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연필, 46개월)
사랑이가 그림을 그렸다며 들고 왔다.
보라색 색연필로 스케치북 한 바닥 가득 채운 다양한 모양의 동그라미들은 구름이라고 했다. 하늘에는 일곱 색깔의 무지개가 떠있었고 초록색 비가 내리고 있다.
"삼각형은 뭐니?"
"산이예요."
"사각형은?"
"땅이에요"
들을 말하는 거 같았다. 여러가지 색깔들을 칠한 동그라미들은 집이라고 했다. 그리고 중간에 있는 갈색의 물체는 설명을 힘들어 했다.
"음..... 꺼멓고 커다랗고, 음..... 거기에 있던....."
이 풍경, 어딘가 낯익다.
아! 생각났다.
지난 달 우리 가족은 임진각에 갔다. 우리나라의 아픈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임진각은 2020년 작년에 이어 두 번째 방문이었다.
삼대가 한 집에 살면서 좋은 점은 같이 쉽게 움직일 수있다는 거였다. 그래서 우리는 연휴나, 토일을 이용해서 한 차를 타고 일박이나 이박 정도의 여행을 종종 같이 다녔다. 여행 준비는 전적으로 내가 했다. 시부모와 하는 여행에 준비까지 맡겨버리면 며느리에게 그건 즐거운 여행이 아니라 희생과 고통의 날이 될 게 아닌가.
여행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경험이 있는 내가 하는게 당연했고 다행히 나는 그 일을 즐겼다. 팬션에서 밥해 먹는 즐거움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그곳에서 먹을 고기나 밑반찬들도 충분히 준비했다. 아들 식구들은 사랑이 준비만 해도 한 가방 가득이었다.
작년에도 계속 비가 왔는데 지난 달 갔을 때는 비가 더 많이 왔다. 폭우와 가랑비와 보슬비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임진각 주변을 비를 맞기도 피하기도 하면서 그래도 둘러볼 건 다 둘러 봤다. 6.25 한국 전쟁 때 끊어진, 용산과 신의주를 달렸던 경의선 철로의 모습과 총탄자국 가득한 녹슨 철마의 모습은 볼 때마다 가슴 뭉클했다. 달리지 못하는 철마의 아픈 사연을 알 리 없는 사랑이는 이 슬픈 땅에 내리는 비를 맞고 돌아다니는 걸 즐기고 있었다.
"왜 무지개는 없어요?"
사랑이가 물었다.
"비가 개이면 무지개가 뜰 거야. 지금 구름 속에 숨어있어."
내가 그렇게 대답했던 것이 생각났다.
이제 알았다. 사랑이가 설명을 하기 힘들어하는 갈색의 물체는 철마였다. 이름을 알 수없는 그것이 왜 그 자리에 그렇게 놓여 있었는지 사랑이는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날 사랑이는 철마에 굉장히 관심을 보였다. 이리저리 살펴보고 쭈그리고 앉아 부서진 기차 바퀴도 들여다보고 총탄자국도 유심히 보았다. 무언가가 아이의 마음을 당긴거 같았지만 나는 50개월의 아이에게 그것이 상징하는 우리 근세사의 복잡한 이야기를 설명해 줄 수 없었다.
사랑이의 그림 속에는 그날 끝내 보지 못했던, 사랑이가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 없었을 무지개가, 달려본 기억을 잊어가는 녹슨 철마 위에 화사하게 떠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