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영 날개 연구 모임

나 자신의 해방 욕구를 분출할 수 있는 제 3의 공간

by 반짝이는먼지

"젊은 시절에는 또래가 경쟁자처럼 보이잖아요. 전쟁 비유를 안 좋아하지만, 중년에 접어들면 또래가 저와 같은 전투병들, 부상병들처럼 보여요. 어느 때는 그저 거기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오랜 시간 같이 버텨준 것만으로도 고마운 마음이 들고요. 인생의 긴 시간에 영원한 승리도 없고, 그저 분투하는 사람들이 보이면서 누군가의 생애 주기를 보는 시선이 깊고 넓어지는 것 같아요." - 어텐션북 <안녕이라 그랬어> 김애란






"IM 200 가겠습니다~"

웜업 자유형 300미터를 돌고 들어온 터라 놀란 숨이 절로 났다. 이미 출발한 1번을 따라 차례로 2번, 3번이 출발한다.

"1번 선생님 너무 착실하신 거 아ㄴ?"

꼬르르륵..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물속으로 들어간다. 흡촵~흡촵~ 접영 50미터 끝에 다다르자 헉헉헉, 내쉴 숨을 겨우 찾는다. 두 손으로 벽을 탁 짚고는 배영 턴을 하고 다시 출발, 쓰헙쓰헙 쓰헙쓰헙, 들리는 소리라고는 심장이 숨을 찾는 거친 숨소리뿐. 끝도 없을 것 같은 수영장 천정을 바라보며 점점 빠져나가는 숨과 힘에 잡아두었던 코어까지 흐물해지고 있었다. 팔은 내가 아니라 물이 젓는 것 같고 뭘 위해 이곳에서 있나, 급하게 현타가 들이쳤다. 이어지는 평영 턴. 물속 돌핀킥까진 굳이 찰 생각이 없다. 내 앞사람의 발끝만 쫓으며 숨을 쉬고 팔을 젓고 다리를 휘두른다. 슝흡퐁- 슝흡퐁- 다시 돌아온 턴 지점, 이제 자유형이다.

"언니.."

내 쉴 숨이 더는 없으니 순서 좀 바꿔달라는 내 손짓거리에

"어 그래!"

먼저 출발해 준다. 덕분에 살았다. 숨 한 번 고르고 출발. 언니 발끝에서 나오는 보글보글만 부지런히 쫓았다.



그랬네. 수영을 함께 같이 해주는 것만으로도 고맙고, 오랜 시간 함께 버텨주고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힘이 나고 그랬네. 손아래 스무 살에서 손 위 스무 살까지 나이를 불문하고 모두가 친구가 되어 이 물살을 한 번만 더 갈라보자며 서로의 건강에 안녕을 묻는 사이가 되었다.



나의 건강을 위해 한 팔 더 같이 저어주고 당신의 건강을 위해 내 한 팔 기꺼이 함께 저어주는 우리는 동료이자, 전투병이었다. 반년의 상급 강습이 끝났다. 그리고 새로운 상급 시즌을 맞아 수영장을 옮기게 되었다. 정이 너무 많이 들었다.


졸업이라도 하는 것처럼 알 수 없이 섭섭하고 벌써 그리울 것 같다가 어찌할 바를 몰라 그저 새로운 시작을 응원할 뿐이다. 재밌고, 신이 났고, 정신없이 행복했다. 내 인생에 박제될 시절이라는 걸 이미 알겠더라.






"에이. 팔에 힘을 더 빼야지."

"팔이 이렇게 이렇게 너덜너덜해져서 휙 날아가게-"


강습 전후로 자연스레 서로의 자세를 봐주기 시작했다. 크루가 생겼다. 오늘은 접영의 날개에 대해 연구했다. 서로의 자세를 디스하며 스스로의 자세를 깨닫는 반면교사 방식이다. 어떻게 하면 접영 날개가 가벼워질지, 서로의 의견을 격렬하게 나눈 뒤 수영은 각자 알아서 한다. 서로의 수영을 보면서 서로에게 자연스러운 디스가 되어버리는 관계.


