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삶글 23
곡성 고향집 바로 앞에
연어의 종착역 표지석이 있다
나는 연어가 되어
참으로 먼 길을 거슬러 돌아왔다
나도 이제는
연어알 같은 붉은 알을 낳아야겠다
b
나의 오랜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아름다운 산이나 아름다운 섬이 꼭 필요하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산이나 섬을 확보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리하여 나는 현실적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부터 하려고 한다. 먼 훗날 또 다른 내가 나타나서 아름다운 산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세상을 꼭 만들어주길 기도한다. 나는 그 아름다운 세상의 작은 씨앗이라도 되고 싶다. 요즘 내가 만들고 있는 이어도공화국 베이스캠프가 그 작은 씨앗이 되기를 희망한다. 그리고 혹시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각자의 처지에 맞도록, 작지만 아름다운 공간을 만들어 연합하는 방법도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작은 씨앗들이 모여 아름다운 숲을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일종의 <아름다운 쉼터연합>을 만들면 어떨까 혼자 생각해 본다.
하지만 나는 이제 서두르지 않는다. 욕심을 부리지도 않는다. 나는 다만 내가 가진 아름다운 씨앗을 잘 심고 아름답게 가꾸고 싶을 뿐이다. 먼 훗날 그 아름다운 씨앗이 아름다운 숲을 만들 수 있을 거라는 희망 때문에 나는 오늘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된다.
이어도공화국 베이스캠프 이름을 이어도서천꽃밭이라고 정했다. 달문moon이라는 이름도 좋지만 이어도서천꽃밭이라고 정했다. 나는 오래도록 이어도로 살았다. 그리고 이어도공화국을 만들기 위하여 30년 넘게 준비를 하였다. 이어도는 제주도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상향인 동시에 죽은 사람들이 모여서 산다고 생각하는 특별한 섬이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그 섬에서 홀로 꿈꾸며 살았다. 그러다가 생각 속에만 존재하는 섬을 실제로 만들고 싶었다. 내가 생각하는 가장 아름다운 나라를 만들고 싶었다. 그런데 이어도종합해양과학기지가 생기면서 내가 생각했던 이어도에 대한 상상력에 오히려 상처를 입게 되었다. 제주도 사람들이 오래도록 꿈꾸어온 이상향을, 바다 가운데 세워진 철탑 하나로 규정하려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내가 생각하는 이어도는 이어도종합해양과학기지가 아니다. 내가 생각하는 이어도는 차라리 불로초를 찾으려고 제주도에 왔다는 서복과지의 주인공, 서복선생이 만들었다는 어느 섬에 더 가까울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내가 좋아하는 서천꽃밭과 합쳐서 이어도서천꽃밭이라고 이름을 정했다. 바로 이 이어도서천꽃밭에서 이어도공화국을 꿈꾸며 만들 작정이다. 이어도서천꽃밭에서 나는 몸과 마음이 아픈 사람들을 위하여 살살이꽃 뼈살이꽃 숨살이꽃을 가꾸며 아픈 사람들을 위하여 조금이라도 도움을 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살아갈 작정이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를 만들기 위하여 제주도의 아름다운 곶자왈을 많이 알아보았다. 그러다가 좋은 기회가 있어서 성사될 뻔하였는데 결국 중단되고 말았다. 그리고 연어의 종착역이 있는 고향집과 반월산을 염두하고 추진을 하였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작은 고향집과 작은 반월산자락을 구했을 뿐 구체적으로 추진하지 못하고 중단된 상태로 있다. 또한 정읍사의 고장 정읍에, 옥정호가 앞마당으로 펼쳐진 종석산에 이어도공화국을 만들기 위하여 추진하였으나, 산을 구입하고 교육까지 받아서 임업 후계자가 되었으나 믿었던 친구와 가는 길이 달라서 역시 중단된 상태에 있다.
