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집으로
언제 집에 갈 수 있냐고 첫째 날부터 물어온 나인데, 드디어 오늘 집에 간단다. 사실 어제도 수 차례 체크했다. 이제 검사 할 거 다 한 거 아니냐고. 응 그건 맞는데, 의사랑 아침에 면담을 해야 집에 갈 수 있단다. 첫 날 CT 만 찍고 바로 집에 갈 줄 알았는데, 나흘이나 병원에 잡혀 있었다.
드디어 넷째 날 아침, 의학드라마에서 보는 장면처럼 의사들이 우르르 침대를 돌아다니며 그 중 젤 높아 보이는 사람이 이것저것 브리핑을 해 주었다. 나는 나름 준비해 놓은 질문리스트들을 읊었는데, 사실 조직검사가 나오기 전이라 의사가 해줄 수 있는 말은 별로 없었고, 나도 며칠 전 들은 당부대로 이리저리 열심히 검색해보지 않았기에 사실 질문이 많지도 않았다.
그리고 드디어 퇴.원.
나흘만에 4킬로가 빠져있었던 터라 근처 한식당으로 가서 오랜만에 제대로 된 밥을 먹었다. 그 나흘이 보통 나흘이 아니었기에 우리 부부는 신혼 때로 아니 연애 때로 돌아간 양 1분 1초도 허투루 보내지 않고 세상 아껴주며 배려하고 있었다. 결혼 하며 한 팀이 되었고 아이들 키우며 전우가 되었고 팍팍한 이민생활에 그 전우애는 더 공고히 다져졌지만, 이 모든 것 위에 암 투병 이라는 단어를 더하니 이건 장난이 아닌 여정이 될 게 뻔했던 거다. 나는 남편을 위해, 남편은 나를 위해, 우리는 서로를 위해서라도 힘을 내야 했기에 열심히 밥을 퍼서 입에 넣었다.
집에 돌아와 보니 사정을 들으신 친한 권사님께서 문 앞에 반찬을 놓고 가셨다. 감사와 함께 갑자기 서러움이 밀려와 겨우 말려놓은 눈물샘이 또 젖는다.
목에 핏자국이 선명한 커다란 반창고를 붙이고 있다는 거 말고는 어딜 봐도 멀쩡한 나였기에, 아이들을 만나고서는 자연스럽게 괜찮은 척을 했다. 아니, 척을 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괜찮았다. 어렵사리 연기를 한 것이 아니고 그냥 아이들에게는 태연하게 대할 수 있었던 것이 엄마의 본능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너무 감사하다.
한국에 계시는 부모님께는 좀 달랐다. 괜찮은 척 연기를 했는데, 나름 잘 했다. 전화하기 전에는 심호흡을 여러 번 쉬어야 했지만, 막상 아빠 엄마 얼굴을 보니 그 동안 어디 숨어있었는지 모를 메소드 연기파 자아가 급 등장해서는,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상황인 이유들을 일사분란하게 설명했다. 뭐라고 했는지 지금은 기억도 안 나지만, 아무튼 잘 했다.
고작 몇 달 전이지만, 퇴원 다음날은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냥 텅 비어 있었던 것 같다.
아, 한가지 기억 나는 건 팀 리더를 만난 거다. 회사가 아닌 외부 카페에서 만나기로 한 건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다. 그를 보자마자 주루룩 흐르기 시작한 눈물이 한동안 멈추지 않았던 '응급상황' 이었기에 자연스럽게 대화도 한국어로 하게 되었다. 누가 보면 나이 많은 아줌마가 이 젊은 남자에게 차여서 힘들어하는 장면으로 비추어졌겠지만 뭐, 아무려면 어때 지금 그게 대수냐.
뉴질랜드는 어느 회사든 입사를 하면 일단 3개월의 수습 기간을 갖는다. 회사마다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일단 이 기간이 잘 지나야 고용이 안정되고, 극단적인 경우에는 이 3개월 안에 회사가 조건 없이 직원을 해고해도 법적으로 불만을 제기할 수 없다.
암 진단을 받았을 때 나는 3개월 꽉 채울 날을 약 2주 앞두고 있었다. 그래서 자꾸 그런 생각이 들었던 거였다. 아니, 왜, 하필, 지금? 암 환자라 앞날이 불확실한 수습직원을 잘라버린다 한들 누가 뭐라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나는 내 걱정을 솔직히 털어놓았는데, 의외로 보스는 신경 쓰지 말란다. 3개월 이라는 시간은 그냥 상징적인 거고, 그 동안 내가 어떻게 성실하게 일해 왔는지 진작에 다 봤으니 괜찮단다. 혹여 일을 쉬게 되어도 일은 언제나 여기서 나를 기다리고 있으니 일단 몸 관리에 우선하고 가족들에게 신경 쓰란다.
뉴질랜드 회사들의 정서가 웬만해서는 한국만큼 빡빡하지 않고, 게다가 우리 회사는 개인이 아닌 정부 펀딩으로 운영되는 시스템인데다가 크리스찬 기업이라 꽤 나이스 하다고 생각은 해 왔지만, 이 정도로 내 마음을 위로해 줄 줄은 정말 몰랐다. 그리고 그런 회사와 나 사이에서 보스가 나를 위해 얼마나 진심으로 뛰었을지 알기에 그게 고마워서 눈물이 더 멈추지 않았다.
내가 얼마나 눈물이 많은 사람인지 나는 암에 걸리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