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삶글 22
내가 좋아하는 책과 내가 좋아하는 쉼터가 있다. 내가 좋아하는 책은 『사진판 윤동주 자필 시고 전집』이다. 그 다음으로 좋아하는 책은 김도수 시인의 『섬진강 푸른 물에 징·검·다·리』와『섬진강 진뫼밭에 사랑비』이다. 오늘 오후에 김도수 시인께서 전화를 주셨다. 목소리만 들어도 좋은 사람이 있다. 진뫼에 다녀오셔서 책을 보내시겠다고 하셨다. 알면 알수록 더 좋아지는 사람이 있다. 알면 알수록 더 향기로운 사람이 있다. 알면 알수록 더 아름다운 사람이 있다. 나는 언제나 존경하는 김도수 시인이 참 좋다.
내가 아는 시인들 중에 가슴이 가장 따뜻한 시인은 진뫼마을이 고향인 김도수 시인이고, 내가 아는 시인들 중에 삶이 가장 아름다운 시인은 노고단처럼 살아가는 김인호 시인이다. 김도수 시인의 전화를 받고 김도수 시인의 얼굴과 마음이 보고싶어서 다시 유튜브를 본다. <설날 특집 나의 살던 고향을> 유튜브로 보면서, 김도수 시인께서 어머니를 생각하며 우는 장면에서 나도 어머니를 생각하며 함께 운다. 나는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
김도수 시인과 김인호 시인의 삶을 생각하며, 참 많은 것을 배우고 따르려고 노력한다. 세상에는 아직도 참으로 따뜻하고 아름다운 시인들이 많다.
전에 썼던 김도수 시인 관련 글들을 다시 읽으며 김도수 시인의 고향집과 나의 고향집을 생각한다. 김도수 시인의 고향집처럼 나의 고향집도 좀 더 의미 있는 쉼터로 만들 방안을 깊이 생각한다.
설 특집 다큐멘터리 - 나의 살던 고향은 ■ 스무 가구 남짓한 작은 마을의 전라북도 임실군 진뫼마을. 이 마을 태생의 사람들이 고향을 잊지 못해 자신이 나고 자란 집으로 돌아왔다. 이들에게 고향의 의미란 무엇이고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는 것일까. 다시 돌아온 사람들이 말하는 고향 진뫼마을의 이야기를 담았다.
몸과 마음이 통째로 고향인 사람 (brunch.co.kr)
https://brunch.co.kr/@yeardo/1193
알면 알수록 더 좋아지는 사람이 있다
알면 알수록 더 향기로운 사람이 있다
알면 알수록 더 아름다운 사람이 있다
나는 언제나 사랑스런 당신이 참 좋다
준비 중인 《이어도공화국 7 - 너에게 나를 보낸다》는 김도수 시인의 책들이 조금은 영향을 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내가 만드는 이어도공화국은 우리들이 생각하는 기존의 고향과는 많은 차이가 있을 것이다. 이 세상에 있는 고향이 아니라 새롭게 만들어지는 미래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으로는 시와 산문이 어우러지는 책이 되지 않을까 생각 중이다. 시도 아니고 산문도 아닌 책, 시이면서 산문인 책, 시적인 것과 산문적인 것들이 조화롭게 이루어질 수 있는 책이 될 것이다. 주로 나의 꿈과 나의 삶을 자유롭게 쓰는 글이기 때문에 나는 나의 이번 글을 <꿈삶글>이라고 스스로 명명하였다. 그러니 독자 여러분들께서도 다양한 각도에서 자유롭게 읽고 자유롭게 상상하면 좋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의 첫 번째 산문집《섬진강 푸른 물에 징·검·다·리》를 먼저 읽는다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 알면 알수록 더 좋아지는 사람들이 있다. 그중에 김도수 형님이 있다. 몸과 마음이 통째로 고향인 사람이 있다. 그 형님께서 자신의 책을 보내주셨다. 예전에 진뫼마을 형님댁에서 함께 잠을 자고 함께 남도기행을 했던 독서회 사람들과 함께 돌려가며 읽어보라고 보내주셨다. 이것도 다 인연인 듯하다. 그래서 나는 그의 첫 번째 산문집 <섬진강 푸른 물에 징검다리>를 먼저 읽는다. 이 책이 발행되기 전부터 나는 그의 찰지고 구수한 글들을 인터넷에서 많이 읽었다. 아마도 전라도닷컴 사장님 가슴도 나의 가슴처럼 따뜻하게 데워준 것 같았다. 전라도닷컴 사장님을 직접 만나보지는 못했지만 김도수 형님 말씀에 의하면 참 좋은 사람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세상은 이렇게 다 인연과 인연으로 이루어지는 것일 것이다.
산문집 《섬진강 푸른 물에 징·검·다·리》(전라도닷컴)는 2004년 7월 19일 1쇄를 찍었고, 2007년 1월 1일 2쇄를 찍었다. 광주에 있는 작은 지방 출판사에서 출간한 책이 이렇게 인기를 얻은 것은 그렇게 흔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의 고향을 향한 징글징글한 사랑의 기록이 세상 사람들의 가슴을 따뜻하게 해 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이 책에 대하여 썼고 또한 이 책을 통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져서 여러 방송에도 출연하고 유명해졌기 때문에 내가 따로 쓰지 않아도 충분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어쭙잖은 글을 쓰는 것은 나 자신을 돌아보기 위함일 것이다.
한때 농사를 짓고 살겠다는 겁도 없는 꿈을 꾸고 있었다는 박남준 시인, 대학을 졸업하고 돈 한 푼 없던 박남준 시인에게, 교편을 잡고 있던 후배가 13만 원을 빌려주어, 그 돈으로 임실의 진뫼마을 빈집 한 채를 사서 일 년을 살았다는 박남준 시인, 그 인연으로 이 책의 추천글을 쓴 박남준 시인은 김도수 시인의 고향 사랑을 두고 <강가의 작은 마을을 지키는 징글징글한 사랑의 이야기가 여기 있네. 여기 불이 꺼진 마을에 다시 들어와 따뜻한 불을 밝힌 사람이 있네>라고 말한다. 김도수 시인은 1959년 생이고 박남준 시인은 1957년 생이다.
《섬진강 푸른 물에 징·검·다·리》에 수록된 글과 사진들은 박남준 시인의 말처럼 징글징글한 사랑이 아닌 것이 하나도 없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나의 시선을 더욱 오래도록 붙잡아 두는 글과 사진들이 있다. 김도수 시인의 고향 임실의 진뫼마을과 나의 고향 곡성의 연어의 종착역은 참 많이도 닮아 있어서 많은 이야기들이 나의 이야기처럼 다가온다. 그중에서 나는 <추억의 등굣길>이 가장 좋다. 나에게 가장 많은 생각을 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또한 나로 하여금 가장 많은 반성을 하도록 깨우쳐주고 있다. 이 이야기는 추석 연휴 첫날, 초등학교 다니는 딸과 아들에게 김도수 시인이 다녔던 초등학교 등굣길을 체험하게 하는 이야기이다. 딸 가애와 아들 민성이가 책보 둘러메고 아버지의 어린 시절 등굣길을 체험하는 이 이야기는 나 자신에게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한다. 덕치초등학교로 가던 강변 등굣길을 다시 한번 생각한다. 김도수 시인이 다녔던 길과 그의 딸과 아들이 손 꼭 잡고 아버지가 걸었던 길을 따라서 걸어가는 모습이 내 눈에는 참으로 아름답게 그려진다. 그리고 그런 딸과 아들 뒤를 따라서 점심 도시락을 싸서 따라가는 김도수 시인과 그의 아내 박은자 형수님도 보인다. 그리고 농사일을 하다가 뒤늦게 운동회가 열리는 학교로 달려가는 김도수 시인의 어머니 월곡떡도 보인다. 그리고 운동장 앞쪽 모서리에 서 있는 쌍벚나무 아래서 점심을 먹는 김도수 시인과 그의 형과 그의 어머니가 함께 점심을 먹는 모습도 보인다. 또한 김도수 시인과 그의 아내 박은자 형수님과 그의 딸 가애와 그의 아들 민성이가 함께 모여서 점심을 먹는 모습도 보인다.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이다. 그런데 나는 지금껏 어떻게 살아왔는가?