하지만 눈을 똑바로 뜨고 세상을 다시 한번 둘러보니 참 좋은 사람들이 참으로 많다. 또한 나름대로 잘 꿈꾸고 잘 가꾸고 있는 좋은 사람들이 내 곁에는 아직도 참 많이 남아있다. 김도수 시인을 비롯하여 지리산 섬진강 시인들 그리고 아름다운 여수 시인들도 의미 있는 별장들을 소유한 사람들이 많아서 여러 사람들의 마음을 합칠 수 있다면 내가 구상 중인 <아름다운 쉼터연합>은 실현 가능한 일이 될 것이다. 특히,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폐가들을 활용하면 더욱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요즘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아름다운 제주도에 이어도서천꽂밭을 더욱 의미 있는 공간으로 만들어야만 할 것이다. 추진력을 갖추기 위해서라도 내가 먼저 앞장서서 작고 아름다운 공간을 만들어야만 할 것이다.
내가 구상하는 이어도공화국은 이제 연합체제로 추진될 전망이다. 이어도공화국 베이스캠프인 이어도서천꽃밭이 꼭 중심이 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좋은 뜻을 품은 사람들이 각자의 처지에서 아름답게 만들어서 연합을 하는 방향으로 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나는 우선 제주도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부터 찾아서 할 예정이다. 전국각지에 각 본부가 만들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어도공화국 곡성반월산 본부, 이어도공화국 정읍종석산본부, 이어도공화국 여수은하수본부...., 이런 식으로 본부 체제를 구축하고 싶다. 본부장 중심으로 만들어서 <아름다운 쉼터연합>으로 발전할 수 있으면 좋겠다.
나의 고향 곡성에 작은 고향집과 뒷산인 반월산에 아주 작은 땅이 있다. 이곳에 누군가 살면서 의미 있는 쉼터를 만들어주면 좋겠다. 나에게는 특별한 추억과 아픔이 있는 곳이어서 내가 추진하려고 하였으나 여러 가지 여건상 내가 직접 하기는 좀 어려울 것 같다. 그러니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좋은 일을 함께 하면 좋겠다. 제주도 이어도서천꽃밭을 포함한 곡성반월산 본부 정읍종석산본부 등의 소유권은 재단법인 등을 만들어서 내가 죽은 다음에도 팔리는 일이 없도록 조치를 취할 생각이다. 그러니 우선 곡성반월산 본부를 맡아서 이끌어줄 의향이 있으신 분은 연락 주면 좋겠다. 그러면 의논해서 본부장으로 임명하고 사업을 추진할 생각이다. 곡성반월산 본부가 자리를 잡으면 다음은 정읍종석산본부를 추진할 생각이다.
아버지 살아계실 때 말씀하셨습니다
집이 너무 좁아서
마을에 돈을 지불하고
창고 자리 땅을 사서 창고를 지었다고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등기가 되어 있지 않아서
이번에 실시한 지적 재조사 관련하여
창고자리 토지를 추가로 매입해야만 했습니다
전국에 있는 빈 집들 수리를 하여
가난한 작가들 창작실로 써도 좋고
지친 사람들 무료 쉼터로 써도 좋고
가난한 사람들 살림집으로 써도 좋고
여러 가지 활용방안을 생각해 봅니다
저도 늘 비어있는 집이 하나 있습니다
전남 곡성군 삼기면 원등리 957번지
제가 중학생 시절까지 살았던 집이 있는 곳입니다
바로 집 앞에 삼기천(섬진강으로 이어짐)이 있고
징검다리가 있고
호남고속도로가 있고
제가 태어난 월경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너무 오랫동안 이곳에 가지 못했습니다
도저히 갈 수 없었습니다
2013년 6월 3일
겨우 용기를 내어 갈 수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저를 가장 슬프게 하는 글입니다
이 글은 어머니의 마지막 글입니다
아마도 병원을 몰래 빠져나오셔서
고향집에서 농약을 마시고
그 농약이 온몸으로 퍼지는 순간에 쓰셨을 것입니다
