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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현락 Jun 26. 2021

빛의 공간 사그라다 파밀리아

연재소설 구름다리 #6

6


사그라다 파밀리아 역에 내리자 성당이 한눈에 보였다. 옥수수 모양의 첨탑은 놀이동산에나 어울릴 법한 기이한 모습으로 우뚝 솟아 있었다. 현재는 높이 솟아 오른 사그라다 파밀리아를 한 화면에 담으려고 한참을 뒤로 물러나 사진을 찍었다.


그래도 한 번에 담을 수 없어 주변을 살펴보니 사람들은 인공호수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맑은 날 인공호에는 두 개의 사그라다 파밀리아가 나타났다. 사람들은 그 모습을 담기  담기 위해 호수 이곳저곳에서 갖은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었다. 그렇게 애를 써도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전체 모습은 한 화면에 담기지 않았다.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동쪽 파사드에 새겨진 예수 탄생 이야기 속 등장인물들의 표정은 유난히 생생했다. 스페인 전역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의 모습을 관찰한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설계자 가우디가 그 사람들의 살아있는 표정을 파사드에 남긴 덕분이었다.


예수는 마리아에게서 태어났고 예언의 아이가 태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왕은 마을의 아이들을 죽였다. 탄생의 이야기 같지만 죽음의 이야기이며 희망찬 찬가 같지만 고통의 장송곡이 예수 탄생 이야기다. 어릴 적 시골 교회에서 구전 동화처럼 들었던 예수 탄생 이야기를 떠올리며 현재는 파사드에 새겨진 사람들 표정 하나하나를 가만히 살펴봤다.


조각상은 밤이 되면 살아나서 서로에게 말을 걸 걸지도 모른다는 상상이 들 정도로 실감 났다. 현재에게 예수는 양에 둘러싸인 서양인의 모습이 전부였다. 밥상이나 하라며 어머니가 가져 다 준 접이식 간이 책상에는 양치기 모습의 예수가 있었다. 현재는 파사드에서 양을 찾으려다 말았다. ‘아마 다윗도 양치기이지 않았나?’ 혼잣말을 하며 현재는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인공적인 조명을 찾아보기 힘든 사그라다 파밀리아 안은 자연의 빛으로 가득했다. 형형색색의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들어오는 빛은 성당 안을 가득 채우고 가지처럼 뻗은 기둥은 천장을 든든히 받치고 있었다. 흡사 요정이 사는 숲에 들어온 듯 신비로웠다.


관람객들은 고개를 뒤로 젖히고 천장과 벽을 통해 들어오는 빛을 감상했다. 말을 잃은 사람들은 무언가를 우러르며 서 있었고 간간히 외마디 탄성이 터져 나왔다. 사그라다 파밀리아에서 말을 잃은 현재는 은혜의 말을 떠올렸다.


“사그라다 파밀리아라고 들어봤어? 그곳은 신비한 빛이 흘러나와서 그곳에 들어간 사람들은 눈을 뜬 채로 눈물을 흘린데.”


은혜의 말은 사실이었다. 공간을 가득 채운 빛은 현재의 온몸을 감쌌고 어느새 흘러내린 눈물에 빛은 굴절되어 바닥으로 퍼져나갔다. 눈물이 그렁한 눈망울에는 빛이 산란되어 현재의 눈앞에는 영롱한 빛의 세계가 펼쳐졌다.


천장도 기둥도 사람도 모두 하나로 합쳐져 춤을 췄다. 가우디는 신이 빛의 형태로 나타난다고 믿었다. 현재는 신을 믿지 않았지만 빛은 볼 수 있었다. 빛이 공간을 아름답게 물들일수록 은혜에 대한 미안함은 커져만 갔다.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려 현재의 목덜미를 적셨다.


"은혜야, 미안해. 은혜야, 미안해."


