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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현락 Aug 23. 2021

두오모, 사백 육십삼 계단

연재소설 구름다리 #8

8


로마를 출발한 열차는 산타 마리아 노벨라 역에서 멈췄다. 현재는 태블릿 PC를 꺼내 숙소의 위치를 확인했다. 걷기에는 멀고 차를 타기에는 가까웠다.


태블릿 PC에서 경로를 확인하고 느린 걸음으로 피렌체 중심부를 통과해 다리를 건너 외곽에 있는 숙소 문 앞까지 다다랐다.


문 앞에는 중세 가문의 문양으로 보이는 표식이 새겨져 있었다. 커다란 문을 두드리니 자신을 마르코라 소개하는 노신사가 현재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2층에 자리 잡은 방은 생각보다 아늑했다. 예약한 날짜를 확인하고 조식 식권을 주며 마르코는 창밖에 보이는 소박한 식당 간판을 가리켰다. 짐을 풀고 밀린 빨래를 하느라 지쳐 잠이 든 현재는 다음날 아침 일찍 눈을 뜨자마자 마르코가 알려준 그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 문이 열리고 현재가 안으로 들어가자 손님들은 현재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비교적 외곽에 자리 잡은 숙소에는 동양인이 찾아오는 경우는 드물었던지 사람들은 현재를 신기한 듯 바라봤다. 식권을 건네자 커피와 함께 간단한 식사가 나왔다.


식당 안의 사람들은 서로에게 익숙한 듯 옆자리에 있는 사람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걸었고 노래하듯 열정적으로 대화했다. 식사를 하고 있을 때 숙소 주인인 마르코가 식당 문을 열고 들어왔다. 마르코는 현재를 보고 반가워하며 잠은 잘 잤는지 식사는 어땠는지 물었다.


모든 것이 다 좋다며 현재는 영어로 짧게 답했다. 오늘은 어디가려냐는 마르코의 물음에 현재가 두오모에 가려고 한다니 마르코는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였다. 오늘 가기보다는 좀 쉬었다가 내일 가는 편이 나을 거라며 마르코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식사 맛있게 하라는 인사와 함께 마르코는 친구가 있는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아 커피를 마셨다. 식사를 마친 현재는 마르코에게 눈인사를 하고 식당을 나왔다.


두오모는 피렌체 시내 어디에서든 보였고 모든 길은 두오모를 향했다. 그 덕분에 유럽에 온 이래 처음으로 현재는 지도의 도움을 받지 않고 두오모를 찾을 수 있었다.


두오모의 사백 육십삼 계단을 오르며 현재는 마르코가 옳았음을 깨달았다. 피렌체 첫날 도전하기에는 벅찬 코스였다.


후회는 때늦어서 이미 현재는 계단의 중간쯤 어디엔가 있었고 나선형 계단은 다른 사람에게 길을 양보하기에는 터무니없이 좁았다.


참고 올라가다가 어쩔 수 없이 계단에 주저앉았다. 누구도 현재를 재촉하지 않았다.


“아유 오케이?” 서툰 영어로 사람들은 현재의 안위를 물었다. 앞사람은 물을 건네주고 뒷사람은 어깨를 토닥여줬다. 별것 아닌 배려에 현재는 눈물이 났다.


이역만리 낯선 땅의 좁은 통로에서 현재는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을 마주하고 울었다. 부끄럽지는 않았다. 다만 영문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갑자기 멈춰서 울고 있는 자신이 민폐가 되는 것은 아닌지 염려됐다. 그 마음을 알았던지 사람들은 일행과 얘기하며 자신들도 한숨을 돌리고 있었다.


주저앉은 일 이 분의 시간이 꽤나 길게 느껴질 무렵 현재는 다시 몸을 일으켜 계단을 올랐다. 어느 정도 계단을 올라가자 두오모 안을 장식하고 있는 그림이 나타났다. 스치듯 그림을 둘러보고 다시 오른 계단은 기어서 올라가야 할 만큼 가팔랐다.


현재는 몇 해 전 앙코르와트에 간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도 사원의 꼭대기 계단을 기어서 올라갔다. 몸을 낮춰 겸손히 신에게 나오라는 뜻에서 일부러 계단을 좁고 가파르게 만들었다는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현재는 참 교만한 신이라는 생각을 했다.


두오모의 계단도 당당한 몸짓으로는 오를 수 없었다. 지친 몸을 계단에 붙이고 철제 난간을 간신히 붙잡고 겨우 한 걸음 나아갈 수 있었다.


일방통행으로 난 계단은 내려오는 사람들에게 길을 양보한 후에야 오를 수 있었다. 계단 끝에 가까워지자 이내 네모 난 출입구를 통해 빛이 새어 들어왔고 문을 통과하자 저 멀리 미켈란젤로 언덕부터 시뇨리아 광장까지 피렌체 시내가 한눈에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제니 일행분이시죠?”


별달리 할 일이 없어 전망대 난간을 한 바퀴 돌며 사진을 찍고 있는 현재에게 익숙한 한국어로 누군가 말을 걸었다. 인사를 건네는 사람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제니 친구였다.


바티칸 투어 때 우연히 줄을 같이 서다가 현재는 제니 일행을 만났다. 기다리기 지루했던지 일행 중에 하나가 현재에게 말을 걸었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니 현재가 아는 사람을 일행도 알고 있었다. 세상 좁다는 생각을 하며 함께 바티칸 투어를 하고 내친김에 남부 투어도 같이 다녀왔다.


로마에서 제니 일행은 베네치아로 갔고 현재는 피렌체로 왔다. 말을 건 사람은 남부 투어 때 인사를 한 제니 친구였다.