신음소리가 새어나갈까 봐
수건을 입에 물고
치아가 다 으스러지도록 입을 앙다물고 쓰신 듯합니다
자식인 저는 평생 용서받지 못할 것입니다
저는 사망 진단서 대신
시체 검안서를 읽으며 온몸으로 울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습니다
2006년 2월 26일 20시 54분
2007년 04월분 전기요금 고지서가 있는 것으로 보아
어머니께서 떠난 이후에도 전기는 한동안 들어왔나 봅니다
어머니는 머리카락이 엉덩이까지 내려왔었다고 하셨습니다
오빠와 언니들의 귀여움을 한 몸에 받은 막내딸이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름도 딸막이라고 하셨습니다
맨 앞에 보이는 슬라브 건물은 오랫동안 구멍가게였습니다
처음에는 이런 집도 없어서
빨랫비누, 세숫비누, 바늘, 동정, 검은 고무줄, 애기고무줄, 이태리 타울, 비누곽 등등
커다란 미원박스에 생활용품들을 담아 이고 다니시며 팔아야만 했던
도붓장수, 보부상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새마을운동 일환으로 마을 회관에 함께 지었던 구판장을 하다가
구판장을 못하게 되자
화장실 자리에 슬래브 집을 짓고 구멍가게를 하시다가
바로 그 가게 방에서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너무 오랫동안 집을 비워 방치해 두었더니
대문은 멀쩡한데
집 안의 물건들은 누군가 다 털어가 버렸습니다
빈 집에도 이렇게 새 이름표가 붙어 있습니다
옆집도 다 헐리고
쭈욱 늘어선 정자나무 무성한 놀이터였던 자리에
정자나무는 늙고 새로운 정자가 만들어져 있습니다
집 바로 앞에 있는 정자에는 텔레비전까지 갖추어져 있습니다
가게 건물 옆
아래채 벽이 위험해 보입니다
아래채 옆
창고 벽은 이미 무너져 있습니다
빨리 정리를 해야 할 듯합니다
슬래브집 지붕에서 본 본채 지붕입니다
집터가 워낙 좁아서
마당이 너무 좁고
텃밭 없는 것이 흠입니다
슬래브집 지붕에서 본 정자 지붕입니다
구멍가게 지붕과 정자 지붕이 닿을 듯 가깝습니다
가게 건물 내부 모습입니다
앞에 보이는 작은 탁자는
가게방 앞에 있었던 것입니다
막걸리와 소주를 마시는 술상입니다
주 안주는 김치와 기름소금이었습니다
주로 아버님께서 술을 마시던 술상입니다
저물녘이면 늘
아버님의 얼굴로 붉은 해가 떠올랐습니다
다행히 술상은 돈이 되지 않았는지
고물장수도 가져가지 않았습니다
가게 바닥에 전기요금 고지서가 있었습니다
형제들도 저와 비슷한 마음이었는지
1년 넘게 전기 들어오다가 지쳐서 끊겼나 봅니다
광주에 살고 계신 누나와 함께 집을 둘러보고 알아본 결과
아직도 집은 어머니 앞으로 있었습니다
누나와 형님들과 동생에게 연락하니 나에게 관리를 하라고 합니다
그냥 아무 조건 없이 내 앞으로 상속을 하고 내 마음대로 쓰라고 합니다
제 생각에는 큰 형님 앞으로 가야 할 것 같아 큰 형님께 말씀드렸더니
그냥 저에게 쓰라고 합니다
그래서 형제들 모임 총무인 막내와 의논한 결과
부모님을 위한 형제들 모임 통장으로 5백만 원 입금하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습니다
형님들과 누나는 돈 받는 것을 극구 사양하시지만
(얼마 전에 누나가 3백만 원에 팔려고 내놓았는데 팔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것이 서로에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야만 저도 마음의 짐을 조금이라도 덜 것 같습니다
곡성군청에 갔습니다
곡성군 기차마을에서 장미축제가 있었습니다
22세기 약속의 땅 곡성군
기차마을이 있는 곡성군
심청이 마을과 섬진강이 있는 곡성군
여기에서 저는 다시 문학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그동안 너무 멀리 돌아서 온 것 같습니다
곡성군청이 정겹게 느껴집니다
등기소까지 들러 왔습니다
서류정리는 천천히 해도 된다고 합니다
아마도 저번 태풍에 창고 담장이 무너진 것 같습니다