그리고 나는 < 75년 여름 진뫼마을 톱뉴스>에서는 나의 아버지를 보았고 <어머니 사랑비는 언제나 세울까>에서는 나의 어머니 메산이 댁을 보았고 <진달래 먹고 놀던 내 친구 현철이>에서는 나의 모습을 보았다. 언젠가는 나의 아버지 이야기와 나의 어머니 이야기와 현철이처럼 살았던 나의 이야기는 새롭게 다시 쓰일 날이 있으리라. 그리고 <어서 고치집 좀 짓거라>에서는 누에 치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런데 나의 기억과 좀 달라서 확인이 필요할 것 같다. 내 기억에는 일 년에 한 번 누에치기를 하였다. 뽕나무가 일 년에 한 번 자리서 나는 일 년에 한 번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봄과 가을 이렇게 두 번 하는 것으로 나와 있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봄 누에와 가을누에가 있다고 나온다. 우리 집에서도 누에치기를 많이 하였는데 어머니께서 약 한 달가량 고생을 참 많이 하셨다. 밭에 있는 뽕이 부족해서 산에 들어가 꾸지뽕을 따다가 먹인 기억이 선명하다.
처음에 내가 김도수 시인의 산문들을 인터넷에서 읽었을 때에는, 내가 이미 그 10여 년 전에 발표한 <우리들의 고향> 연작시들을 산문으로 풀어놓았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 다시 읽어보니 나의 시들보다 훨씬 더 좋은 산문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 편 한 편의 산문들이 모두가 훌륭한 시이며 아름다운 소설이며 완벽한 희곡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나는 김도수 시인이 풀어놓은 입말들이 참 구성지고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김도수 시인의 삶은 그의 글들보다 더욱 진솔하고 정이 많아서 좋다. 김도수 시인이 여는 글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그는 늘 말과 글과 행동이 같은 사람이다.
"말과 글과 행동이 일치되도록 사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말과 글과 행동이 따로따로 논다면 독자들을 기만하는 행위가 되기 때문에 무슨 일이든 거짓 없이 진솔하게 쓰려했고, 또 내가 쓴 글처럼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라고 말한다, 내가 쓰고 있는 <꿈삶글> 연작의 정신이며 계승이 아닐 수 없다.
나는 한 때 김도수 시인을 비롯하여 김인호 시인과 박남준 시인과 이원규 시인이 함께 사는 지리산 가까운 곳으로 가서 살려고 하였다. 내 고향 곡성으로 돌아가 살려고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고향에 있는 반월산을 사려고 노력한 적이 있었다. 가까운 여수에도 좋은 시인들이 많이 있어서 꼭 가까이 가서 함께 살고 싶었다. 고향집이 너무 좁아서 곁에 있는 집터도 더 사려고 구체적으로 알아보고 있었다. 폐가로 남아있던 고향집도 다시 청소를 하고 수리를 하려고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다. 하지만 나의 너무나 좀스럽고 편협하고 비뚤어진 마음이 그 길을 스스로 막아버리고 말았다. 지금 다시 찬찬히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닌 일인데 그때는 너무나 속이 많이 상해서 나의 계획을 스스로 접어버리고 말았다.
고향에는 그 당시 두 명의 친구가 결혼도 않고 총각으로 살고 있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들에게 참 많이 미안해서 내가 점심을 사고 싶었다. 그래서 미리 연락을 하고 식당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두 명의 친구들이 올 줄 알았는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우르르 몰려왔다. 친구들과 같이 친하게 지내고 있다는 선배 들와 후배들이라고 말했다.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하지만 나는 예상을 못해서 잠시 당황은 했지만 그래도 오히려 더 좋았다. 앞으로 얼굴 보고 지내야 할 사람들이기 때문에 친해질 수 있어서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즐거운 마음으로 점식 식사를 함께 했고 즐거운 마음으로 헤어졌다. 그리고 나는 고향집으로 돌아와 집을 대강 치우고 공향집에서 잠을 자려고 했다. 불편하지만 그래도 고향집에서 일찍 자려고 하였다. 하지만 오랜만에 와서 생각도 많아지고 불편해서 잠이 잘 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친구에게 전화를 하였다. 점심때 함께 밥을 먹었던 사람들이 나만 빼고 다 함께 술을 먹고 있다고 하였다. 오랜만에 찾아간 집이어서 필요한 것들이 많았다. 그래서 간단한 부탁을 하였는데 거절을 당했다. 뭐, 그동안 연락도 하지 않다가 불쑥 찾아가서 부탁을 하니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내가 앞으로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전화를 끊었다. 아니, 끊으려고 하였다. 친구는 내가 먼저 전화를 끊은 것으로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친구는 아마도 전화기 종료 버튼을 누르지 않은 상태에서 술상에 전화기를 내려놓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나는 전화를 끊으려고 하는데 친구의 전화기가 너무나 생생하게 그 술집 풍경을 생중계하기 시작했다. 점심때, 나를 일부러 바가지를 씌워 골탕 먹이려고 많은 사람들을 불러왔다는 이야기부터 시작하여 나의 가장 아픈 부분이었던 나의 어머니 이야기와 나의 아버지 이야기들까지 1시간이 넘도록 나와 나의 가족들은 그들의 술안주가 되고 있었다. 나는 차마 중간에 전화를 끊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나의 귀향의 꿈은 그렇게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지금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지만 그 당시에는 아직 나의 깊은 상처가 아물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나에게는 치유할 수 없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옹졸했던 나에게는 너무나 큰 상처였고 너무나 큰 절망이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친구들 곁으로는 다시 가고 싶지 않았다. 이제 와서 다시 생각하면, 술을 먹다 보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오랜만에 찾아온 친구는 충분히 좋은 술안주가 되기도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아마도 그날이 그랬을 것이다. 오랜만에 찾아온 친구는 그날 가장 적당한 술안주였을 것이기에 지금은 나도 그러려니 생각하고 있는 중이다.
나는 김도수 시인이 태어났다는 작은 방, 월곡산방에서 잠을 잔 적이 있다. 그리고 김도수 시인이랑 김인호 시인과 함께 요강바위에 직접 들어가 보고 그 주위에서 목욕을 함께 한 추억이 있다. 또한 징검다리 건너 밭에서 먹감을 함께 딴 추억이 있다. 또한 제주도에서 독서회 회원들과 함께 남도 기행을 갔을 때 김도수 시인께서 직접 운전을 해주시고 진뫼마을 고향집에서 따뜻한 밥을 얻어먹은 추억이 있다. 김도수 시인과 박은자 형수님께서 제주도에 오셨을 때 함께 재미있게 지냈던 기억도 있다. 그리고 또 여수에서 열렸던 전국문학인대회에서 다시 만났던 기억도 있다. 김도수 시인은 만나면 만날수록 더욱 좋아지는 시인이다.
