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구름다리 #9
9
“이제 돌아가려고요. 아버님도 잘 계시죠?”
“은혜 기일이 얼마 안 남았는데 그 전에 올 수 있겠어? 줄 것도 있고.”
“될 수 있으면 맞춰서 갈게요.”
칠십 일 동안 열두 나라 서른여덟 도시를 돌아다녔다. 비행을 좋아하는 현재는 도시와 도시를 이동할 때 기차 대신 비행기를 택했다. 상승과 하강의 긴장감으로 가득한 비행기 여행이 현재에게는 이 여행에서 누리는 유일한 호사였다.
활주로를 달리던 비행기가 어느새 하늘로 솟구쳐 오를 때는 흡사 놀이기구를 타는 기분이었다. 벨트를 매고 이륙을 기다릴 때의 설렘을 현재는 잊을 수 없었다. 그동안 현재는 많은 비행기를 탔다. 하지만 이번 여행에서 비행기를 택한 이유는 예전과 달랐다.
현재는 은혜와 가장 가까운 곳에 머물고 싶어 오랜 시간의 비행을 택했다. 현재는 하늘 어딘가에 은혜가 있을거라 믿었다. 확인할 수 없었지만 현재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은혜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하늘 어딘가에 존재하는 거야.’
하늘에 머무는 동안만큼은 그 믿음이 사실 같았다. 여행하기 위해 비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비행하기 위해 여행을 하는 것처럼 현재의 비행시간은 늘어만 갔다. 현재는 조금 더 하늘 가까이 은혜 가까이 머물고 싶었다.
은혜와 바이킹을 탈 때면 현재는 맨 끝자리에 앉았다. 천천히 움직이던 바이킹은 가속이 붙기 시작하면서 하늘 높이 솟구쳤다. 상승과 하강의 곡선을 그리는 바이킹에서는 두려움 때문인지 즐거움 때문인지 모를 비명소리가 연신 흘러나왔고 현재는 그 와중에 두 손을 활짝 들고 만세를 불렀다.
안전 바를 꼭 쥐고 있는 은혜에게 현재는 이렇게 손을 들고 타야 진짜 프로라며 손을 떼라고 외쳤다. 그때마다 은혜는 “죽을 라면 너나 죽어 이 나쁜 놈아!” 라며 눈물을 글썽였다. 세상 차분하던 은혜가 바이킹만 타면 평소답지 않게 돌변하는 그 모습을 현재는 즐겼다.
“나한테 욕 듣는 게 그렇게 좋아? 무슨 악취미냐?”
“난 자기가 안전 바를 꼭 붙들고 욕을 하면 그게 그렇게 웃기더라. 죽는 게 그렇게 무섭냐?”
“그럼, 무섭지 안 무서워? 죽으면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자기가 죽으면 내가 단테처럼 찾아갈게. 그러니 걱정 마.”
현재는 바이킹에서 나눈 대화를 후회했다. 왜 은혜가 먼저 죽을 것처럼 얘기했을까. 마치 그 말 때문에 은혜가 먼저 세상을 떠난 것처럼 현재는 자신을 탓했다. 그날 그 얘기를 하지 않았다면 은혜는 살아 있을까? 바보 같은 질문을 되풀이하며 현재는 그 후로 놀이동산에 가지 않았다.
어쩌면 약속을 지키기 위한 안간힘이었을지 모를 비행은 칠십일 동안 이어졌다. 기차로 한 번이면 중앙역까지 들어 올 텐데 굳이 비행기를 타고 왔냐며 핀잔을 주는 민박집 사장님도 있었다. 그때마다 현재는 구차한 설명대신 “그러게요, 이럴 줄 몰랐네요. 다음에는 기차로 와야겠어요.”하고 웃어 넘겼다.
마지막 여행지인 이스탄불을 앞두고 현재는 괴레메에 도착했다. 파묵칼레에서 예약한 버스를 타고 괴레메에 도착한 날 만난 한국인 일행은 벌써 일주일째 벌룬이 뜨고 있지 않다며 내일도 뜨지 않으면 포기하고 이스탄불로 가야 할 것 같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현재는 사정도 모른 채 한국에서 벌룬 투어를 예약하고 왔다. 꽤 비싼 값을 치루고 예약했고 만약 내일 벌룬을 타지 못하면 그대로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평소라면 타지 않았을 만큼 벌룬의 가격은 비쌌다. 타고 싶은 것 마음껏 타고 오라는 은혜의 당부가 아니었다면 아마도 현재는 예약을 미뤘을 것이다.
기왕 예약했으니 바람이 멈추길 바랐다. 일출을 봐야 한다며 투어 회사는 새벽 네 시까지 숙소 앞으로 픽업 차량을 보내 줄 테니 타고 오라고 했다. 과연 새벽 네 시에 숙소 앞에 나가니 지프 차 한 대가 시동을 건 채 현재를 기다리고 있었다. 차는 다른 숙소 두 군데를 더 들려서 사람들을 태우고 벌룬 회사로 갔다.
차를 마시며 다시 벌룬이 있는 곳으로 이동할 차량을 기다리는 현재에게는 이 모든 것이 꿈결 같았다. 한참을 기다리자 차량이 도착해서 벌룬이 있는 벌판에 현재를 내려주었다. 벌룬은 아직 부풀어 오르지 않아 벌판에 쓰러져 있었고 벌룬 회사 직원들은 익숙한 솜씨로 기구에 불을 붙여 벌룬에 바람을 불어 넣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벌룬은 점차 부풀어 오르기 시작하더니 서서히 일어섰다. 사람들이 사각의 바구니에 동서남북으로 두 명씩 자리를 잡고 서자 벌룬은 하늘 높이 올라갔다. 어느 정도 올라가자 사방에서 떠오르는 벌룬으로 하늘은 비현실적인 풍경을 빚어냈다.
하늘 가득 총천연색의 벌룬들은 마치 한 명의 지휘를 받듯 일사분란하게 떠오르고 이동했다. 발아래로 기암절벽들이 지나가고 옆으로는 다른 벌룬에 탄 상기된 사람들의 표정이 보였다. 지면을 분홍빛으로 물들이는 태양은 서서히 떠올라 벌룬을 감쌌고 사람들은 태양의 인사에 환호했다.
‘하늘이 이렇게 아름다울수도 있구나. 은혜야 네가 있는 곳도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니?’
현재는 은혜가 커다란 벌룬에 매달린 하늘 섬에서 살고 있는 상상을 했다. 바람 따라 날아다니는 섬은 세계 곳곳으로 은혜를 데려 간다. 은혜는 그 섬에서 지금 벌룬을 타고 있는 현재를 바라보며 애타게 부르지만 현재는 그 벌룬을 볼 수 없다.
거기까지 상상할 무렵 벌룬은 어느새 지상에 내려앉았다. 벌룬에서 내리자 사람들이 샴페인 잔을 건넸고 함께 투어를 마친 사람들은 서로 잔을 부딪치며 즐거워했다. 잔을 비워갈 무렵 투어 회사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상장처럼 생긴 수료증을 현재의 손에 쥐어주었다.
엉겁결에 받아든 수료증에는 여행의 끝을 인증해 주는 것만 같은 큼지막한 도장이 찍혀 있었다. 이제 여행은 끝났다. 현재는 짐을 챙겨 이스탄불 공항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