집터는 좁아도 최대한 활용한 집이기 때문에
안쪽 내부는 상당히 넓습니다
방이 4개 이상 나올 것입니다
천천히 수리할 생각입니다
가게방은 심야전기 난방설비가 잘 되어 있어
전기공급만 재개되면 바로 쓸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방을 먼저 정리하고 도배해서 사용하면서
나머지도 고치면서 글을 쓸 생각입니다
아마도 저는 그렇게 많이 사용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창작 작업실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무료로 빌려줄 생각입니다
또 누가 압니까
이 작은 창작 작업실에서 세계적인 작품이 탄생할 수 있을지......,
주위 여건으로 보아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봅니다
좋은 인연을 꿈꾸어 봅니다
집 바로 앞에 있는 정자도 잘만 활용하면 좋을 듯합니다
저 뒤에 보이는 분들은 누나와 매형입니다
정자 바로 앞으로 삼기천이 흐르고
옛날에는 흐르는 물도 많아서 징검다리가 있었습니다
징검다리 건너
뚝 너머에 우리 집이 있었습니다
뚝을 넘으면 월경리입니다
그곳에서 저는 어릴 때부터 오리를 많이 길렀습니다
제 시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징검다리의 주요 배경이었습니다
비가 많이 오면 뚝이 넘쳐 회관으로 피난을 가야만 했습니다
불가피하게 자물쇠를 채웠습니다
다음에 혹시 사용하시고 싶은 분들은 저에게 연락 주시길 바랍니다
비밀번호를 알려드리겠습니다
하나
길이었다 덜 자란 몸으로 건너가는 징검다리
어머니는 방물을 파셨고 새벽 샛강의
입김 자욱한 안갯속으로 떠나시곤 했다
나는 담장 밑에 펼쳐놓은 꼬막껍질에
쑥국 끓이기 놀이를 하며 자랐다
노을만 어렵게 어렵게 감아 들이던
바람개비가 스스로의 바람결을 가늠할 수 있을 때
물오리를 기르기 시작했다 파랑 간짓대 들고
오리 떼를 몰아내던 골목이 심하게 흔들렸다
어머니 뒷모습을 지우던 안갯속으로
하얀 꽁무니가 사라지고
나도 그 속으로 따라 날아가고 싶었다
둘
할아버지 산소가 보이는 징검다리 사이로 햇살이
주검처럼 부서지며 흘러갔다 하류에서
한 몸으로 몸을 섞기 위해 취로사업 나가신
아버지가 무너진 둑에 묻히고 작업복이 천수답
허수아비에 내걸리던 날도 나는 그 저수지 뚝에서
삐비 꽃을 뽑아먹고 돌아오는 길
가로수 구멍 속에 몇 개의 돌을 더 던져 넣었다
어머니가 가슴을 움켜쥐고 쓰러지는 줄도 몰랐다
그 해 여름 장마는 담장의 발목을 적셨고
두꺼비 같은 우리 식구들은
한밤중에 회관으로 기어 올라갔었다
셋
학교 앞 코스모스로 기다리기를 즐겼다
하학종소리 사이로 보이는 형의 검정고무신 앞은
발가락이 먼저 나와 있었고 생활 보호 대상자
가족 앞으로 달려오는 옥수수 빵과 건빵
나는 그것이 좋았다 우리는 뿔 필통 속 몽당연필로
흔, 들, 리, 며, 징, 검, 다, 리, 건, 넜, 다,
끈이 풀리는 소리로 흘러가는 여울물 소리는
우리를 다시 묶어주었다 그리하여
우리들은 징검다리를 잘도 건너 다녔다
넷
수수깡으로 안경을 만들어 끼고 기차놀이하던
우리들은 그 새끼줄 속에서 자유로웠다
우리들의 기차는 징검다리를 비로소 건너 다녔고
오후의 서툰 기적소리 울리며
동구 밖까지 나가 놀던 소아마비 동생은
밤이 늦도록 돌아오지 못했다 찾다가 찾아보다가
어린 집배원이 된 큰 형도
동생의 소식은 가져오지 못하고 한 떼
건너가는 동네 아이들만 오래도록 바라보곤 했다
다섯
여울물 소리는 끈이 풀리는 소리였고
또다시 묶이는 소리였다 방직공장에 취직했던
누이가 파란 눈의 아이를 보듬고 돌아와
빨래터에는 방망이질 소리가 잠들지 않았고
헛발 짚은 어머니는 물속에 더욱 자주 빠지셨다
……………… 배고픔과 어머니 ………………
들판에 흐드러진 달맞이꽃 사이로 그렇게 어머니는
젖은 보름달을 이고 늦게 돌아오시곤 했다
연어의 종착역
곡성 고향집 바로 앞에
연어의 종착역 표지석이 있다
나는 연어가 되어
참으로 먼 길을 거슬러 올라왔다
나도 이제는
연어알 같은 붉은 알을 낳아야겠다
공부시간 : 세상 공부를 위하여 빌려온 책입니다.