『섬진강 진뫼밭에 사랑비』 에서 나는 <어머니의 비자금 만들기>를 가장 재미있게 읽었다. 그리고 <용수네 어매, 존말로 헐 때 나와>에서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나중에 내게 고백한 이야기지만 그날 저녁 어머니는 강물에 뛰어들어 죽어버리려 했단다. '아이고, 당신도 어린 자식들 데리고 영금 한번 보며 남은 인생 살아 보시오' 하는 심정이었단다." 김도수 시인의 어머니와 나의 어머니는 너무나 많이 닮으셨다. 그리고 김도수 시인의 아버지와 나의 아버지 또한 너무나 많이 닮으셨다. 그런데 나는 김도수 시인이 너무나 부러웠다. 김도수 시인은 그래도 논이 열 마지기나 되는 부자였고 이장일을 오래도록 할 만큼 건강한 아버지가 계셨다. 투망질을 잘하시는 것은 나의 아버지도 같았지만 나의 아버지는 늘 구들장을 짊어지고 살아야만 했던 환자이셨기 때문이다. 김도수 시인 집에는 머슴도 있는 부자였지만 우리 집은 시골에 살면서도 땅 한 평 없는 지지리도 가난했던, 가난한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가난했던 집이었기 때문에 나는 늘 논이 있는 친구들이 가장 부러웠다. 우리 집은 언제나 김도수 시인의 글에 나오는 외딴집 현철이 이거나, 남의 집 아래채에 살다가 3학년인가 4학년 때 학교를 그만두었다는 그 여자친구 집에 가까웠었다. <하필 보리쌀 갈 때 너그 선생님이 와서...>에 나오는 정수형님네 뒷집에 살았다는 그 여자친구가 자꾸만 나의 어린 시절과 겹쳐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내가 아는 시인들 중에
가슴이 가장 따뜻한 시인은
진뫼마을이 고향인 김도수 시인이고
내가 아는 시인들 중에
삶이 가장 아름다운 시인은
노고단처럼 살아가는 김인호 시인이다
설날을 맞이하여
설날 특집 나의 살던 고향을
유튜브로 보면서
김도수 시인께서
어머니를 생각하며 우는 장면에서
나도 어머니를 생각하며 함께 울었다
나는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
김도수 시인과 김인호 시인의 삶을 생각하며
참 많은 것을 배우고 따르려고 노력한다
세상에는 아직도
참으로 따뜻하고 아름다운 시인들이 많다
김도수 명예이장님께서 추천해 주신 섬진강 문학기행 2박 3일 코스
진뫼마을에서 하동포구까지 섬진강 강줄기를 따라가는
1. 일정표
■ 첫째 날(10/16, 토요일)
▷ 제주 출발(08:40분) → 광주공항 도착(09:25) →광주공항 출발(09:40) →진뫼마을 도착(11:20)
■ 둘째 날(10/17, 일요일)
▷ 진뫼마을 출발(09:00) → 천담, 구담마을(영화 ‘아름다운 시절’ 촬영지)→ 장구목(요강바위) → 남원 대강 → 곡성읍 → 구례구역 → 구례 운조루 → 하동 화개장터(쌍계사, 점심식사) → 악양 평사리(박경리 소설 ‘토지’ 무대) → 광양 청매실 농원 → 순천만 갈대숲(김승옥 소설 ‘무진기행’ 무대) →저녁 식사 및 숙소 이동
■ 셋째 날(10/18, 월요일)
▷ 벌교(소설 ‘태백산맥’ 무대) →낙안읍성 → 선암사(소설가 조정래 씨 태어난 절 : 영화 ‘아제아제 바라아제’ 촬영지 → 화순 → 광주호 소쇄원 → 식영정 → 광주 공항(18:100 → 제주도 귀가
2. 답사 세부내용
○ 진뫼마을(1박)
- <섬진강 푸른 물에 징검다리> 저자와의 대화
고향, 당신에게는 무엇입니까?
○ 섬진강을 따라 걷는 오지 길(영화 아름다운 시절 촬영지)
-천담, 구담마을(정자나무에서 바라본 가을 섬진강), 장구목(요강바위)
○ 화개장터(점심식사)
-쌍계사
○ 토지 문학관(박경리 소설 ‘토지’ 무대)
-하동 악양 평사리
○ 광양 청매실 농원(홍쌍리, 신 지식인 전남 1호)
○ 순천만 갈대숲(순천 2박)
○ 선암사, 벌교 ‘태백산맥’ 무대
○광주 소쇄원, 식영정(제주도 귀가)
※ 여행지 답사는 가능한 준수 하되 사정에 따라 조정될 수 있음
3. 참조사항(여행지 입장료)
-운조루 : 2000/인
_쌍계사 : 3500/인(주차료 별도)
-낙안읍성 :1500/인(주차료 별도)
-선암사 :1500/인(주차료 별도)
* 답사 여행지 자료 준비(인터넷)
1. 구례 운조루
2. 화개장터, 쌍계사
3. 악양 평사리(토지 문학관)
4. 청매실 농원(홍쌍리)
5 순천만 갈대숲
6. 벌교 태백산맥
7. 낙안읍성
8. 선암사
9. 소쇄원
10. 식영정
11. 섬진강(김용택)
12. 김도수
http://www.jeonlado.com/v2/ch01.html?&number=2870
http://www.jeonlado.com/v2/ch03.html?number=7129
13. 요강바위와 구담마을
http://www.jeonlado.com/v2/ch02.html?&number=1453
http://www.ohmynews.com/articleview/article_view.asp?no=26849&rel_no=13
*광주 공항에서 진뫼마을 오는 길
1안) 광주공항→ 광주 시내 경유 → 남해고속도로(서광주, 동광주 IC) → 88 고속도로(담양, 대구 방향) → 순창 IC(광주에서 약 40~50분 소요) → 임실, 전주방향 진입→ 순창읍에서 약 15분 정도 달리면 ‘회문산 자연 휴양림’ 간판 나옴 → 휴양림 사거리에서 우회전(진뫼마을 표석 있음) → 5분 달리면 진뫼마을
2안) 광주공항 → 남해고속도로(서광주나 동광주 IC에서 진입) → 순천 방향 → 옥과 IC →순창 → 임실, 전주방향 진입→ 순창읍에서 약 15분 정도 달리면 ‘회문산 자연 휴양림’ 간판 나옴 → 휴양림 사거리에서 우회전(진뫼마을 표석 있음) → 5분 달리면 진뫼마을
※ 두 방향 모두 거리는 비슷함. 혹 국도를 타도 되는데 광주-담양-순창-이하 동일.
동그라미 / 04.11.06 15:54
일상적인 생활에서 벗어나고픈 마음에 이번 여행에 적극 참여키로 했다. 2박 3일 동안 집을 떠나는 여행에 시원찮게 대답해 주는 남편을 뒤로하고, 제주에서 비행기를 탔다.
광주공항에 도착해 보니 김도수 선생님이 사모님과 함께 마중 나와 있었다. 간단한 인사를 마치고 진뫼 마을로 향했다. 진뫼 마을 입구에 도착하면서부터는 '섬진강 푸른 물에 징검다리'라는 책에서 보았던 벼락바위, 정자나무, 까마귀바위, 징검다리, 허락바위 등을 상상하며 찾아봤다.
김 선생님의 별장에 도착해 보니 그야말로 농촌풍경이다. 사람이 살지 않음으로 해서 쌓인 먼지를 닦아 내고, 점심준비로 북적대다가 앞산을 바라보니 내 눈길을 끄는 게 있다. 산비탈을 오르고 있는 감나무들. 가을산의 감빛은 내 눈을 유혹한다. 그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바쁘게 점심 준비하던 손을 놓고 따라나선다. 개울 건너 도착해 보니 손에 잡힐 듯하던 감은 나무 위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나 보란 듯이 내려보고 있다. 같이 간 일행들과 합작해서 감나무를 흔들어 대니 서 너 개의 감이 떨어진다. 얼른 주워 한 입 깨물어 보니 많이 떫다. 떫은 감은 입에서 단맛도 많이 났다. 떫으면 어쩌랴! 하고 먹었는데 이게 내 목을 통과하지 않으려 한다. 목이 꽉 메어서 숨을 못 쉴 정도였다. 그때 나무를 흔들던 일행이 홍시도 있다면서 땅에 떨어져 박살 난 감을 내민다. 목이 메어 있던 참이라 얼른 홍시를 받아먹고 메여 있던 목을 쓸어내렸다. 그 자리에서 뱉어 버리지 않고 그걸 미련스럽게 삼키고 말았다. 그래서 그런지 여행길 내내 체한 듯이 속이 더부룩했다. 제주에서는 가위를 사용해서 귤을 따는데 감을 따는 것은 쉽지가 않았다. 온몸을 바쳐 딴 감은 열 개 정도는 됐다. 집에서 부지런히 식사준비 하는 이들을 위해서 누구의 감 밭 인지도 모르고 서리해 왔는데 김 선생님과 배 선생님은 그 감은 떫어서 못 먹는단다. 곶감은 만들어서 먹든가 아니면 가만히 두었다가 홍시가 돼서 먹으면 겁나게 맛 난단다.
