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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현락 Jun 12. 2021

흐로닝겐의 밥솥

연재소설 구름다리 #4

4


암스테르담 스키폴 공항은 고요했다. 키 큰 유럽인들 사이에서 후배는 용케도 현재를 찾아냈다. 덩치가 산만한 녀석은 현재를 보자마자 와락 껴안았다.


“배고프지 형?”

“아냐, 기내식 잘 주더라.”


“그래도 뭐 먹자.”

“이 근처에 뭐가 있나?”


“그냥 햄버거라도 먹자.”

“여긴 음식 다 비싸. 그냥 배 채우고 가자.”


흐로닝겐으로 유학을 간지 육 개월도 채 되지 않은 녀석은 은혜의 소식을 듣고 그날 저녁 비행기로 들어왔다. 어디서 구했는지 몸에 맞지도 않는 검은 양복을 입고 장례식장에 들어온 녀석은 어린애처럼 울었다. 아무도 울지 않는 장례식장에서 혼자 대성통곡을 하는 녀석을 사람들은 고마워했다.


그때 현재는 울지 않았다. 녀석이 대신 울어주는 눈물에 기대어 현재는 울음을 참을 수 있었다. 현재는 그런 녀석이 고마웠다. 울음소리가 커지고 높아질수록 현재의 영혼은 정화되었다. 은혜와 현재가 모두 아끼는 녀석, 늦은 나이에 어학 시험을 보고 흐로닝겐으로 훌쩍 유학을 간 녀석, 신혼여행 올 때 제일 먼저 흐로닝겐부터 오라며 배낭여행을 부추긴 녀석의 차를 타고 현재는 한참을 달려 기숙사에 도착했다.


이 동네에도 풍차가 있느냐는 농담에 녀석은 풍차는 없는데 운하는 있다고 답했다. 녀석은 아직도 현재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감을 못 잡고 있었다. 현재도 녀석의 그런 마음을 아는지 더 이상은 농담을 하지 않았다.


“형, 여기서 자.”

“아냐, 내가 바닥에서 잘게. 한국에서도 바닥에서 잤는데 침대 불편해.”


“형이 바닥에서 자면 내가 형수한테 미안해.”


유학을 간 지 얼마 안 된 녀석은 은혜에게 밥솥을 하나 사서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기숙사에서 밥을 해 먹어야 하는데 밥솥이 없었던 모양이다. 녀석은 밥을 못 먹으니 죽을 것 같다며 은혜에게 밥솥을 부탁했고 은혜는 신혼살림을 알아보며 녀석의 밥솥부터 사두었다.


진작 유럽으로 보내야 할 밥솥이었지만 은혜가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면서 밥솥은 집 한구석에 조용히 머물러 있었다. 은혜를 보내고 현재는 집을 처분하고 살림살이를 정리했다. 그러다 구석에 오롯이 자리 잡고 있는 밥솥을 보고 현재는 녀석에게 국제전화를 걸었다.


진작 보냈어야 했는데 미안하다며 이제라도 보내 줄 테니 주소를 알려달라고 했다. 통화 중에 녀석은 밥솥은 됐고 형이 보고 싶다고 했다. 주변 사람들에게는 밥솥 핑계를 대고 현재는 녀석에게 다녀오겠다며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녀석에게 밥솥을 전해주는 것이 지상과제인 듯 현재는 밥솥을 손에 꼭 쥐고 구름다리 아래에서 공항버스를 기다렸다. 평소보다 일찍 도착한 공항버스에서 내린 운전사는 밥솥을 짐칸에 넣으라며 재촉했지만 현재는 그 밥솥을 꼭 껴안고 버스에 탔다.


스키폴 공항에 도착한 현재는 이어달리기 경주자의 배턴이라도 되는 듯 녀석을 보자마자 손에 밥솥부터 들려주었다. 현재를 꼭 끌어안고 울던 녀석은 밥솥을 보더니 반색하며 즐거워했다.


밤새 몸을 뒤척이다 깨어나니 식당 쪽에서 밥이 다 됐는지 밥솥에서 김 빠지는 소리가 났다. 멍하니 그 소리를 듣고 있자니 녀석은 그보다 더 큰 목소리로 밥 먹으라며 현재를 불렀다. 모닝커피와 유럽식 빵에 대한 현재의 기대와 달리 녀석은 거하게 밥상을 차리고 있었다.


밥은 찰지고 윤기가 흘렀다. 식탁은 한국에서 공수해 온 김치와 밑반찬으로 가득했다. 계란 프라이를 하나씩 해서 나눠 먹고 김치를 밥에 올려 전투적으로 식사를 마쳤다. 그렇게 흐로닝겐까지 온 밥솥은 싱크대 한편을 차지하고 아침 햇살을 받으며 은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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