06화 반야심경 명상 5 : 없음의 의미 (brunch.co.kr)
by김경윤Jun 23. 2021
그러므로 공 가운데는 색이 없고 수 상 행 식도 없으며,
是故 空中無色 無受想行識
안 이 비 설 신 의도 없고,
無眼耳鼻舌身意
색 성 향 미 촉 법도 없으며,
無色聲香味觸法
눈의 경계도 의식의 경계까지도 없고,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세계철학사를 큰 틀에서 양분하면 ‘존재’의 철학과 ‘생성’의 철학으로 대별할 수 있다. ‘존재의 철학’은 영원한 있음[有]을 인정하고 없음을 부정한다. 이 입장의 슬로건은 “있는 건 있고 없는 건 없는 것이다.”이다. 고대 엘레아학파 철학자 파르메니데스(BC 535~?)에서 출발하는 이 철학적 태도는 플라톤의 ‘이데아’,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 중세철학의 ‘신’에 이어 근대철학의 ‘이성(정신)’에 이르기까지 서양철학의 주류적 입장이었다. 이 철학은 영원한, 변하지 않는, 독립적인, 궁극의 실체(실재)를 전제하고 철학적 사유를 전개하였다. 인도의 주류철학인 베다철학과 <우파니샤드> 철학도 이와 다르지 않다. 영원한 정신인 브라흐만(Brahman)과 불변의 주체인 아트만(atman)의 일치를 소망한다. 범아일여(梵我一如)가 바로 그것이다.
이와는 대별되는 것이 ‘생성의 철학’이다. 생성의 철학은 변화와 생성을 긍정하고, 세상을 그러한 변화와 생성의 파노라마로 해석한다. 이러한 철학적 입장은 없음[無]을 긍정한다. 생성은 타자(他者)와 없음[無]의 영역을 확보해야지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지중해의 고대철학에서 이를 대변하는 철학자는 만물유전(萬物流轉)을 주장한 헤라클레이토스였다. 그러나 이러한 생성의 철학이 서양철학계에서 주류를 차지한 적은 없었다. 서양의 근대철학에 와서야 베르그송이나 니체에게 새롭게 조명되었을 뿐이다. (아, 들뢰즈가 있구나.)
불교는 인도철학의 관점에서 보면 비주류이고 소수자의 입장이다. 인도의 전통철학은 불변의 자아인 ‘아트만(atmam)’를 강조한다. 그러나 불교는 연기론적인 무아(無我, anatman)‘를 강조하며 이를 부정한다. 무상(無常)과 무아(無我)는 불교를 특징짓는 대표적인 용어이다. 원인과 결과, 존재형성의 일시적 관계를 주장하는 불교의 연기론(緣起論)은 모든 영원한 존재와 관념을 부정한다. 존재를 구성하는 관계가 영원하지 않다면 존재 자체의 영원성은 확보될 수 없다. 하물며 존재가 구성한 인식이야 말해 무엇하랴.
위의 인용된 문장을 살펴보면 없을 무(無) 자가 6개가 보일 것이다. 구문으로 정확히 계산하면 4개의 없음을 확인할 수 있다. 오온(五蘊)이 없고, 육근(六根)이 없으며, 육식(六識)이 없으며, 육경(六境)이 없다. 오온은 이미 설명한 바 있으니 넘어가고, 육근이니 육식이니 육경은 불교의 18계(界)를 일컫는다. 육근(六根, 주체)에 해당하는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가 있고, 육식(六識, 의식의 장들)에 해당하는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이 있으며, 육경(六境, 대상)에 해당하는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이 있다.
<반야심경>은 이 모든 의식의 구성장치가 영원하지 않다는 측면에서 없음[無]를 선포한다. 그러므로 공(空)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주체와 객체, 그 사이에서 형성되는 모든 의식은 없다. 18계가 모두 사라진다. 주체의 6계, 객체의 6계, 인식활동의 장 6계가 공하다.
