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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아이 데리고 무슨 해외여행입니까?

by 왕드레킴

Prolog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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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즐겨 듣는 라디오 프로에 한 대학교수가 패널로 출연해 청취자들의 다양한 고민에 상담해주고 있었다. 고민 사연 하나가 내 귀에 쏙 들어왔다.

“초등학생 저학년 아들을 데리고 여름방학 가족 여행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첫 시도라 걱정이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아이와 해외여행을 갈까요? 그냥 국내 여행을 할까요?”

청취자의 고민에 대한 대학교수의 답변은

“어린아이 데리고 무슨 해외여행입니까? 나중에 물어보세요. 초등학교 저학년이면 기억 하나도 못해요. 돈만 쓰고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분명히 후회하십니다. 해외여행은 아이들 크면 가세요. 그냥 가까운 국내여행 가세요. 멀리 말고 가까운 워터파크 가세요. 그게 최고예요. 애들은 기억 못 해요.”


첫째 지환이 돌잡이 때부터 국내외 가리지 않고 여행을 다녔다. 물론, 처음엔 오롯이 우리 부부의 욕심이었겠다. 결혼을 하고 아이가 태어났지만, 여행을 좋아하는 부부의 역마살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 용기는 지환이가 유난히 얌전하고 순한 덕분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는 경제적으로 넉넉해 일 안 하고 여행이나 다니는 부자는 아니었기에 비수기에 최대한 저렴한 루트를 찾아 '아기 띠'-유모차-카시트 등 큰 짐 마다치 않고 여행을 다녔고 아이와 함께 여행하는 노하우는 한해 한해 쌓여갔다. 지환이가 24개월이 지나기 전까지 최대한 움직여 보려고 했었다. 세 살부터는 비행기 좌석비도 내야 하고 입장료를 받는 곳도 있었기 때문이다. 지환이의 생일인 6월 19일이 지나기 전 5월에 마지막으로 홍콩 크루즈 여행을 가기도 했다.

그리고 지환이가 33개월에 접어들었을 때 려환이 가 세상에 나왔다. 아이가 둘이 되어 잠시 멈칫했지만 려환이 가 태어난 지 100일 되던 6월에 우린 제주도를 시작으로 다시 여행을 다니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지금도 틈만 나면 각국의 여행 사진과 영상을 보면서 영화를 보듯 즐거워한다. 물론 아이들은 아주 어릴 적 여행은 기억하지 못한다. 신랑과 내가 기억하는 추억을 사진과 영상을 보면서 이야기해 주면 어떠한 유명 TV여행 예능 프로그램보다 더 재미있고 행복해한다. 우리는 아이들이 모든 걸 기억하지 못하지만, 가족 간의 특별한 유대감과 특별한 감성이 함께 자라고 있다고 믿고 있다. 뭐, 아이들이 기억을 못 하면 좀 어떤가? 가족을 만든 우리 부부가 행복하고 그 행복한 엄마, 아빠를 보면서 어느덧 환브로는 14살 중학생, 11살 초등학생 우애 좋은 형제로 자랐다. 주변에 소문난 형제의 끈끈한 우애도 아마 여행에서 만들어진 게 아닐까?



코로나가 시작된 지 2년이 지난 지난해 8월, 유럽의 많은 국가는 이미 실내외 마스크 착용 의무를 해제했지만 우리나라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하지만 확실한 건 평생 마스크를 쓰고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우려에서 우리도 이제 실외 마스크 착용 의무는 해제해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기대에 찬 목소리가 슬슬 나오고 있었다.


해마다 적어도 한두 번 국내외로 가족여행을 떠났던 우리 가족. 몇 년 동안 비행기를 타지 못해 몸이 근질거리고 엉덩이가 들썩거리는 금단현상은 비단 우리 가족뿐일까? 신랑과 난 틈만 나면 해외 정세(?)를 살피면서 구글맵을 뒤적이며 언제 다시 나갈 수 있을지에 대해 끊임없이 대화하고 있었다. 항공 마일리지 합산 점수를 보며 마일리지 예약 사이트를 들락거리고, 이 도시 저 도시 운항 일정을 확인하다 보면 자정을 넘기기 일쑤였다.

3년 전 신랑은 여행의 끝판왕이라는 아이슬란드 여행을 계획했었다. 하지만 당시 둘째가 8살이라 빙하 트레킹이 불가하다는 사실을 알고는 단번에 무산시켰다. 나는 빙하 트레킹을 하지 않고 다른 액티비티를 하면 되지 않냐고 물었지만, 신랑은 단호했다. (빙하 트레킹은 안전하지만, 아이젠을 착용해야 하므로 만 9세부터 예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코로나가 터졌고 하늘길이 막힌 뒤 만 2년이 지났다. 여전히 신랑의 버킷리스트 중 하나인 아이슬란드 여행이 '코시국'에 훌쩍 커버린 려환이 가 10살이 되어 다시 가능하게 된 것이다.


이번엔 내 생각은 좀 달랐다. 아이슬란드는 여행의 끝판왕으로 불리는 만큼 이왕 미뤄진 거 아이들이 좀 더 클 때까지 남겨두고 싶었고 신랑이 추진하는 아이슬란드의 여름 시즌 여행보다는 겨울 시즌의 오로라가 더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가 망설인 또 하나의 이유는 작년에 독일로 이주한 윤서네 때문이다. 윤서네 가족은 친형제 이상으로 아주 가깝게 지낸 가족인데 지난해 독일로 떠났고 코로나가 잠잠해지면 꼭 방문하겠노라고 약속을 했기 때문이다. 워낙 가족처럼 친하게 지내던 사이라 보고 싶기도 하고 독일은 아직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나라여서 이미 내 마음속에 여행지 1순위였다.


신랑의 회사가 바쁜 시기라 휴가를 낼 수 있는 기간은 단 10일, 두 나라를 모두 가기엔 턱없이 부족한 일정이다. 시무룩한 나를 바라보며 한참 고민을 하더니

"애들이랑 먼저 출발해서 독일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가 중간에 합류하는 거로 하자!"


" 나 혼자 아이들을 데리고 가라고?"


"윤서네 만나고 싶으면 별수 있나, 싫으면 말고!"


고민은 짧았다. 오랜만의 장거리 여행이라고 겁먹지 말자. 환브로가 누구냐, 이미 아프리카도 경험한 베테랑 여행가가 아니더냐, 게다가 목적지는 보고 싶은 윤서네 가족!!


"콜!!"


"대신 조건이 있어!"


"으응?"


"내가 이미 여행한 도시만 다닐 것! 내가 가보지 못한 곳은 나중에 아빠랑 함께 간다! 그럼, 나 없이 갈 수 있는 여행지를 정해주지. 독일 프랑크푸르트,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가우디 작품들 구경하기, 피게라스에 가서 달리 박물관에 가기…, "


"…, "


이렇게 아빠는 없지만 아빠가 준 미션을 수행하는 대원들이 되어 우리의 여행 준비는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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