점심 먹고, 영화 '아름다운 시절'의 촬영장소였던 곳으로 갔다. 섬진강 굽이 길을 배경으로 영화를 만들었다는데 장관이었다.
다음은 장군목으로 옮긴다 여기는 특이한 게 요강바위가 있다. 이 바위는 서울까지 갔었다가 임자를 만나지 못하고 도로 돌아왔다고 한다. 30톤이나 되는 이 바위를 서울까지 옮긴 것이 놀랄 만한 일이다. 여자의 성기를 닮았다고도 하고, 어머니의 자궁을 닮았다고도 하는데, 둥그렇게 우물같이 파여 있는 바위였다. 우리가 갔을 때는 가물어서 물이 고여 있지 않았다. 그 속에 들어갔다가 나오면 아이가 없는 이들에게 신기하게도 아이가 생긴다는 전설이 담겨 있는 바위란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 일행은 한 번씩 들어갔다 나왔다. 내 차례가 되어서 그 바위 안으로 들어가니 편안하고 포근한 느낌이다. 근데 나오는 것은 쉽지 않았다. 밖에서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나오지 못할 것 같다. 혼자 와서는 절대 들어가지 말아야 될 곳인 것 같다.
구미마을 구미리의 남원 양 씨 보물이 있는 곳으로 갔다. 흙집에 창호지로 문을 바르고 살려면 구경하는 우리들은 눈요기이지만 생활하는 이들은 어떨까? 옛날집 그대로 보존하며 살고 있는 이들은 조상을 잘 섬기는 것 같다.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열매들이 탐스럽게 매달려 있는 은행나무들이 참 인상적이었다.
숙소인 김 선생님의 별장으로 돌아와 보니 해가 조금 남아있다. 감 밭으로 가서 감 따기 체험을 원했다. 비탈진 곳이어서 감을 따러 올라가는데 등산을 하는 기분이다. 감을 따는 건 엄두도 못 내고 김 선생님이 감나무를 베어 줬다. 중간중간에 가지치기를 하듯 감나무를 베어 주면 그 가지에 매달린 감을 따냈다. 근데 그 감을 따려면 그곳까지 올라가야 하는데 그것도 힘들었다. 감을 따서 모아두려고 조금만 움직여도 감이 데굴데굴 하고 밑으로 굴러 내린다. 그 경사진 곳을 김 선생님이나 배 선생님은 잘 걸어 다니셨다. 감을 따면서 홍시감도 몇 개 만났다. 서로 돌아가며 두 개씩은 먹은 것 같다. 감 밭에 직접 가서 따 먹는 감은 색다른 경험이었다.
집으로 와서 저녁을 지어먹고, 김 선생님의 '섬진강 푸른 물에 징검다리'라는 책을 읽고 독후감을 준비해 온 이들의 발표가 있고 문학에 대해 논했다.
이 별장에는 두 가지 불편한 게 있었다. 하나는 휴대폰이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주위가 온통 산으로 둘러 쌓여 있어서인지 휴대폰이 안테나가 잡히지 않는다. 겨우겨우 문자 메시지만 집에 있는 남편에게 보내고 휴대폰을 아예 꺼 버렸다. 그리고 또 하나는 화장실이다. 불편하면 리 사무소에 있는 화장실을 쓰라고 해서 그곳을 사용했다. 그곳도 재래식인 건 마찬가지였다.
한밤중에 화장실을 가야 하는데 리 사무소 있는데 까지 가기가 싫어서 별장에 있는 화장실로 가 봤다.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창고였다. 평평한 곳에 두 발을 얹을 수 있는 돌판 두 개 놓고 볼일을 본다. 그런 다음 쌀겨와 대변본 것을 버무린 다음 두엄 위로 올린다. 김 선생님이 올 때 한 말이 생각났다. 시원하게 골프연습도 하게 된다고 했다. 이것들은 농사 지을 때 거름으로 사용된다고 한다. 이곳은 화장실 보다도 냄새가 나지 않았다. 대변 찌꺼기들이 가득 쌓여 있는데도 고약한 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게 신기하다. 두 번째 화장실을 갈 때는 볼일을 보면서 화장실 안을 살펴보니 창고 같은 분위기다. 갈쿠리, 망태등 농사지을 때 사용하는 연장들이 걸려 있다.
다음날 아침을 지어먹고 10시쯤 집을 출발했다. 주말농장식으로 된 이 집을 떠나기 위해서 어제 준비해 온 반찬들이랑 밥솥들을 모두 정리했다. 고추장이며, 채소들까지 모두 챙기고 다닌다고 해서 떠날 준비를 마친다.
심청 축제하는 곳을 지나 곡성군 미니기차를 구경하러 갔다. 마침 기차가 출발할 시간에 도착한 우리는 기차를 타고 섬진강 줄기 따라 청소년 수련관까지 갔다. 그 사이 김 선생님은 렌터카를 타고 기차를 따라왔는데 시속 20KM를 달리는 기차를 따라오며 쉬엄쉬엄 차를 세워서 손을 흔들어 주는데 황홀한 기분이었다.
섬진강의 내력을 미니기차에서 설명해 줬다. 두꺼비 섬에 나루터 진 이란다. 두꺼비가 나루터에서 헤엄을 친다. 은혜 갚은 두꺼비이야기. 도깨비이야기. 소년 마천봉 이야기.
소년 마천봉이 고기를 많이 잡고 싶어서 어살을 놓고 싶은데 방법이 없어 이 궁리 저 궁리하며 돌아다니던 중 눈에 띄는 돌을 발견하고는 그 돌을 집에 가지고 왔다. 그날 밤 도깨비들이 찾아와서 '그 돌은 우리 대장님이니 제발 돌려주세요'라고 부탁한다. 그때 마천봉은 조건을 건다. 어살을 놓아서 고기를 잡고 싶은데 도와 달라고 하니 기꺼이 도깨비들이 도와줘서 고기들이 잘 잡혔다는 전설이다.
경남 하동의 화개장터를 둘러보았는데 그날은 장이 서는 날이 아니어서 장 구경은 하지 못하고 점심때가 되어서 식당에 들러서 옛날 임금님 수라상에 올랐다는 참게탕을 먹었다.
평사리의 최 참판 댁도 들렀다. 아흔아홉 간이나 되는 이 집은 그야말로 대궐 같은 집이었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눈에 보이는 것은 다 최 참판 댁의 전답이었다는데, 땅도 넓었지만 집도 그 못지않게 넓고 멋있었다. 그날은 촬영이 없는 날이어서 주위를 둘러보고 오는 걸로 만족했다.
호남의 명산 조계산에 자리 잡은 한국적인 절의 옛 모습을 가장 잘 보존한 천년의 고찰인 선암사로 향했다. 승선교를 지나 보고 삼인교를 지나 책에서만 본 해우소를 찾았다. 스님들이어서 감출 것이 없는가? 툭 트여 있는 뒷간을 보니 내가 민망했다. 볼일을 보는데 사람이 드나드는 걸 무시할 수는 없을 텐데... 해우소 앞의 소나무도 찾았다. 그리고 이곳은 태고종 본사라고 한다.
순천시 낙안면 동내리에 위치한 낙안읍성 민속마을에 도착했다. 성벽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한 바퀴 돌아왔다.
