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삶글 10
보려고 하니 모두 다 보인다
꿈에서 본 것들이 다 보인다
보려고 하니 비로소 보인다
보려고 하니 내가 보인다
보려고 하니 네가 보인다
바다에 숨어있던 것들이 보인다
하늘에 숨어있던 것들도 보인다
외도 앞바다에서 깊이 주무시던
관세음보살님도 서서히 보인다
파도소리가 목탁소리로 보인다
구름의 발자국에서 운판소리 들린다
누워계신 부처님께서 아침 샤워를 하신다
명상하던 부처님께서 저녁 샤워를 하신다
윤동주 시인의 가족 약사를 읽는다. 1886년 윤동주 시인의 관향은 파평. 증조부 윤재옥, 함경도 종성에서 간도의 자동(子洞 또는 紫洞 )으로 이주. 1900년 조부 윤하현, 명동촌으로 이주. 이보다 한 해 앞서(1899년), 외삼촌 규암 김약연 선생(한학자) 명동촌으로 이주. 1910년 윤동주 일가, 기독교에 입문. 외삼촌 김약연 선생도 이 해에 기독교에 입문. 1917년 12월 30일 윤영석(부) 김룡(모) 사이의 장남으로 명동촌에서 윤동주 시인 출생. 아명은 해환. 당시 부친은 명동학교 교원. 1925년 4월 4일 명동소학교 입학(졸업 1931.3.15). 4학년 무렵, 급우들과 《새 명동》이라는 등사 잡지 발간. 1932년 4월 용정의 은진중학교에 고종 송몽규 및 소학교 동기 문익환과 함께 입학. 가족 용정으로 이사. 1934년 12월 24일 최초의 작품으로 알려진 <초 한 대><삶과 죽음><내일은 없다> 등 작품을 쓰기 시작.
나의 아버지는 1931년 3월 26일에 이 세상에 태어나셨다. 그때 윤동주 시인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앞에서 서술한 윤동주 시인의 가족 약사에는 분명하지 않다. 1931년 3월 15일에 명동소학교를 졸업했다고 나온다. 그리고 1932년 4월에 용정의 은진중학교에 입학했다고 나온다. 그렇다면 그 사이 1년 동안 윤동주 시인은 무엇을 하였을까? 앞에 서술한 가족 약사는 홍장학 선생님께서 엮으신 『정본 윤동주 전집』을 참고한 것이다. 그렇다면 홍장학 선생님께서 참조하셨다는 『사진판 윤동주 자필 시고 전집』을 다시 읽어야만 한다. 역시, 윤동주 시인을 알려면 『사진판 윤동주 자필 시고 전집』을 읽어야만 한다.
1931년 15세 : 3월 15일, 명동소학교를 졸업하다. 학교에서 졸업생 14명에게 김동환 시집 『국경의 밤』을 선물로 주다. 송몽규, 김정우와 함께 명동에서 10리 남쪽에 있는 소읍인 대납자의 중국인 소학교 화룡 현립 제일소학교 고등과에 편입하여 1년간 수학하다. 『사진판 윤동주 자필 시고 전집』 윤동주 연보
아, 나의 아버지가 태어나신 해에 윤동주 시인은 김동환의 시집 『국경의 밤』을 읽었을 것이고 송몽규, 김정우와 함께 중국인 소학교에 다녔을 것이다. 그러니까 윤동주 시인이 용정으로 이사 가기 전 해에 윤동주 시인처럼 나의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고향에서 태어나셨다. 같은 하늘 아래서 윤동주 시인과 나의 아버지는 같은 공기를 호흡하며 함께 사셨다. 윤동주 시인은 북간도에서 그리고 나의 아버지는 한반도 남쪽에서 같은 하늘을 보며 사셨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나는 이미 아버지의 몸속에 잉태하여 같은 공기를 마시며 윤동주 시인과 함께 살았을 것이다. 그렇게 윤동주 시인은 태어났고 나 또한 아버지 몸속에서 시인을 꿈꾸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참 바보였다. 나는 참으로 바보 멍청이였다. 두 번의 큰 수술이 나를 더욱 바보로 만들었을 것이다. 어쩌면 붉은여우에게 물리는 바람에 더욱 바보가 되었을 것이다. 또한 알코올 중독자와 도박 중독자의 가족으로 살면서 우울증에 시달리다 보니 나도 모르게 더욱 바보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는 과정에서 잃은 것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면서 나는 또한 많은 것을 배웠다. 자살충동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고 각종 중독증으로 고생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말도 함부로 못 하고 홀로 고통 속에서 힘들어하는 환자들과 함께 고통받는 많은 가족들을 가까운 곳에서 함께하면서 더 많은 것들을 보고 듣고 느끼며 배웠다.