불교는 변화와 생성만이 존재를 설명할 수 있다는 공(空)의 관점을 택한다. 따라서 인식의 주체도, 인식의 대상도, 그 관계에서 형성되는 인식도 일시적이고 가합(假合)적일 뿐 영원성을 확보할 수 없다. 영원성이 없다는 것은, 절대적 존재인 일자(一者)의 부정이다. 이러한 입장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류의 주류가 따라왔던 길을 미궁에 빠트린다. 신 없이 구원이 가능할까? 절대적 기준 없이 삶이 가능할까? 믿음은 고사하고 신념이나 이념 등의 형성은 무엇을 근거로 해야 할까?
불교의 개념은 구축의 개념이 아니라 해체의 개념이다. 세상이 설명하기 위해 자신이 구성해 놓은 핵심개념들도 보존하지 않고 부정한다. 쌓지 않고 무너뜨린다. 우리는 그 없음의, 그 폐허의 현장에서 다시 출발해야 한다. 세상 모든 것은 공(空)하다. 그대의 인식도구는 쓸모 없다[無]. 이제 그대는 무엇을 할 것인가? 여기서 로도스다. 뛰어넘으라!
07화 반야심경 명상 6 : 소득 없는 지혜 (brunch.co.kr)
by김경윤Jun 25. 2021
무명도 무명이 다함까지도 없으며,
無無明 亦無無明盡
늙고 죽음도 늙고 죽음이 다함까지도 없고,
乃至無老死 亦無老死盡
고 집 멸 도도 없으며, 지혜도 얻음도 없느니라. 아무런 소득이 없기 때문이다.
無苦集滅道 無智亦無得 以無所得故
08화 반야심경 명상 7 :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자유 (brunch.co.kr)
by김경윤Jul 02. 2021
보살은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므로
菩提薩陀依般若波羅密多
마음에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어서,
故心無佳碍 無佳碍故 無有恐怖
뒤바뀐 헛된 생각을 멀리 떠나 완전한 열반에 들어가며,
遠離顚倒 夢想 究竟涅槃
삼세의 모든 부처님도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므로
三世諸佛依般若波羅密多
최상의 깨달음을 얻느니라.
故得阿辱多羅三邈三菩提
09화 반야심경 명상 8 : 아제아제 바라아제 (brunch.co.kr)
by김경윤Jul 03. 2021
그러므로 알지니라. 반야바라밀다는
故知 般若波羅密多
가장 신비하고 밝은 주문이며 위없는 주문이며
是大神呪 是大明呪 是無上呪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주문이니,
是無等等呪
온갖 괴로움을 없애고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음을.
能除一切苦 眞實不虛
이제 반야바라밀다주를 말하리라.
故說般若波羅密多呪 卽說呪曰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보리 사바하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보리 사바하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보리 사바하
내가 불교에 입문하게 된 것은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읽고나서라고 말할 수 있다. 태어나면서부터 기독교인으로 성장하였기에 불교에 대한 막연한 이질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법정스님의 글을 읽고나서는 불교에 관심이 생겼다. 그러다가 불교에 흠뻑 빠지게 된 계기가 생겼는데, 그게 숭산스님이 법문과 편지글의 모음집인 <부처님께 재를 떨면(Dropping Ashes On the Buddha)>이라는 책을 읽고나서부터이다. 여시아문이라는 출판사에서 번역본이 나왔다는 데 구하지 못하고, 영문판을 어렵사리 구해서 한 편 한 편 읽으며 얼마나 즐거웠는지 모른다. (나중에 물병자리 출판사에서 <부처가 부처를 묻다>라는 제목으로 다시 출간되었지만 현재 품절상태다.)
어쩌면 우리나라 선불교의 최고봉에 해당하는 숭산스님 덕분에 나는 내심 불교를 깊이 사랑하게 되었는지 모른다. 스티븐 미쳴이 편집한 이 책은 숭산스님의 100가지 짧은 법문을 에피소드처럼 나열한 책이다. 한 편 한 편 주옥같지만 그 중에서 이번에는 37번째 이야기인 '부처는 짚신이다'이다.