빡빡한 일정에서도 순천만을 꼭 보여 주고 싶다면서 도착해 보니 너무 시간이 늦었다. 어두워서 차의 헤드라이트로 순천만의 갈대숲을 비춰 보았다. 넓은 순천만을 상상해 보며 갈대의 속삭임도 들어보았다.
이틀간 좋은 곳을 안내해 주던 김 선생님은 월요일에 출근을 해야 하니까 순천에서 작별을 고했다.
삼일째
아홉 시에 만나기로 한 렌터카 기사와의 약속이 있어서 부지런히 아침을 챙겨 먹었다. 정확하게 시간을 맞춘 기사와 인사를 하고 전날, 김 선생님께서 그토록 보여 주고 싶어 하던 순천만을 먼저 가 보자고 했다. 밤에는 바로 코앞만 보이던 갈대밭이 끝이 안 보일 정도로 이어져 있다. 가운데로는 배를 타고 볼 수 있도록 호수로 이어져 있었다. 배를 타 보고 싶었지만 시간이 없는 사정으로 아쉬움을 뒤로했다.
운주사로 향한다. 순천에서 운주사 까지 거리는 2시간. 2시간 동안 차에서 달리는 거리의 풍경을 보는 것도 새삼스럽다. 마당바위를 받치고서 있는 불상들은 이 절이 천불천탑으로 유명하다는 말을 굳이 설명해 주지 않아도 알 만큼 각양각색의 불상들이 보인다. 불상들은 세월의 흐름을 보여 주는 것 같이 비바람에 깎이고 패인 곳들이 많다. 하룻밤 하루사이에 완성인지 미완성인지 모를 와불. 그 와불을 모시고 있는 듯한 형상의 머슴부처. 밑으로 내려오다 보면 북두칠성보양의 바위들을 볼 수 있다. 이곳에서는 일행 중 한 명을 찾지 못해서 애 먹었었다. 휴대폰도 안되고, 빨리 움직여야 하는데 이리저리 찾아다니다 보니까 차에 돌아와 있었다. 일단은 안심이 되면서 다음 행선지로 옮긴다.
성산별곡의 터전인 식영정. 개인소유의 정원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의 규모의 소쇄원. 이 두 정원의 중간에 위치한 가사문학관을 둘러보았다. 학교 다닐 때도 읽지 못해서 버벅거리던 송강 정철의 성산별곡, 사미인곡, 이 외에도 허난설헌의 규원가, 면앙정가, 관서별곡등 이름 모를 작품들이 전시돼 있었다. 어깨너머로라도 조금 배운 게 있었다고 서각으로 돼 있는 그림과 글들도 있어서 다시 한번 더 되돌아보게 했다.
5.18 묘지를 들렸다. 어린아이들의 영정들과 10대. 20대들의 영정들을 보는 순간 목이 메었다. 그네들이 무엇 때문에 영정이 되어서 우리를 눈물 나게 만드는가 하고 아쉬워해 본다.
산방독서회에서 이번 문학기행을 계획하느라고 노심초사 열과 정성을 아끼지 않으신 회장님과 총무님, 배 선생님, 도서관 관계자님께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일상적인 생활에서 벗어나고픈 마음은 있어도 선뜻 나서지 못하던 나에게 좋은 사람들과 여행을 다녀올 수 있는 영광을 줘서 감사합니다.
그의 첫 번째 산문집《섬진강 푸른 물에 징·검·다·리》를 먼저 읽는다
알면 알수록 더 좋아지는 사람이 있고
알면 알수록 더 싫어지는 사람이 있다
나는 그 중에 어떤 사람일까 생각한다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 알면 알수록 더 좋아지는 사람들이 있다. 그 중에 김도수 형님이 있다. 몸과 마음이 통째로 고향인 사람이 있다. 그 형님께서 자신의 책 한 박스를 보내주셨다. 예전에 진뫼마을 형님댁에서 함께 잠을 자고 함께 남도기행을 했던 독서회 사람들과 함께 돌려가며 읽어보라고 보내주셨다. 이것도 다 인연인 듯 하다. 그래서 나는 그의 첫 번째 산문집 <섬진강 푸른 물에 징검다리>를 먼저 읽는다. 이 책이 발행되기 전부터 나는 그의 찰지고 구수한 글들을 인터넷에서 많이 읽었다. 아마도 전라도닷컴 사장님 가슴도 나의 가슴처럼 따뜻하게 데워준 것 같았다. 전라도닷컴 사장님을 직접 만나보지는 못했지만 김도수 형님 말씀에 의하면 참 좋은 사람임에 틀림 없을 것이다. 세상은 이렇게 다 인연과 인연으로 이루어지는 것일 것이다.
산문집 《섬진강 푸른 물에 징·검·다·리》(전라도닷컴)는 2004년 7월 19일 1쇄를 찍었고, 2007년 1월 1일 2쇄를 찍었다. 광주에 있는 작은 지방 출판사에서 출간한 책이 이렇게 인기를 얻은 것은 그렇게 흔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의 고향을 향한 징글징글한 사랑의 기록이 세상 사람들의 가슴을 따뜻하게 해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 동안 많은 사람들이 이 책에 대하여 썼고 또한 이 책을 통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져서 여러 방송에도 출연하고 유명해졌기 때문에 내가 따로 쓰지 않아도 충분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어쭙잖은 글을 쓰는 것은 나 자신을 돌아보기 위함일 것이다.
한때 농사를 짓고 살겠다는 겁도 없는 꿈을 꾸고 있었다는 박남준 시인, 대학을 졸업하고 돈 한푼 없던 박남준 시인에게, 교편을 잡고 있던 후배가 13만 원을 빌려주어, 그 돈으로 임실의 진뫼마을 빈집 한 채를 사서 일년을 살았다는 박남준 시인, 그 인연으로 이 책의 추천글을 쓴 박남준 시인은 김도수 시인의 고향 사랑을 두고 <강가의 작은 마을을 지키는 징글징글한 사랑의 이야기가 여기 있네. 여기 불이 꺼진 마을에 다시 들어와 따뜻한 불을 밝힌 사람이 있네>라고 말한다. 김도수 시인은 1959년 생이고 박남준 시인은 1957년 생이다.
5년 / 강산
어제 밤에 대설주의보처럼 꿈을 꾸었다
부처님과 예수님과 주치의 선생님께서
나에게 남은 생명이 5년이라고 말씀 하셨다
주위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이라고 말씀 하셨다
5년의 시한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만 할까
꿈속에서 고민을 하는데 저절로 눈이 떠졌다
시계를 보니 이제 막 새해가 열리는 밤이었다
책상 위에는 어제 낮에 받아서 읽다가 잠든
<섬진강 푸른 물에 징.검.다.리>가 놓여있다
다시 읽기 시작하니 섬진강이 보이고
진뫼마을이 보이고 반월산이 보이고
연어의 종착역이 보이고 징검다리가 보인다
어제 눈이 많이 와서 한라산을 넘지 않고
이어도공화국에서 해를 넘기고 있는데
어둠 속으로 새해가 열리듯 방문이 열리더니
반월산에 누워 계신 부모님께서 들어 오신다
아직, 내가 등을 타고
구멍 없는 피리를 불어야 할 흰 소는 보이지 않는다
《섬진강 푸른 물에 징·검·다·리》에 수록된 글과 사진들은 박남준 시인의 말처럼 징글징글한 사랑이 아닌 것이 하나도 없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나의 시선을 더욱 오래도록 붙잡아 두는 글과 사진들이 있다. 김도수 시인의 고향 임실의 진뫼마을과 나의 고향 곡성의 연어의 종착역은 참 많이도 닮아 있어서 많은 이야기들이 나의 이야기처럼 다가온다. 그 중에서 나는 <추억의 등교길>이 가장 좋다. 나에게 가장 많은 생각을 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또한 나로 하여금 가장 많은 반성을 하도록 깨우쳐주고 있다. 이 이야기는 추석 연휴 첫날, 초등학교 다니는 딸과 아들에게 김도수 시인이 다녔던 초등학교 등교길을 체험하게 하는 이야기이다. 딸 가애와 아들 민성이가 책보 둘러메고 아버지의 어린 시절 등교길을 체험하는 이 이야기는 나 자신에게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한다. 덕치초등학교로 가던 강변 등교길을 다시 한 번 생각한다. 김도수 시인이 다녔던 길과 그의 딸과 아들이 손 꼭 잡고 아버지가 걸었던 길을 따라서 걸어가는 모습이 내 눈에는 참으로 아름답게 그려진다. 그리고 그런 딸과 아들 뒤를 따라서 점심 도시락을 싸서 따라가는 김도수 시인과 그의 아내 박은자 형수님도 보인다. 그리고 농사일을 하다가 뒤늦게 운동회가 열리는 학교로 달려가는 김도수 시인의 어머니 월곡떡도 보인다. 그리고 운동장 앞쪽 모서리에 서 있는 쌍벚나무 아래서 점심을 먹는 김도수 시인과 그의 형과 그의 어머니가 함께 점심을 먹는 모습도 보인다. 또한 김도수 시인과 그의 아내 박은자 형수님과 그의 딸 가애와 그의 아들 민성이가 함께 모여서 점심을 먹는 모습도 보인다.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이다. 그런데 나는 지금껏 어떻게 살아왔는가?