잘 되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하나 둘 안 되기 시작할 때, 찾게 되는 수영 크루. 원래 안 되고 있었던 게 아니라 잘 되고 있던 것들이 갑자기 안 돼서 혼란스럽다. 안 되고 있다는 걸 내 몸이 알면 좋겠지만, 내 몸은 모른다 한다. 깊게 들어가지 말라 하는데 이미 깊지 않은 것 같고, 자꾸만 뒤로 차라 하는데 난 이미 열렬하게 뒤로 차고 있어서 모르겠다. 이럴 때 찾게 되는 게 수영 크루다.



"나 좀 봐줘봐."

"어때? 괜찮아진 거 같지 않아?"



수영 강습은 강사님에게 배우는 게 1차고, 2차는 같은 반 회원에게서 배운다.

'아.. 나도 저렇게 하고 있나 봐.'

'아.. 저럴 땐 팔을 조금 더 내려봐야겠네.'

'아.. 고개의 각도가 확실히 다르구나.'

사실, 회원들 사이에서 보고 배우는 것이 5할 이상이라고 본다.


처음으로 300미터를 돌게 되던 날에도 그랬다.

"나만 따라와. 그냥 따라와 봐."

말만 남기고 바로 입수해 버리는 수정언니를 따라 몸이 알아서 뒤따랐다. 자유형 100미터가 최대 비거리였던 내가 어떻게 하면 그렇게 오랫동안 돌 수 있느냐 묻자마자, 일단 따라와 보라며 페이스메이커를 자처했다.



언니의 발차기 끝에 생겨난 보글 보글이 내 정수리에 닿아 다정하게 퍼졌다. 이 보글보글만 따라가면 되는 건가. 일단 가보기로 했더니 어느새 두 바퀴를 돌았다. 반 바퀴를 마저 돌고 나니 죽을 것 같은데 이게 또 참을 수가 있을 거 같아. 코로 입으로 물이 쳐들어와 당장 남아있는 숨을 다 써버릴 것 같은데 참으라면 또 참을 수 있을 거 같아서 다시 보글보글에 집중했다. 300을 돌았다. 300을 돌았더니 500은 쉽다. 500을 가려던 게 700이 돌아졌다. 700을 돌던 날에도 2000을 돌던 날에도 수정 언니가 옆에 있었다. 난 그게 얼마 큼의 영향력인지 몰랐다. 그 후로 터지지 않던 호흡이 터졌고, 킥을 차는 속도도 빨라졌다. 자유형이 안정권에 접어들었다. 배영도, 평영도, 접영도 덩달아 좋아졌다.






크리스티안 미쿤다의 <제3의 공간>에 따르면, 도시마다 마을마다 제3의 공간이 하나씩 존재한다고 한다. 카페라던가, 술집이라던가, 동호회라던가 하는 곳으로 그 안에 들어가면 이미 고인물들이 있고 뉴비는 언제나 환영하는 시스템. 뉴비가 들어오면 "어~ 들어왔어~ 여기선 이렇게 놀면 돼~" 타인과 편하게 교류할 수 있는 공간이 어디든 필요하다는 개념이라고 한다.


제1의 공간인 주거공간, 제2의 공간인 근무공간 이외에 사람들이 영혼의 마사지를 받기 위해 일부러 찾아가는 곳, 가정에서도 만족하지 못하는 나 자신의 해방 욕구를 분출할 수 있는 곳이 제3의 공간이라는 것이다. 대화를 나누지 않더라도 만남 자체로 해소가 되는 사람 냄새에 대한 그리움을 우리는 늘 갖고 있을지 모른다는 것.


"가정에서도 만족하지 못하는"

"나 자신의 해방 욕구를 분출할 수 있는 공간"

두말할 것도 없이 '수영장'이 떠올랐다.


이미 고인물들이 있고, 누구나 찾아갈 수 있고, 일시적 도피처로 삼을 수도 있고, 기분이 좋아질 수 있는 곳.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옆 레인에서 함께 수영하는 사람의 존재만으로 위로받는 느낌의 제3의 장소가 수영장이었다고 깨닫는 식이다.


SNS도 한때는 제3의 공간을 대신해 주었던 것 같지만 겪고 보니 온라인의 한계는 점점 더 뚜렷해질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더욱 수영장으로 향하게 되는지도.


"완벽한 오프라인의 맛"이 있는 곳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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