어느날 숭산스님은 모임을 마치고 제자들과 뉴욕에 있는 커피숍에 가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제자 중에 한 명이 불경의 주문을 외우는 게 힘들다고 말하면서, 도대체 뜻도 모르고 외는 주문이 무슨 소용이냐고 불만을 토로했다. 그러면서 살짝은 비아냥조로 그럴 바에는 발음하기도 편한 '코카콜라'를 외우는 건 어떠냐고 숭산스님에게 말한다.
숭산스님은 주문(만트라)를 외우는 일은 세 가지 차원에서 중요한데, 첫째는 주문을 외우는 이유, 둘째는 주문이 작동하리라는 강력한 믿음, 셋째는 지속적인 실천이라 말하면서, 만약에 어떤 사람이 코카콜라라는 말 속에 강력한 힘이 있다고 진정으로 믿으면서, 매일 외운다면 반드시 효과를 볼 것이라고 대답한다. (그 뒤에 그와 같은 사례로 석두(돌대가리)스님의 '부처는 짚신이다'와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지만 여기서는 생략한다.)
요체는 이것이다. 아무리 의미를 모르는 말일지라도 그것이 효험이 있다고 강력하게 믿으면서 매일 외우면 반드시 효과를 본다는 것. (불교주문의 플라시보 효과라고 해야하나? ) 처음에는 픽 웃고 말았지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많은 생각이 들게 하는 말씀이다. 마술사들은 마술을 시전하기 전에 "수리수리 마하수리~"를 외친다. 해석하면 "수의 이치여, 수의 이치여, 위대한 수의 이치여!"가 될터이지만, 그 뜻을 아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간절함이 핵심이다.
애니메이션 <라이온 킹>에서는 "하쿠나 마타타(Hakuna matata)"라는 주문이 나온다. (https://youtu.be/EgqQSuwYpA0) 스와힐리어인데, 영역하면 "It doesn't matter"가 되고, 의역하면, "괜찮아, 다 잘 되거야"라는 뜻이다. 이런 뜻을 몰라도 '하쿠나 마타타'하고 주문을 외면 뭔가 일이 잘 풀릴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그래서 나는 가끔 기분이 울적할 때 이 주문을 외운다. 마치 영어노래 "돈 워리 비 해피"를 들으면 괜히 기분이 좋아지는 것처럼 말이다. (https://youtu.be/d-diB65scQU)
그러니 <반야심경>을 끝내면서 "가장 신비하고 밝고 최고의" 주문을 외워보자.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기에 온갖 괴로움을 없애는" 반야바라밀다 주문이다.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보리 사바하(揭諦 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 연속으로 세 번을 외워야 한다. 간절히 믿으면서!
본토(인도) 발음으로는 "가떼 가떼 빠라가떼 빠라상까떼 보드히 스바하(gate gate paragate parasamgate bodhi svaha)라고 발음한다, ‘스바하’는 인도인들의 인사말로 흔히 쓰는 용어이다. ‘행복하소서!’. ‘만세!’ ‘평안하소서!’ 등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혹시 뜻이 알고 싶은 사람을 위하여 마지막으로 그 뜻을 밝혀둔다. "가자, 가자, 저 언덕으로. 온전한 언덕으로. 깨달음이여, 참 좋구나"
10화 부록 : 독서노트 <반야심경> 인문학 (brunch.co.kr)
야마나 테츠시(山名哲史), 《반야심경》(불광출판사, 2020)
by김경윤May 17. 2020
<반야심경 명상>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연재하던 중 이전에 서평으로 썼던 독서노트가 떠올랐습니다. 참고 하시라고 명상 연재에 부록편으로 다시 올립니다.
여기에 물이 든 컵이 있고, 컵 겉면에 ‘독약’이라고 쓰여 있다고 합시다. 자, 당신은 이 컵 안의 물을 마실 수 있습니까. 마실 수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말할 것도 없이 마시면 죽는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신다’라고 하는 행위가 ‘죽는다’라고 하는 결과를 불러온다는 인과 관계를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물을 마실 수 없습니다. 하지만 몰랐다면 아무렇지 않게 마셨을 겁니다. ‘알고 있기’ 때문에 당신은 마시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안다’라는 것은 이처럼 인간의 행동을 지배하는 힘이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깨닫다’라는 말을 씁니다. 이 ‘깨닫다’라는 말은 본질적으로 ‘안다’와 다르지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것을 오류 없이 바로 아는 것을 ‘깨달았다’라고 합니다.