그리고 나는 < 75년 여름 진뫼마을 톱뉴스>에서는 나의 아버지를 보았고 <어머니 사랑비는 언제나 세울까>에서는 나의 어머니 메산이댁을 보았고 <진달래 먹고 놀던 내 친구 현철이>에서는 나의 모습을 보았다. 언젠가는 나의 아버지 이야기와 나의 어머니 이야기와 현철이처럼 살았던 나의 이야기는 새롭게 다시 쓰여질 날이 있으리라. 그리고 <어서 고치집 좀 짓거라>에서는 누에 치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런데 나의 기억과 좀 달라서 확인이 필요할 것 같다. 내 기억에는 일년에 한 번 누에치기를 하였다. 뽕나무가 일 년에 한 번 자리서 나는 일 년에 한 번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봄과 가을 이렇게 두 번 하는 것으로 나와 있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봄 누에와 가을 누에가 있다고 나온다. 우리집에서도 누에치기를 많이 하였는데 어머니께서 약 한 달가량 고생을 참 많이 하셨다. 밭에 있는 뽕이 부족해서 산에 들어가 꾸지뽕을 따다가 먹인 기억이 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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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뫼마을 겨울 풍경 | 산문집 <섬진강 푸른물에 징검다리>
김도수 2011. 1. 16. 12:44
올 겨울은 날씨도 춥고 서울 쪽에 몇 십년 만에 최고의 폭설이 내렸다는 소식이 있었다.
그러나 북쪽의 눈 소식에도 불구하고 이곳 여수는 예년과 다름없이 눈 구경은 쉽지가 않다. 그렇지만 기차를 타고 조금만 위쪽으로 올라가도 산이며 들이며 하얗게 쌓인 눈이 그대로 있는 것이나 함박눈이 펑펑 내리는 걸 볼 때면 이곳과는 정말 딴 세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부터 소개 하고자 하는 책<섬진강 푸른 물에 징검다리-김도수 지음> 속의 겨울 역시 어느 곳의 겨울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아름다움이 있다.
최근에 지인들 모임에 갔다가 이 책의 저자를 만났고 서류 봉투에 담겨진 친필 싸인 된 책을 선물 받게 되었다. 제목부터가 남도의 운치를 가득담은 (섬진강)으로 시작되며 푸른 안개 자욱한 표지 그림 역시 도대체 어떤 책일까 하는 궁금증을 자아냈고 이틀 밤 꼬박 걸려 다 읽을 수 있었다.
책의 내용은 저자가 고향을 떠나 살면서도 고향마을을 잊지 못하고 늘 꿈속에서 헤매던 고향, 전북 임실군 덕치면 장산리 진뫼마을을 사랑하여 쓴 애향가라고 할 수 있다. 이 마을은 진뫼라는 이름처럼 산이 길게 둘러쳐져 있고 앞에는 섬진강이 흐르는 참으로 정겨운 곳이다. 이 마을에서의 저자의 삶은 그야말로 행복이요 아름다움 자체였다. 물론 배고픈 어린 시절에 여러 자식들 키우며 고생 하시던 부모님 아래서 어찌 좋은 일만 있었겠는가 하겠지만 그 또한 행복의 요소로 저자를 고향으로 이끄는 힘이 되었다 할 수 있다.
90년대 말, 저자는 부모님도 돌아가시고 남의 손에 넘어간 고향집을 12년 만에 되찾으며 새로운 고향의 삶을 시작하게 된다. 도시에서 회사를 다니지만 주말엔 고향에 내려와 농사를 짓고 명예이장으로 고향주민으로의 삶을 시작한 것이다.
고향집을 조금씩 손보고 기름보일러로 고쳤지만 최대한 원형 그대로를 유지했다. 방문 역시 자신의 어릴 적 창호지 문 그대로 두어 외풍에 얼굴이 시리다는 아이들의 투정에도 불구하고 부모형제와 지냈던 시절을 추억하며 살고 있다. 부모님이 농사짓던 그 땅에 고추 상추 배추 감자 등 온갖 채소를 다 농사지어서 먹는다.
요즘 아이들은 고향이라면 어떤 곳인지 어디냐 물으면 모모 산부인과라고 말한다는 세태에 비교 한다면, 한국전쟁을 거쳐 우리 부모들의 가난하던 시절에 태어난 저자에게 고향은 삶의 이유이며 원동력이고 행복의 근원임이 절절이 드러나 있다.
책속에 소개된 지명이나 사람호칭은 실명으로, 한둘씩 돌아가시는 고향 어르신들의 함자조차도 소중히 기억하고픈 저자의 애틋함이 묻어난다.
또한 고향의 모든 것을 간직하고픈 저자의 마음은 두 쪽 걸러 한 장씩 실린 아름다운 사진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섬진강변에 자리한 고향마을의 사계절을 담은 사진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가슴 두근거리게 하기에 충분하다. 한 장 한 장 저자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이 마을 마니아가 되었거나 이 마을 사람이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된다. 마을 앞 징검다리 사진은 시멘트 다리로 인하여 사라져 갈 위기에 놓인 징검다리를 되살린 그의 노력만큼이나 아름답다.
진뫼마을(전라도) 특유의 사투리로 엮어진 사연들은 마치 섬진강 푸른 물에 놓인 징검다리 사이로 흘러가는 강물의 노랫소리와도 같다.
책의 마지막에 저자는 말한다.‘사람냄새 나는 섬진강가에 날마다 서있고 싶다’라고. 세월 속에 사라져간 이 땅의 부모들, 자식들의 삶에 발 딛고 선 요즘 사람들에게 사람냄새 나는 이 책을 나는 진정으로 보여주고 싶다.
<큰여수 봉사 소식>6호 에 실린 글입니다.
아들 첫 봉급으로 마을 어르신들과 함께 나눈 점심... 이런 게 행복이지요 | 진뫼마을 고향편지
김도수 2016. 4. 28. 11:09
http://blog.daum.net/jm117/13666463
아들 첫 봉급으로 마을 어르신들과 함께 나눈 점심...
이런 게 행복이지요
16.04.28 09:53l최종 업데이트 16.04.28 09:53l
2016년 4월 16일, 주말을 이용해 고향 진뫼마을에 달려가니 마을 어르신들은 이미 농군의 옷 벗어던지고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계셨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짐 꾸러미 내려놓고 고향마을로부터 1.5km쯤 떨어진 중전마을 식당으로 네 분씩 태워 실어나르기 시작했다.
요즘 몸이 편찮으셔서 외출이 뜸한 윗것테 사는 깨복쟁이 친구 현호네 어머니를 먼저 태우러 갔다. 집 앞에 도착하니 소지 당숙모와 택수네 어머니, 세운이네 어머니께서 기다리고 계셔 방안에 계신 현호네 어머니를 모시고 나와 함께 식당으로 갔다.
