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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유라 Dec 26. 2021

번거롭게 살 줄 아는 능력

보이는 몸매가 다가 아닐수도 있어


아는 동생 M이 청바지 좀 빌려달라고 했다. 응? 복지관에서 연말 행사를 하는데, 같은 청바지를 입기로 했단다. 청바지가 없어? 네.. 언니가 입은 그 바지면 되겠는데, 이 거 나 벗어주면 안 돼요? 응?



카페였다. 오랜만에 만나 유행한다는 쿠키도 먹고, 수다를 좀 떠는 중이었다. 수다 떨다 생각난 청바지 생각에 청바지를 입고 온 언니를 보니 그냥 보낼 수가 없단다. 당장 카페 화장실을 가잖다. 어우야~ 시러어~ 입던 걸 어떻게 바꿔 입어~ 언니 나 괜찮아요. 아냐 이렇게 무릎이 나온 걸 어떻게 바꿔입니. 시러어~



공연이 당장 내일인데, 청바지 살 시간도 없거니와 잘 입지도 않는 청바지를 단 한 시간을 위해 사기는 싫다고 했다. 그치.. 애들 학예회 때마다 하얀 목폴라티를 사는 일이 그렇게 번거롭고 아까울 수가 없더랬지. 어린이집 시절부터 해마다 필요했던 하얀색 스타킹은 잊을 수가 없다. 어떨 때는 까만 맨투맨이나 블랙진. 남들은 꼭 하나씩 있다는 아이템이 우리집엔 없었어. 그래, 그 마음 알아. 알지만, 입고 있던 걸 벗어달라는 건 너무 하지 않니. 차로 30분 거리인 우리집엘 굳이 오가야겠니. 농담인 줄 알고 농담처럼 받았더니 진담으로 부탁했다. 간곡하게. 헐. 이래서 내가 널 좋아해.



아니다. 아니다. 지금 여기가 좀 그러면, 이따가 제가 집으로 찾으러 갈게요. 그 집념이 나에게 없어서 널 정말 좋아해. 안 빌려줄 수가 없다. 우리 사이에 고고하게 앉아 있는 H언니를 두고 굳이 나에게만 득달같이 매달리는 마음이 어떤 건지도 안다. 사이즈에 희망을 건 딜이라는 걸.



그래. 집에 이 바지랑 똑같은 바지가 하나 더 있으니 그걸로 가져다주마고 약속을 했다. 맞다. 난 나에게 어울린다 싶은 아이템이라면 열 개씩 사는 누구..와 같은 패션 테러리스트다. 아유~ 고맙다는 동생에게 이번 기회에 청바지라는 아이템 하나 마련하는 게 어떻겠냐는 일장 연설을 해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빌려주기 싫은 마음은 행동에도 담기는 법. 청바지를 겨우~~ 찾아내 다시 동생을 만났다. 아이 학원 가는 길에 길바닥에서 만났다. 학원 화장실에라도 가서 입어보고 오겠단다. 응.. 이래서 M을 좋아한다. 갖지 못한 걸 갖고 있는 친구는 얼마나 좋은가. 언니~ 이거 인센스인데 한 번 써봐요~라며 미안한 마음을 엉뚱한 물건으로 대신하는 그 마음도 너무 좋다.



금방 오겠다며 옷을 들고 간 M이 바지를 고대로 들고 나왔다. 잘 맞어? 언니.. 안 들어가요오.. 응? 왜? 이 언니 보기보다 날씬하네? 응? 안 들어간다고? 네.. 이 게 왜? 그 게 안 들어가? 쓰고 싶지 않은 의문의 1승이란 푯말이 자꾸 내 맘에서 떠올랐다. 아니.. 2승인가.. 의도치 않은 사이즈 확인에서 기쁨을 느낀 나는 자꾸 웃음이 났다. 따지고 보면 도긴개긴인 걸 알면서도 너보다 날씬하다는 비교 우위의 기쁨이라는 게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이 웃음이 났다.



동생은 결국 향 좋은 인센스를 인심 좋게 나누고도 동네 가게에 들러 잘 입지도 않을 청바지를 살 수밖에 없었다. 우와~ 엄청 날씬해 뵈네. 잘했어. 잘했네. 이제부터 청바지도 입고 다녀~ 폭풍 리액션은 내 몫일밖에. 동생이 주고 간 인센스를 피울 때마다 청바지 생각이 함께 난다. 더 날씬해져야겠다는 엉뚱한 다짐도.



잘 사는 일이란 어쩌면 이런 게 아닐까. M을 만날 때마다 기분이 좋아지는 이유는 내가 꽤 쓰임있는 사람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굳이 번거롭더라도 나를 쓰임있게 만드는 M의 기술 덕에 오히려 빚을 지는 기분이다. 인센스와 함께 얻어온 삶의 기술은 조금은 번거롭게 살 줄 알아야 더 좋은 삶을 '함께' 살 수 있다고 알려준다. 고맙다.



의문의 패를 짊어지고 간 동생을 위해 번거로운 꿍꿍이 하나 궁리해야지 했다. 다음 번 만날 땐, 인센스 피울 때 쓰라고 우리집 블루투스라도 들고 가야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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