
나의 감정의 속으로 들어가서 살펴본 내 마음. 내 마음이 불안한 이유는 공동체적인 행동을 따르지 않을 때 나타날 비난이나 배제될까 두려운 마음.
단절에 대한 두려움. 외로움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긴 세월, 나를 피곤하게 했던 것. 타인의 비난과 인정. 여전히 다 물리치지 못하고 있음을 다시 인정하게 된다. 이런 나를 위로하는 문장 하나를 보며 다시 마음을 다독인다.
“불안은 삶의 방식을 바꾸라는 신호입니다. 삶의 방식을 바꾸면 인생의 앞길이 한층 넓어집니다. 그러므로 불안은 매우 훌륭한 기회이기도 합니다.”
- 불안한 마음을 안아주는 심리학 중에서
오늘의 불안 속에서 나는 또 공동체의 뜻을 따라야만, 착한 아이가 되어야만 살아갈 수 있다는 작은 관념 하나를 만났다. 그 관념에게 꼭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그걸 따르지 않아서 미움을 받는다고 해도 내가 나를 지켜주겠노라고. 괜찮다고… 너의 마음을 이해한다고.. 나를 토닥인다.
그렇게 그렇게, 나를 토닥이는 시간. 불안 대신 부모 자아인 내가 따뜻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볼 수 있음이 감사했다.
가끔은 인간의 무의식적 프로그래밍(가치관과 자아관)은 7세 이전에 결정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화가 났었다. 내가 결정할 수 없는 부모와 상황, 그리고 하필이면 모범생인 맏딸 언니와 하나뿐인 아들 사이에 태어난, 집에 없어도 괜찮았을 둘째 딸인 내 위치와 이해받지 못한 마음과 나를 하찮게 바라보던 시선을 기억하며 화가 났다.
내가 받지 못한 것들, 그리고 어쩌면 다시는 절대 받지 못할 것들에 대한 원망.
‘왜 하필 그게 나였을까?’
수많은 시간의 방황 끝에, 그런 시간이 있었기에 어른 자아인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어른 자아가 언제든 나를 위로하고 다독일 수 있다는 놀라운 삶의 비결을 발견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내가 나였기 때문에 얻은 기회이자 은혜이다.
그것은 내가 받아야만 했는데 받지 못한,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단지 다른 모습을 한 채로 나를 기다리는 선물이었다. 찾기 위해 시선을 돌려보면 언제든 발견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내 마음에서부터 세상의 모든 것들이 내게 내밀고 싶어서 곁에 머물러 있던 것들이었다.
오늘도 잃었다고 생각한 것들 덕분에 얻은 것들이 나를 일으킨다. 불안과 두려움은 나에게 다시 회귀해서 나를 다독이는 시간을 허락해 주었다. 그냥 처음부터 받았으면 당연하게 여길만했던 것들을, 돌아 돌아 만났다. 어쩌면 그래서 더 귀하고 가치 있음을 알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결국, 삶은 늘 내게 좋은 것을 주기 위해 손 내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