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유라 Feb 03. 2022

읽으면 다른 것이 보이고

우리를 다시 배울 수 있다


대니 그레고리는 책에서 이탈리아에 가려했더니 네덜란드에 착륙한 이야길 한다. 그리고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고 한다. 모든 것이 느리고 부드러웠고, 기대했던 바와는 달랐지만 훌륭한 경험을 했다고 이야기한다. 이것이 장애인의 세계였노라고 말이다. 그레고리의 말처럼 찬이를 쫓아다니며 많은 장애의 삶을 봤다. 나름의 세계 안에 행복하게 사는 가정을 보았고, 형아와 누나들을 보며 찬이의 미래를 꿈꿔 보기도 했다. 이렇게 클 수 있을까. 이런 모습도 가능할까. 아니면 이렇게 그냥 살아가려나..


눈에 보였던 형아들의 모습을 기록하며, 이 형아는 준이랑 비슷하네. 준이는 이 형아처럼 자라겠구나. 이 형아는 찬이랑 비슷하네.. 찬이는 어쩌면 이 형아처럼 자라겠구나. 그려지지 않는 미래가 답답해 그려보길 반복했다.



그러다 김보영의 <얼마나 닮았을까>를 읽게 됐다. 단편 모음집인데 그중 <같은 무게>라는 단편을 보고 다른 생각을 하게 됐다.


'사람들은 나를 보면 자신이 만났던 어떤 장애인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내가 자신이 만났던 그 장애인인 양 이야기한다. 그들은 살면서 한 명의 장애인만 만나도 모든 장애인을 안다고 생각하곤 한다. 하나만 알면 전체를 안다고 믿는다. 경이로울 정도로 놀라운 확신으로 자신이 모르는 것에 관해 이야기한다.'


어떤 장애인 이야기를 하는 편협한 그 사람이 바로 나였다. 장애 유형에 따라 선별하고 나누는 내가 부끄러웠다. 바라고 그려야 할 것은 찬이의 가능성이지, 사람을 보고 판단하고 막연한 바람을 키우는 게 아니구나 생각했다. 찬이가 좋아하는 것을 발굴해주는 것이 해야 할 일이라고 고쳐 생각하게 됐다.



장애아 교육, 장애아 발달 클리닉, 각종 육아 서적 등 실용서만 봤던 이유는 시간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최대한 적은 시간을 들여 효율적인 변화를 이끌어 내고 싶은 마음에 손엔 늘 실용서가 들려 있었다. 김보영의 소설을 읽으며 소설 속엔 더 많은 장애 이야기가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찾고 싶었다. 어떤 이야기들이 있는지, 장애에 대하여 세상은 무어라 말하는지 알고 싶었다. 그 속에 우리의 이야기가 있지는 않을까. 미래에 겪을지도 모를 나의 이야기가 있는 건 아닐까 점쳐 보고 싶은 마음은 소설이란 장르에도 손이 가게 했다. 꾸어볼 수 있는 꿈이라도 건져 올리고 싶은 기대감이 있었다. 소설을 읽다 에세이에도 손이 갔다. 정혜윤의 <마술 라디오>에는 장애아 형제를 키우는 아버님의 인터뷰 이야기가 실려 있었다. 이리로 저리로 뻗기 시작한 손은 다양한 책을 끌어당겼다.     