"아이고, 뭔 밥을 낸다고 그맀싼데아. 동네사람들 밥 살라면 돈도 많이 들어갈 턴디…. 아들이 첫 봉급 타서 마을분들께 한턱 낸다고 헝게 생각이 참 기특허고만. 도수는 밥 안 묵어도 배부르겄어."
"돈이 들어가면 얼매나 들어가겄어라우. 월급보다는 덜 들어가겄제라우. 그리도 마을 어르신들께 밥 한 번 내야할 일이 생긴 저는 행복허기만 허고만이라우."
"선생되는 시험도 어렵다도만... 큰 복이네!"
"도수 자네 핀허라고 애들이 취직히서 나강게 얼매나 존가. 우리 손자들은 돈 몽땅 디리서 외국에 유학을 갔다 오기도 힜는디 아직도 취직이 안 돼 저그 아부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녀. 취직이 되면 저그덜도 맘 핀허지만 부모들이 더 존 일이제. 자식 새끼들 집에서 놀고 있어보소. 밥 숟꾸락 입에 떠 넣어도 목구멍에 탁 언쳐부러. 맨날 걱정 머릿속에 담고 사는 거제."
"나보다는 저그덜 핀헐라고 졸업하자마자 취직이 된 것이제라우. 둘 다 취직이 돼아붕게 요즘 맘 핀히 지내고 있고만이라우."
"큰 복이네, 큰 복이여! 울 아들이 그런디 요새 교대가기 힘들다고 허더라고. 근디 둘 다 교대에 들어가 졸업허자마자 곧 바로 선생으로 나강게 얼매나 좋아. 사는 게 참 재미지겄어. 선생되는 시험도 어렵다도만 단번에 둘 다 붙어 부렀응게 도수는 복 겁나게 받아붕거여."
"다 동네 어르신들께서 성원해주신 덕분이제라우."
식당에 내려드리고 두 번째 어머니들을 실러 왔다. 깨복쟁이 친구 현철이네 어머니, 군대 함께 간 정호네 어머니, 아랫집 점순이네 어머니, 윗집 재섭이네 어머니 네 분을 모시고 간다.
오리주물럭에 술 한잔 대접, 이게 행복이지
"애들 갈치니라고 돈도 없을 턴디 머더게 동네 사람들한테 밥을 산다고 그려. 안 사도 암시랑토 안 혀!"
"밥도 명목이 있어야 산디 자식들 취직이 되어 산다고 헝게 저도 기분 좋고만아라우."
마을 어르신들은 식당에서 제공한 차를 타고 가기도 하고 오토바이를 타고 가기도 하고 또 뒤늦게 오신 분들은 본이 소유의 소형 화물차를 타고 오셔서 네 번 왕복을 하니 개인 사정이 있어 빠지신 분들을 제외하고 스물여섯 분 모두 오셨다.
"익산에 있는 딸은 감기몸살이 너무 심해 도저히 올 수가 없어 못 왔고만이라우. 꼭 와서 어르신들께 아들이랑 함께 인사 드려야 헌디 못 와 죄송합니다. 대신 올해 임용시험 합격히서 기간제 교사로 첫 봉급 탄 아들 인사 올리겠습니다."
"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많아 드시고 부족한 거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아따, 적 아부지 탁히서 긍가 눈썹도 시커머니 인물도 훤허네."
아들은 마을 어르신들께 술과 음료수를 한 잔씩 따라 올리며 "건강하세요" 인사 올리고 있다.
"아따, 점심 한 번 잘 묵었네"
"도수 아들이 따라준 게 겁나 맛싯네. 쬐깐헐 때부터 딜꼬댕기도만 언제 요로케 커부렀데아. 세월 참 빠르고만. 그나저나 고향 들락거림선 고향집 지키제, 밭이고 산이고 안 묵히고 가꾸제, 하여간 부모님들께서 자네한테 몽땅 복 니리준거여. 그나저나 도수 아들 덕분에 오늘 낮 점심 잘 묵었네."
사는 게 뭐 특별한 게 있겠는가. 나를 키워주고 보살펴주고 지금의 나를 있게 도와준 고향 사람들 잊지 않고 밥이라도 한 끼 나누며 사는 게 행복 아니겠는가.
올해 초, 아들은 임용시험에 합격하자 첫 봉급 타면 엄마 아빠 주말마다 고향에 가시니 "누나는 첫 봉급 타서 아빠 개량한복 한 벌 맞춰줬으니 나는 진뫼 어르신들께 식사나 한 번 대접하려고요"라고 말했다.
대학 다니며 아르바이트로 벌어온 첫 돈을 모두 부모님 손에 쥐어주더니 또 한 번 아들의 고운 마음씨에 볼 발그스레 상기돼 날아갈듯 기뻤다. 저축하고 남은 용돈 자기 쓰기도 빠듯할 텐데 기특한 마음 가지고 있었던 건 어린 시절부터 고향에 뿌리를 내리고 숨 쉬며 살아왔던 '고향의 순'이 몸 속에 새순을 틔우고 있었던 거 같다.
첫 봉급 탄 이후 마을 이장님과 날짜를 협의해 오던 중 이날 날을 잡아 마을 어르신들이 평소 좋아하는 '오리주물럭'을 시켜 술 한 잔씩 나누게 된 것이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안 계시니 마을 어르신들께 부모님 생일상을 차려 대접을 하거나, 팔순잔치에 초대해 대접할 일도 없어 아들 취직으로 인해 한턱 내는 기회가 찾아왔으니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아마 부모님이 살아계셨더라면 오늘 낮 춤이라도 덩실덩실 추면서 한 잔 하셨겠지. 자식 키운 보람 느꼈다며 아버지는 팔자걸음으로 비틀비틀 집으로 돌아가는 하루였겠지.
술 한 잔씩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마을 어르신들께서 돌아가신 부모님 맘을 내게 들려주고 계셨다.
"월국양반 월국떡은 참말로 좋겄네. 손지들이 둘씩이나 선생님이 돼아부러서. 월국양반이 늘 자식들에게 공무원, 공무원 노래 불렀쌌더니 손자들까지 꿈을 이뤄불었고만."
부모 맘대로 안 되는 게 자식 교육인데 5~6세 때부터 주말마다 고향집 데리고 다니면서 스스로 자연 공부 터득하며 놀던 아이들. 시골에서 초등학교 교사하면서 고향집 지키며 살았으면 좋겠다고 노래불렀다.
마당 한켠엔 '가족나무'라 명명한 자목련을 심고, 뒤란에 아이들 이름을 각자 붙여 사과나무를 심어놨다. 결혼하면 자식들 데리고 부모님이랑 함께 심어 놓은 자목련은 지금쯤 피었을까, 사과는 몇 개나 열렸을까, 그 핑계 대고 남편 아내 손잡고 고향집에 한번이라도 더 오는 '이유'를 만들어 놓기도 했다.
자식자랑은 팔불출이라 했거늘... 그러나 어쩌랴
도시에 살거나, 많이 배웠거나, 높은 학력을 가지신 분들께서는 절대로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두메산골 가난한 진뫼마을 사람들 눈높이로 자식 둘 모두 공무원으로 나가는 거는 행복한 일임에 틀림없는 일이다. 형제들도 '이제 복 그만 가져가고 나한테 돌려 놔라'고 농담을 하기도 한다.
"도수가 집 사서 부모님께 잘 헝게 그 복 옴쏘롬허니(온전히) 다 받아 간 거여. 축하혀! 울 동상은 인생 잘 살았어. 진뫼 '사랑비'에다 막걸리 또랑물 내려가듯 부었고, 그렇게 뜨거운 여름날 까시덩풀 헤치고 엄마 산소 관리 하는데 복 안 주겄어. 조상님도 알고 복 주신거제. 오늘 뒷산에 잠드신 울 어매 아부지 벌떡 일어나 춤 덩싱덩실 추며 더듬더듬 고향집으로 니롸불지도 모르겄다."