깨달음과 반대의 상태를 ‘무명(無明)’이라고 합니다. ‘무명’이라고 하면 뭔가 무서운 느낌이 들지만 실은 그것은 ‘무지(無知)’, ‘모른다’라는 뜻에 지나지 않습니다. 곧 ‘알지 못하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불교는 ‘모르는’ 상태에서 ‘아는’, ‘깨달은’ 상태로 옮겨가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무명에서 깨달음으로 옮겨간다고 하면 뭔가 어려워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하지만 이것을 우리가 쓰는 나날의 말로 바꾸어 말하면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아는’ 상태로 바뀌는 것을 말합니다. 어렵지 않습니다. 그렇게 ‘앎’을 통해 나의 행동 방식, 곧 내 삶의 방식을 바꿔 가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20~21쪽)
내가 다니는 교회는 감리교단에서 파문당한 홍정수 목사님이 설립한 동녘교회다. 감리교단에서 홍정수 목사님을 파문할 수는 있었지만, 그가 설립한 동녘교회를 없앨 수는 없었다. 동녘교회는 30년이 넘는 세월을 버텨온 작은 교회다. 홍정수 목사님은 현재 미국에 사시면서 일 년에 한 번은 귀국하여 교회를 방문하신다. 1년마다 듣는 설교는 참으로 놀랍다. 많은 설교문들이 기억나지만, 이번에 말하고 싶은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자신들만의 언어로 종교생활을 한다. 은총이니 구원이니 회개니 천국이니. 하지만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그러한 언어는 관심도 없다. 자, 그렇다면 기독교의 용어를 하나도 사용하지 않으면서, 기독교를 일상어(user friendly language)로 설명할 수 있는가? 그것이 가능할 때, 21세기에도 기독교는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비단 기독교만의 문제일까? 수많은 종교인들이 자신만의 ‘방언’으로 종교적 교리를 이야기한다. 기독교인에게는 기독교인들만이 소통되는 방언이 있고, 불교인들도 불교인들만이 소통하는 방언이 있다. 사성제니 팔정도니 번뇌니 해탈이니 용어를 이해하는 데 시간을 다 보낸다. 불교경전을 21세기에 사는 현대인들이 이해하게 설명할 수는 없을까? 그러한 갈증으로 쓴 책이 야마나 테츠시(山名哲史)가 쓴 《반야심경》(불광출판사, 2020)이다. 같은 갈증을 가지고 있었던 최성현이 번역하였다. 부제로 ‘인문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을 붙였다. 일본에서 30년간 큰 사랑을 받았다하니 허명은 아닐 것이다. 저자는 단도직입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반야심경은, 아니 불교 전체는 행복에 대한 방법이라고.
붓다의 중심 테마는 ‘행복’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 다시 말해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의식으로 일관했습니다. 그가 찾았던 것은 행복의 노하우였지 철학도, 학문도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행복해지지 않는다면 불교는 무의미한 것입니다. 붓다의 가르침은 이론적으로는 여러 가지 어려운 면이 있지만, 실천적인 문제의식에서 보았을 때는 괴로움으로부터의 탈출 방법에 지나지 않습니다. (54쪽)
지은이인 야마나 테츠시는 스님이 아니라, 프랑스철학을 소개하는 재야 철학자이다. 그는 불교를 독학으로 공부하였고, 일반인의 언어로 반야심경을 설명하였다. 읽어보니 술술 읽힌다. 하지만 읽히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지은이의 말마따나 중요한 것은 ‘아는’ 것이고 아는 것은 ‘내 삶의 방식을 바꿔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르기 때문에 안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알고도 행동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 격차를 줄이기 위해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수행하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 그러니까 책은 지도에 불과하고, 그 지도에 나와있는 길을 가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의 몫이다. 우리는 우리가 읽을 수 있는 불교지도를 하나 얻었을 뿐이다. 이것이 보물이 되는지, 휴지가 되는지는 우리에게 달렸다.
<추신> 나 역시 기독교의 평신도로 내가 이해하는 기독교를 ‘인문학의 언어’로 쓴 바 있다. 《제 정신으로 읽는 예수》(삶창, 2016)이다. 기독교와 불교를 비교해서 읽어보는 것도 재미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