올가 토카르추크의 <방랑자들> 장애인 아들 수발에 진저리가  가출한 엄마의 이야기가 나온다. 아들 생각만 하면 목이  막혀와 물도  넘길 정도의 엄마 모습을 함께 바라보게 된다. 도리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에는 일반 아이와는 다르게 감정이 읽히지 않는 아이가 나온다. 귀엽고 사랑스러워야  아이가 무서울 수도 있는 이야기를 펼쳐 놓는다. 그럼에도 아이는 부모 밑에  아이일 . 먹먹함을 보았다. 이미상의 <하긴>이라는 단편엔 김보미나래가 나온다. 지적장애를 겪는 김보미나래와 그의 부모들 이야기인데, 똑똑한 부모 밑에 김보미나래가 겪는 답답한 삶의 이야기가 고구마보다  답답하다. 유명한 손원평의 <아몬드>에도 감정이 읽히지 않는 아이가 나온다. ' 머릿속의 아몬드는 어딘가가 고장  모양이다. 자극이 주어져도 빨간 불이   들어온다. 그래서 나는 남들이  웃는지 우는지  모른다. 내겐 기쁨도 슬픔도 사랑도 두려움도 희미하다. 감정이라는 단어도, 공감이라는 말도 내게는 그저 막연한 활자에 불과하다' 제목이 아몬드인 이유가 나오고 순식간에 읽게 됐다. 부모가 바라는  평범한 인생이지만, 그게 쉬울  알지만, 세상 가장 어려운 것이 평범한 인생이란  모른다고 이야기한다. 오에 겐자부로의 <개인적인 체험>에는  태어난 아기가 장애로 태어난  남자의 이야기가 나온다. 자신의 아이를 보고 도망치는 아비의 심정과 일탈이 나온다. 사람이란 이럴 수도 있겠구나, 라는 일종의 소설적 모먼트를   있다. 앨리스 워커의 <그레인지 코플랜드의  번째 인생> 인종을 장애로 바꿔 읽으면  들어맞는 억울함과 시련을   있다.  외에도 자신에게 한계로 느껴지는 무언가가 있다면 바꿔 읽을만한 고전이다. 그리고 자식은 부모를  번이고  번이고 다시 살게 하는 존재가 맞다고 이야기한다. 자식으로부터 배울  있는 자세를 갖게 만드는 좋은 책이다. 정용준의 <선릉 산책>에는 한도운을 때리는 한도운이 나온다.  가슴 아픈 일인데, 소설은 결코 해결책을 말하는 장르가 아님을 알면서도 해결의 실마리라도 잡고 싶은 마음에 끝까지 읽게 되더라. 심지어 < 년의 고독>에도 장애라 말하진 않지만 장애아로 그려지는 아이가 나온다. 추가로는, 김초엽의 <사이보그가 되다> 있고, 단편집<캐빈 방정식>에는 시간감각통합이  됐을  벌어지는 이야기가 나온다.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존재의  가지 거짓말> 나오는 쌍둥이가 요즘을 살았다면 정신분열증 혹은 ADHD 이상의 진단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소설엔 장애를 극복한 이야기보다는 삶 자체를 다루기 마련이고,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 변화는 일어난다. 현실이 소설보다 더하다는 걸 깨닫는 나이가 되면 소설이 더 재밌어지는가. 소설 쓰네~라는 말이 결코 허구를 빗대어 말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면 소설 속 이야기들이 말을 걸어온다. 무엇을 보며 살겠느냐고.      



그러다가 읽게 된 홍은전의 <그냥, 사람>에는 "내가 충격을 받았던 건 장애인의 열악한 현실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문제'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존재 때문이었다."라는 화두를 꺼낸다. 장애라는 삶의 현실 자체가 아니라 좀 더 큰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만든 시점이 됐다. 고병권의 <묵묵>에는 "사회적 모델에 따르면 손상은 특정한 사회적 환경에서 장애화 된다."라고 말한다. 어떤 사회는 특정한 손상이 장애화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관점은 이 점이라고 말한다. 지금 장애라고 특정지어지는 것들이 장애화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시각이 필요하다고 말이다. 마음을 건드리는 김승섭의 <아픔이 길이 되려면>도 다르게 볼 수 있는 시선을 알려 줬다.     



왜 나의 문제를 공유해야 하는지, 왜 나의 문제가 장애화가 되어가는지, 스스로 바라보고 사회에 이야기할 수 있는 용기를 내야 한다고, 혼자 짊어질 문제가 아니라고 말한다. 당신이 낳았으니 당신 책임이라는 말처럼 무책임한 말이 없음에도 우리는 우리를 책임지며 살아가기에도 바쁘다.

나의 책임감이 결코 착한 마음이 아니라는 것,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나의 책임감으로는 버티기 힘든 일도 있더라는 것을 사회에 공유하고 나누고 도움을 요청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걸 책들이 말해줬다.      

그리고 장애만이 아니라 다른 소설들까지 읽을 수 있는 마음을 열어줬다.