현재는 마음속으로 계속해서 이 말만 되풀이했다. 빛 속에서 은혜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랐다. 그렇게 떠올리려 해도 떠오르지 않던 아기같이 잠들어 얕은 숨을 내쉬던 은혜의 얼굴이 뚜렷이 보였다. 몹시도 일그러져 있을 거라고 짐작했던 은혜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평온했다.


무엇이 두려웠을까? 눈물에 두려움이 씻기자 현재는 은혜의 얼굴을 기억해 냈다. 그렇게도 보고 싶던 은혜의 얼굴을 사그라다 파밀리아에서 되찾은 현재는 오랜만에 옛 기억을 떠올리며 두 손을 모으고 십자가상 앞에서 기도했다. 그것은 신을 향한 기도도 신을 위한 기도도 아니었다. 현재는 그저 기도가 하고 싶었다. 두 손을 모으고 몸을 웅크리며 의자에 기댄 채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지나갔다.


현재에게 은혜는 빛이었다. 은혜의 죽음으로 현재는 빛을 잃었다. 빛을 잃으면 볼 수 없다. 눈이 있어도 빛이 없으면 아무것도 볼 수 없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아내가 자신의 어머니임을 깨닫고 자신의 눈을 찔러 뽑아 버렸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했던 오이디푸스는 운명 앞에 오만한 자였다.


오이디푸스의 운명은 정해져 있었고 신조차 그것을 어찌하지 못했다. 운명을 피해 남의 손에 맡겨진 오이디푸스는 우연히 만난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고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고 어머니와 결혼한다. 그래서 남매이자 딸을 낳는다. 운명을 거스를 수 있다고 믿었던 오만한 오이디푸스는 빛을 잃은 인간이었다.


현재는 은혜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담담히 죽음을 받아들이며 준비했던 은혜와 달리 은혜의 가족과 현재는 은혜의 죽음 앞에서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았다. 은혜는 살아날 것이고 은혜의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은혜의 죽음을 비는 것과 같은 것이라 여기며 죽음 앞에 침묵했다.


그렇게 믿으면 죽음이 은혜의 곁을 스쳐 지나가기라도 할 듯 죽음에 대한 그들의 침묵은 철저했다. 믿음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산산조각 났고 기어이 찾아온 은혜의 죽음 앞에서 가족과 현재는 무기력했다. 빛은 사라지고 어둠이 남겨졌다. 어둠은 현재의 기억을 덮고 은혜의 얼굴을 가렸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서쪽 파사드에는 예수의 십자가 고난 이야기가 새겨져 있다. 예수는 십자가에 달리기 전 채찍질을 당했다. 채찍 끝에는 동물의 뼈 조각이 달려 있어 한번 휘두를 때마다 살점이 떨어져 나갔다. 예수의 수난을 다룬 어떤 영화는 이 장면을 너무도 생생하게 묘사해서 그 어떤 폭력 영화보다 폭력적이란 평가를 받기도 했다.


대부분의 유럽 미술관에는 예수의 십자가 수난을 묘사한 성화가 있다. 하나 같이 그 성화 속 십자가 위에 못 박힌 예수는 거룩한 광채와 옷으로 치장되어 있다. 실제는 그와 다르다. 발가벗겨져 해골의 언덕이라 불리는 곳에 방치된 예수에게 오가는 사람들은 돌을 던지고 침을 뱉었다.


후세의 사람들은 그 돌과 침을 제거한 채 아름다운 가운과 숭고한 빛으로 십자가를 장식했다. 성화 속 십자가는 예술적이지만 사실과 달랐다. 은혜의 죽음은 너무도 처절하고 사실적이었다. 차라리 조명을 꺼버리는 편이 모두를 위해 나을는지도 몰랐다. 사람들은 어둠으로 기억을 덮고 새롭게 편집했다. 이제 가려졌던 은혜의 얼굴이 빛으로 드러났다. 어둠은 걷히고 은혜의 얼굴은 현재의 눈앞에 그렇게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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