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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유라 Nov 17. 2021

의존자와 인에이블러

적당히 묻어둘 수 있어야 믿어지는 일들이 있다


지금 사는 집으로 이사를 온 건, 바다뷰라는 표면적 이유 외에 찬이의 등굣길을 훤히 내려다볼 수 있다는 심층적 이유가 있었다. 커다란 삼나무와 작은 카페 건물이 찬이가 걸어가는 길목에 하나씩 있어서 등교하는 찬이 모습을 살짝살짝 가리긴 했지만, 작은 동네 지도를 펼쳐 놓은 듯 아담한 풍경을 내려다볼 수 있다는 점은 6년 동안의 등하교를 봐줘야 할지 모를 나의 미래에 큰 위안을 주었다.



집에서 학교까지 도보거리 365m. 하루에 1미터씩 스스로 걷는 길이 늘어난다면, 한 두해 안엔 혼자 걸어갈 거라는 산수적 계산을 했다. 좀 더 치밀하게는, 주말도 빼고 방학 기간도 빼서 2년은 족히 걸릴 것으로 후한 예상을 했다. 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치는 건 이렇게 다루라는 뜻은 아닐 테지만, 산수적 삶은 의외의 평안을 주었다.



다른 엄마들이 아이 손에 다른 아이의 손을 심어줄 때, 나는 아이의 귀에 카페 이름과 도시락집 간판과 어린이집 이름을 심었다. 천년의 돌을 깨듯, 아이의 등굣길을 스스로에게 세기길 바라는 마음으로 함께 걷고 또 걸었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은 이왕이면 친구 손을 심어주시길.)



눈을 깜빡했더니 아이가 6학년이 됐다. 후했던 예상보다 훨씬 오래 걸렸다. 요즘은 등굣길을 함께 하는 날도 있고, 가끔은 혼자 가기도 한다. 아니 혼자 보내두고 마음으론 함께 걷는다. 먼 발치에서 마음발만은 떼지 못하는 엄마로 산다. 혼자 잘 갈 것 같은 날이 있다가도 도저히 혼자 못 갈 것 같은 날도 있다. 아이의 발달은 계단처럼 나아간다지만, 내가 느끼는 발달 그래프는 미싱의 박음질 같다. 앞으로 잘 가는듯 싶다가도 다시 뒤로 가기를 여러 번, 진격하는 날은 없는가 좌절할 때쯤 다시 앞으로 가는 모양새가 딱 찬이 같다. 어느 날엔 한없이 뒤로 되돌아가기도 한다.



졸업을 앞두고 보니 벌써 초등학교 시절이 아득하다. 초등학생이라서 해볼 수 있었건 일들이 아쉽다. 스스로 하굣길을 해보지 못한 찬이에게 한 번 해보자고 했다. 가는 길이 365m였으니 돌아오는 길도 365m 일 터. 마중 나가는 길을 1m씩 줄여보기로 했다. 산수적 삶은 사람을 참 단순하게 한다. 오늘은 365m를, 내일은 364m를... 마중 나가는 길목을 줄이며 목을 빼며 기다렸다.



아이를 스스로 하게 하기까지 가장 힘든 일은 기다리는 일이더라. 내가 먼저 기다리지를 못하는 날이 많았다. 올 때가 됐는데.. 라고 입으로는 말을 하면서 기어이 마중을 나가고야 만다. 신발이 잘못했네, 헛소리가 나올 정도로 기다리는 일은 의외로 힘들다.



어떤 박사가 그러더라. 의존자 뒤에는 분명 인에이블러가 있다고. ‘의존’이라는 것이 혼자되는 일은 아니라서 의존자를 더 ‘의존자’이게 하는 원인 제공자가 반드시 있기 마련이라고 했다. 하교하는 아들을 마중하러 나가는 길에, 어쩌면 나는 조력자의 탈을 쓴 인에이블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6학년 아들을 여태 의존자로 살게 만드는 인에이블러 말이다.  



믿어져야 기다릴 수 있다. 그리고 믿는 일은 생각처럼 쉽지 않다. 찬이의 일을 모두 알고 싶지만 적당히 묻어둘 수 있어야 믿어진다. 오다가다 만나는 얄궂은 일들을 모른 척 지나칠 수 있어야 믿어진다. 얄궂은 일들을 겪어서 오늘도 이만큼 클 거라고 믿어주는 일은 기다리는 일과 같다.



어느새 200m 앞에서 기다릴 수 있게 됐다, 내가. 다음 날엔 껑충 뛰어서 100m 앞에서 기다릴 수 있게 됐다, 내가. 찬이만 해내면 되는 거라 생각했던 일이 나만 해내면 되는 일이었다. 내가 기다릴 줄 알아야 찬이도 해낼 수 있는 일이었다. 



오늘도 집 앞 횡단보도 앞에서 찬이를 만났다.

만나자마자 "엄마! 간식 사줘요." 라고 말했다. 찬이의 말을 내일도 듣고 싶다.




epilog.

그래도 몽쉘 여섯 갠 아니쟈냐....

뱃살은 나중에 빼기로 하면 늦을까....

인생은 동시에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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