정소현의 <품위 있는 삶>에는 장애는 아니지만, 사회 속에 왜 그렇게까지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존재하는지 보여준다. 이건 그들의 탓이 아님에도 왜 그렇게 살아야만 하는지 자꾸 토로하고 바꿔 생각해야 한다고 마음을 울린다. 나에게 온 장애로 나의 삶이 무너졌다고 나만 보던 삶에서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엘리자베스 문의 <어둠의 속도>는 내가 꼽는 제일의 장애 이야기다. "그녀는 내 생각을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내가 다른 사람들처럼 말하기를 바란다."는 문장 하나가 아이를 키우며 바랐던 마음을 바꿨다. 찬이의 의사를 존중하는 법을 연습하게 되었고, 소설도 삶에 변화를 줄 수 있구나 알게 됐다. 다른 소설들처럼  먹먹해지는 이야기일까 봐 두려웠지만, 이 소설의 분위기는 달랐다. 당연하다 생각했던 굴레를 달리 보게 만들었다.


『우리 자신에 관해 배웠던 것들은, 우리를 가르쳤던 사람들이 사실이라고 믿었던 지식의 일부분일 뿐이다. 나는 자라서 그중 일부를 알아냈지만, 사실은 정말 알고 싶지는 않았던 것들도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내게서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점을 모두 다 알지 않아도, 세상을 견뎌 내기란 충분히 힘들다고 생각했다. 밖으로 보이는 행동을 끼워 맞추기만 하면 되리라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배웠다. 정상인처럼 행동하면, 충분히 정상적이 될 거라고.』



우리는 모두가 변화의 경계를 정확히 짚을 수 없는 스펙트럼 상에서 살아가는 ‘진짜 인간’이라고 말한다. 스펙트럼의 넓이가 그렇게 좁지만은 않다고. 스펙트럼을 어디까지 규정하느냐에 따라 장애와 비장애의 구분은 무의미할 수 있다는 시각을 갖게 됐다. 스펙트럼을 규정하는 일은 내가 직접 할 수도 있는 일이라는 걸 알게 됐다.     



안타깝게도 장애를 그리는 이야기는 손수건부터 준비하고 읽어야 하는 이야기가 태반이다. 그래야 사람 마음을 움직일 수 있으니까, 그래야 이야기가 되니까, 그래서 소설 따위?라고 생각했다. 읽는다고 달라질까 싶었던 마음이 달라졌다.



지난 2년간 읽었던 책들이 전에 읽었던 책들에 비해 다양해졌다. 찬이만 잘 키우면 내가 해야 할 일은 모두 끝나는 거 아닌가요, 라며 징징 대던 내가 다른 곳을 바라볼 여유가 생긴 것은 찬이의 성장도 물론 크겠지만, 책으로 얻어진 시선의 변화라는 점을 무시할 수가 없다.



우리가 묻는 장애에 대한 답은 장애 안에 없다. 세상을 알아야 풀 수 있는 질문이다. 규정 없는 세상을 살려면 규정 없이도 살 각오가 되어야 한다. 규정으로 얻은 울타리 안의 삶만 바라보는 이상 시야는 넓어지지 않는다. “끼리끼리라는 건 일종의 세력 과시”라는 박완서 님의 말처럼 세력 과시로 얻을 수 있는 건 좁은 울타리밖에 없다. 장애 이야기를 읽어주길 바라는 사람들은 이 울타리 안의 사람들이 아니라 울타리 밖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선 내가 먼저 그들의 세상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울타리 밖을 더 알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룰러 밀러는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에서 무언가 규정해버리는 순간 사라지는 것들을 이야기한다. 규정하는 순간 보이지 않는 것들을 다시 살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룰루 밀러의 말처럼 장애라 규정해버리는 순간 사라져 버린 것들을 다시 살펴야 한다. 울타리 밖에서 함께 생각해야 한다.



다른 생각을 읽으면 다르게 볼 수 있다. 그리고 다른 것이 보인다. 내가 바라보는 세상이 다가 아니라는 걸 고개 돌려 볼 수가 있다. 그곳엔 또 다른 이야기들이 무궁무진하고 거기서부터 우리를 다시 배울 수 있다.



이전 12화 다시 쓰면 보이는 것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