나는 올해 6월까지 근무하고 7월부터 2년 동안은 임금피크제로 더 근무를 할 예정이다. 근무 시간이 절반으로 줄어든다. 따라서 월급도 절반으로 줄어든다. 기존의 퇴직금제도로 퇴직금을 받는다면 퇴직금도 절반으로 줄어든다. 보통 퇴직금 산정 방법은 퇴직 직전 3개월 평균으로 계산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임금피크 전에 퇴직금 제도 전환을 신청해야만 한다. 현 퇴직급여제도인 확정급여형(DB)에서 변경 퇴직급여제도인 확정기여형(DC)으로 전환을 해야만 한다. 물론 나는 10여 년 전에 이미 퇴직금 중간 정산을 받은 상태여서 그렇게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나는 어제 동료들에게 바보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바보 멍청이라는 말을 들었다. 내가 스스로 생각해도 나는 참 바보 멍청이가 틀림없다.
남들은 참 재미있게 잘도 사는데 나는 왜 이렇게 늘 바보로 사는 것일까. 어찌하여 나는 늘 이렇게 멍청이가 되어 재미도 없이 사는 것일까. 그나마 나를 나답게 살아있게 하는 것은 글쓰기가 아닐까 생각을 한다. 나는 세상에 재미있는 것이 별로 없다. 남들처럼 술을 먹지도 않고 담배도 피우지 않는다. 또한 도박이나 어떠한 게임도 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말해서 나는 참 재미없는 사람이다. 나는 홀로 산책을 하거나 글을 쓰거나 사진을 찍으면서, 생각을 정리하거나 미래를 설계하거나 희망을 가공할 때 약간의 즐거움을 느낀다. 그리고 삶과 죽음의 중간쯤에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이어도공화국을 만들어서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세상, 산 사람들과 죽은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꿈꾸며 살아간다.
나는 요즘 죽어서도 살아있는 윤동주 시인과 함께 지내는 시간이 많다. 윤동주 시인과 함께 시와 삶과 꿈과 죽음과 예술에 대하여 대화를 많이 한다. 오래도록 생각하면 그 사람이 꿈속으로 찾아온다. 꿈속에서 대화를 하다 보면 눈을 뜨고도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 하지만 나는 이제 산 사람들과 좀 더 가까이 지내고 싶다. 남들처럼 산사람들과 좀 더 깊은 대화를 나누며 서로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행복한 시간을 더 많이 가져야겠다고 다짐한다. 나는 아직 브런치스토리 운영체계도 잘 모른다. 얼마 전부터 연재를 시작하면서 더욱 흥미를 느끼고 더욱 잘 써야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는 중이다. 또한 혼자만의 글쓰기가 아니라 서로 소통하며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는 소중한 관계로 발전할 수 있기를 소망하게 되었다. 나는 그동안 단순한 자료보관용으로 활용한 측면이 강했다. 하지만 앞으로는 서로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소중한 만남의 장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발행하면 바로 달려와서 라이킷을 눌러주시는 독자분들과 앞으로는 댓글도 주고받으며 형편이 되면 서로에게 응원도 할 수 있는 아름다운 관계로 발전할 수 있도록 내가 먼저 실천하고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나는 새로운 곳을 찾아다니기보다는 한 곳을 여러 번 다니는 습관이 있다. 한 곳을 자세히 보는 버릇이 있다. 사람의 관계도 그런 편이다. 여러 사람들과 가볍게 사귀는 스타일이 아니라 한 사람과, 같은 사람과 오래도록 깊이 사귀는 편이다. 내가 쓰는 이 브런치 글들이 그런 소중한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좋은 인연으로 승화되기를 꿈꾸어본다. 오늘은 내가 자주 다니는 산책길에서 누워있는 해수관음상을 보며 아직도 깊이 엎드려 계시다는 경주의 남산 열암곡 마애부처님을 오래도록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