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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유라 Dec 31. 2021

냉장고를 바꿨다

주방에 로망 두 줌


책 한 권 읽을 정도의 텀은 주고 싶었다. 냉장고를 사기로 결정은 하였으나, 여유 있게 생각하며 후회 없는 선택을 하고 싶었다. 앞으로 20년은 족히(응..) 써야 할 두 번째 냉장고는 10년을 함께한 남편을 이미 겪은 바;; 신중하고 싶었다.



책으로 바꾸면 200권은 되려나 잠시 환산을 하고 있으려니 이대로 냉장고를 들였다간 껍질만 바뀐 장롱을 들이는 셈이 될까 염려되었다. 잠시 애정을 가질 시간을 주자 했다. 장롱 사듯 하는 마음에 한 줌의 로망이라도 뿌릴 시간을 내어 주자 했다. 에메랄드색의 스메그라도 하나 들이는 마음으로 감성력(이라 쓰려다 사치력인가 했다..)을 끌어 올리자 했다. 생존 말고 감성으로 살고 싶었다.



어차피 꺼내는 건 그릭요거트에 블루베리.. 아몬드나 피칸.. 혹은 오트밀..이 아닌 그 나물에 그 밥 수준일테지만, 생존으로 먹고 사는 삶 말고 감성 한 스푼 꺼내 먹는 키친 라이프를 살고 싶었다. 결국엔 치킨 라이프가 될 터이지만 마음이 그랬다. 원래 사람은 밥만으로 사는 게 아니라고 누가 그랬다. 그래 반찬이 중하다.



<냉장고의 탄생>을 읽어 보자. <바베트의 만찬>과 <줄리앤줄리아>를 다시 보며 감성으로 사는 키친 라이프를 그려보자 했다. 넋셔리하게 넋이라도 있고 없고 냉장고 향한 이 내 마음이야 바꿀 수 있으려니 했다. 스메그가 사고 싶어질 세뇌력이 생길지도 모를 일이니까. 그 정도가 아니더라도 딱 한 줌의 감성만이라도 길어 올릴 수 있다면 성공이다 싶었다. 냉장고가 본래 장롱처럼 우두커니 서 있을 물건이 아니라는 걸 머리로가 아닌 가슴으로 느끼며 고이고이 모셔오고 싶었다.



냉장고가 탄생하기까지 인류의 식생활을 훓어나보면 생존을 위해 살던 시대 그 이상의 것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 난 이상주의자..


바베트가 몸집만한 얼음덩이와 함께 싣고 온 자라로 자라탕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온정을 베풀듯, 생존을 위한 음식 이상의 무언가가 내 주방에 돋아날지도 모를 일이다. 바베트의 요리를 보며 누군가를 위한 음식에 진정성이 깃들길 기대했다.


줄리의 주방을 보며 요리를 향한 로망을 한껏 키워볼까 했다. 10여년만에 다시 봤다. 응? 이 영화가 요리 영화인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 블로그와 글쓰기에 대한 영화였다. 요리 씬만 주구장창 나왔던 탓에 요리 영화로만 기억하고 있었다. 때문에 결국 내가 블로거인가? 싶을 만큼 다시 보니 좋았고 황당했다. 365일의 챌린지, 블로깅, 작가.. 결국 책을 내기까지의 이야기였다.. 요리에 대한 애정은 커녕, 글쓰기에 대한 열정만 키웠다.


이대로 블로거가 되려나..



냉장고 향한 로망을 키워줄 추천 영화나 받아볼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냉장고가 왔다. 영롱 아닌 장롱 들어오듯 했다. 장롱을 들이던 그날처럼 조각조각 흩어진 레고처럼 들어왔다. 친절이 넘쳐 흐르는 기사 두 분이 줄자를 가로 세로로 순발력 있게 재고는 순식간에 중문을 해체시키고 바닥에 융단을 깔았다. 내 마음 부서지듯 로망 담은 옛 냉장고를 순식간에 해체시켰다. 나는 냉장고가 떠나는 줄도 모르고 십년 묵은 먼지덩이를 잡느라 혼을 뺐다. 미세먼지 초미세먼지 덩어리먼지 헝겊먼지 쓸데없지를 모두 쓸어 담고 있으려니 기사 두 분이 장롱의 조각 같은 냉장고의 그것들을 한아름씩 들고 왔다. 이어서 장롱을 닮은 몸체가 들어왔다.



10년 전 들인 냉장고에 애정을 쏟는 사이, 냉장고라는 물건은 대단한 발전을 이뤘더라. 난 변하질 않았는데 그것은 혼자 고고하게 발전해서는 가전 아닌 가구인듯 장롱 닮은 몸으로 들어왔다. 문짝을 붙이고 서랍을 조립해 넣으며 내 주방에 가구로 자리했다. 겉은 바뀌었는데 안의 물건들은 그대로여서 바뀐듯 바뀌지 않은 기분이었다. 김치통을 넣고 반찬통을 넣으려는데 새집으로 이사가는 애들이 초라했다. 얘네들도 씻기고 빛을 내줘야는구나.



맹숭맹숭 그저그런 나에 비해 아이들은 팔짝팔짝 좋아했다. 몇 번이나 열고 닫는 건 남편도 다르지 않았다. 나만 빼고 모두들 냉장고에 진심이었다. 엄마! 이것도 사야죠! 엄마! 이거는 여기다 넣어야겠어요! 엄마! 이건 이런 거래! 여보! 괜찮네! 진작에 바꿔줄 걸 그랬다. 나만 여전히 장롱 대하듯 했다.



바꾸고보니 자석이 붙어서 좋긴 하다..



냉장고를 향한 감성 라이프는 여전히 뎁혀지다 말았다. 발동이 걸리기도 전에 식어버릴까 싶지만, 냉장고를 향한 글이라도 쓰는 지금의 나에 만족하기로 한다. 역시 일기쓰기인가.. 아리송송 의외의 의미를 두며 일단은 새 주방 장롱에 정 하나를 담는다. 쓰다 보면 드는 것이 정이니까, 쓰다 보면 너에게도 쌓일테니까. 그동안의 먼지처럼.



Time after time.. <줄리앤줄리아>의 ost를 다시 한 번 듣는다.

몇 번이고 다시 또 다시. 계속해서. 애정을 갖고. 하다보면 결국..



스메그가 갖고 싶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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