제니 친구는 남자 친구와 여행을 왔다가 남부 투어 때 제니와 조우했고 현재보다 하루 일찍 피렌체에 왔다. 남자 친구는 일이 있어서 전날 한국으로 돌아갔고 자신은 일주일 정도 더 여행을 할 계획이라고 했다.


“남자 친구 없으니 사진 찍어 줄 사람이 없네요. 사진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아, 그럼요. 찍어 드릴게요. 어디서 찍어 드릴까요?”


“그럼, 같이 사진 찍어요. 저도 찍어 드릴게요.”


피렌체 시내를 배경으로 제니 친구는 포즈를 취했고 현재는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몇 장의 사진을 찍고 나자 제니 친구는 미안했던지 이번에는 자신이 찍어 주겠다며 카메라를 달라고 했다.


괜찮다고 몇 번 사양하다가 카메라를 건네 준 현재는 어색한 포즈를 몇 번 취하고 카메라를 돌려받았다.


“한번 확인해 보세요. 제가 제대로 찍었는지 모르겠네요.”


화면에는 어정쩡하게 서 있는 현재가 보였다. 자신이 찍어 준 사진에 현재가 만족해하는지 확인하던 제니 친구는 빠르게 넘어가던 화면에서 은혜의 사진을 보고 누구냐고 물었다.


“여자 친구예요.”  

“두 분이 잘 어울려 보이세요. 남매 같기도 하고요.”


“그런 소리 많이 들었어요. 같이 다니면 남매인 줄 알아요.”


사람들은 은혜가 누나냐고 물었다. 또래보다 속 깊고 살뜰한 은혜를 사람들은 제 나이보다 많이 봤다. 때론 억울해하면서도 은혜는 익숙한 물음에 싫은 기색 없이 “네, 내가 쟤 누나예요.” 하고 웃었다.


현재는 그런 농담을 즐겼고 때로는 은혜를 누나라고 불렀다. 현재가 은혜를 처음 본 날은 유난히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면접 대기 순서를 기다고 있던 현재에게 은혜는 머리를 가리키며 빗어 넘기는 시늉을 했다. 알고 보니 바람에 머리카락이 날려 산발이 되어 있었다.


얄궂게도 다른 면접 대기자들은 현재의 산발을 보고도 모른 체하며 면접 예상 질문지만 붙들고 있었다. 핸드폰 액정으로 얼굴을 비추며 머리를 다듬고 있으려니 은혜가 다가와 일회용 빗을 주고 총총히 사라졌다. 대학원에 입학하고 나니 은혜는 두 학기를 먼저 들어온 선배였다.


군대를 다녀온 현재가 은혜보다 나이는 많았지만 현재는 은혜를 누나라고 불렀다. 선배도 아니고 누나라고 부르면 은혜는 현재에게 오라버니라고 응수했다. 둘은 그렇게 장난을 치며 가까워졌다.


대학원에서 은혜는 일 잘하고 싹싹한 일등 신붓감이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교수들은 은혜의 박사과정은 허락하지 않았다. 은혜는 대학원을 졸업하고 취업했지만 공부에 대한 미련이 남아 현재와 스터디를 계속했다.


“뭐가 문젤까? 싫다는 데도 신랑감은 소개해주겠다던 분들이 왜 박사과정은 안 받아 주는 거야?”

“까짓 박사 못하면 어때? 우리 얘기한 게 있잖아? 같이 글 쓰면서 여행 다니면 되잖아. 자기도 글 쓰는 거 좋아하고. 남이 써 놓은 글 분석하는 거보다 내 글을 남이 분석하게 하자고 말하지 않았어?”


은혜의 글은 단정하고 산뜻했다. 읽고 있으면 머리가 맑아지는 잘 정돈된 글이었다. 매번 교수들은 은혜의 글을 칭찬하면서도 갑자기 툭 튀어나오는 감성이 객관성을 잃게 한다며 나무랐다. 은혜는 학문적 글쓰기에도 감성을 접목하고 싶다며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은혜의 이 작은 반항에 사람들은 적잖게 놀랐고 지도교수는 그럴 거면 네 마음대로 논문을 쓰라며 예비심사에서 은혜의 논문을 퇴자 놓았다. 겨우 마무리만 한 논문을 들고 은혜는 그 해 여름에 졸업했다.


“난 자기 글이 좋아. 만약 중세에 태어났다면 단테 같은 작가가 됐을지도 몰라.”

“단테는 고향에서 쫓겨나서 글을 썼잖아. 난 그렇게까지 글을 쓰고 싶지는 않아.”


“그럼, 피렌체에 한번 가볼까? 거기 가서도 글을 쓰고 싶지 않으면 그때 그만둬도 되잖아.”

“자기랑 같이 가고 싶어. 두오모에도 올라가고 단테 생가에도 가보고.”


은혜는 르네상스 예술가들에 관심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단테를 사랑했다. 삼이란 숫자에 맞춰 정교하게 조직되어 있는 글의 형식과 운율은 은혜로 하여금 경이로운 문학의 세계를 맛보게 했다.


토스카나어가 표준 이태어가 되도록 만든 장본인이자 이태리어를 예술의 수준으로 끌어올린 언어의 장인에게 은혜는 매료되고 말았다.


은혜를 매료시킨 이태어가 곳곳에서 들리는 피렌체에서 현재는 은혜를 그리워했다. 마치 단테가 베아트리체를 그리워하며 사순절 여행을 떠난 것처럼 현재도 이 여행의 끝에서 은혜와 마주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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