그날 밤, 마을 어르신들께서 따라주신 술 받아 마시고 잠이든 아들 꼭 껴안아줬다. 부산에서 교대를 나온 아들이 임용시험을 부산으로 칠까, 경기도로 칠까, 고민하다 내 뜻 받들어 전북 지역으로 지원해 합격했기 때문이다. 자식자랑은 팔불출(八不出)이라 했거늘 나는 '기천팔불출' 쯤 되겠다. 그러나 어쩌랴.
잠을 청하려 해도 쉬이 오지 않는다. 몸을 뒤척이다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고 고등학교 졸업하고 부모님 농사 도와주던 그 봄날이 머릿속에 환히 떠올랐기 때문이다. 소쩍새가 구슬피 울어댈 때마다 쇠죽방에 누워 '나는 앞으로 뭣이 되어 사회에 나가 살 것인가, 공장에 취직하러 서울로 올라갈 것인가, 아님 공무원 공부를 헐 것인가, 군대를 지원히서 일찍 갔다올 것인가,' 불멸의 밤으로 눈물 지새우던 그 봄날이 다시 내게로 오고 있었다.
소쩍새
대학 문 못 밟고
쇠죽방에 누워 자는데
소쩍소쩍
문틈 뚫고 들려오는 소쩍새 소리
벽지 대신 발라놓은 누우런 신문지
인재를 찾습니다
취업 광고판 읽으며
세상 나가는 길 찾고 있다
소쩍소쩍
나도 소쩍새 따라
훌쩍훌쩍
날 밝기 전
세상 속으로 숨어들었다
― 시집 <진뫼로 간다>중에서, 졸시<소쩍새> 전문
새벽녘 잠에서 깨어나 곤히 잠든 아들 얼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종일 농사일에 지쳐 곤히 잠든 나를 새벽녘 아버지께서 우두커니 바라보듯. 그러다 팔베개를 하고 다시 잠이 들었다.
아들이 알바해서 준 용돈으로 고향 사람들에 점심 대접하던 날
13.01.10 20:58l최종 업데이트 13.01.10 20:58l 김도수(khjm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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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대학에 들어간 아들은 올 겨울방학 동안 학교에서 실시하는 교육봉사를 이수해야 해서 집에 오지 못하고 기숙사에서 생활하고 있다. 지난 연말 새해 새 아침은 가족과 함께 보내야 한다며 집에 왔다. 집에 도착하는 날 가족들과 저녁 식사를 하는데 뜬금없이 돈 봉투를 내민다.
"나 지금 아르바이트 해요. 초등학교 4학년 가르치는데 일주일에 세 번씩 가기로 하고 40만원 받았어요. 학교 인근이라 15분 정도 걸어가면 돼서 할 만해요."
"사람이 살면서 여러 가지 경험을 해보는 게 좋지. 네 삶이 풍요로워져서 좋기는 허다만은
공부 열심히 히서 장학금을 타오는 게 나는 더 좋다."
"아빠! 괜찮아요. 열심히 공부해서 임용고시 붙을 자신 있으니까 넘 염려하지 마세요."
아들은 돈을 꺼내 아빠, 엄마, 누나에게 각 10만 원씩 나누어준다. 그리고 자기도 용돈으로 쓴다며 10만 원을 지갑에 넣는다.
"마냥 어린애 같기만 하던 아들이 다 커서 돈을 벌어다 내 손에 쥐어주니 고맙기만 하구나. 잘 쓸게."
아들이 아르바이트로 벌어온 '첫 돈'을 쥐고 어디에 쓸까 고민했다. 잃어버린 목도리를 살까? 아님 추운데 내의를 한 벌 사 입을까? 돈을 만지작거리다 첫 봉급 타서 어머니께 옷 한 벌 사드려니 이미 이 세상에 안 계셔 한없이 울던 생각이 났다.
아, 그래. 이 돈은 나를 키워주고 길러주신 우리 부모님과 고향 사람들을 위해 써야지. 나와 내 자식들 세끼 밥 편히 먹고 살 수 있도록 열심히 뒷바라지하며 공부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 분들을 위해 쓰는 게 맞아.
부모님께 '효도'하려 해도 이미 이 세상에 안 계셔 어떻게 할 수가 없다. 하지만 내가 학교 다닐 때 주말에 집에 오면 어머니 수중에 돈 한 푼 없어 맨발로 이 집 저 집 돈 꾸러 다닐 때 선뜻 빌려주신 마을 사람들이 계시지 아니한가.
"가애 엄마! 항상 애기로만 보이던 아들이 고생히서 처음으로 벌어온 돈을 이렇게 쥐고봉게 기분이 참 묘허고만. 의미 있게 써야 헌디 어디다 쓸까 고민허다 결정힜네. 자네는 그 돈 어따 쓸랑가?"
"어따 쓰기는 뭐설 어따 써! 봉급 타먼 일주일도 못가 맨날 마이너슨디. 돈 이리 내놔! 아들이 애쓰게 벌어온 돈을 진짜로 쓸라고 힜소? 등록금 낼 때 보태 써야지 쓰기는 어따 쓸라고 혀! 지금 카드빚이 얼마나 된지 알기나 허요?"
"음마! 아들 뒷바라지 히서 처음으로 벌어온 돈잉게 나도 내 맘대로 한번 써봐야제 시방 뭔 소리여!"
"도대체 어디다 쓸라고 그러요?"
"고향 사람들에게 찬거리나 좀 사다 드릴라고 허고만. 눈이 몽땅 니리서 어디 장에나 한번 갔겄는가."
"아이고 지금까지 그만큼 사다드렸으먼 됐어. 넘 오바허지 말고 돈 이리 내놔! 마이너스 카드 내역서 볼 때마다 한숨 나와 죽겄는디 어따 쓸라고 난리여. 하여간 그 돈 쓰기만 허먼 알아서 혀. 좋지 못헐 텅게."
그날 밤 결혼해서 수십 번도 더 들었을 두메산골 어린 시절 가난했던 이야기가 실타래 풀리듯 또 이어지고 있었다.
학교에서 육성회비를 기한 내 못 낸다고 집으로 돌려보내면 어머니는 집집마다 돈 빌리려 다녔는데 당장 비료 사와 농사지을 돈까지 기꺼이 빌려주던 고향마을 사람들이 아직도 살아계신다고. 나와 함께 어깨를 맞대고 모를 심던 사람들, 이제 거의 다 돌아가시고 몇 분만 남아 겨우내 마을 회관방에 모여 밥상 두 개면 충분한 지금 사가지 않으면 난 두고두고 후회 한다고.
1월 6일 일요일 아침. 아내와 나는 오일장이 열리는 광양시장으로 발길 옮기고 있었다. 무엇보다 아내와 함께 장을 보러가고 오늘, 고향 사람들과 함께 점심을 먹는다 생각하니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가애 아빠! 조기 한 상자만 사야 돼! 더 이상 뭐 사자고 힜다 허먼 나 도로 집으로 들어가불 텅게 그리 알아."
"알았어. 걱정허지 마!"
지금 시골에는 눈이 많이 내려 분명 찬거리가 부족할 게 뻔하다. 마을 사람들 하루 종일 마을회관에 모여 점심과 저녁까지 해 드시고 헤어지니 지난해 겨울처럼 김치 하나에 드시고 계신지 모를 일이다. 그 상황을 머릿속에 그리며 나는 비교적 양이 많고 저렴한 콩나물 가게부터 들어섰다.
"콩나물 같은 싼 거 좀 사가세. 이왕이먼 두부도 한 판 사가고."
내 예상은 적중해 아내는 콩나물과 두부 한 판을 사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두부와 콩나물을 나눠 들고 다니면 혹시 아내가 힘들어 신경질 낼까봐 가게에다 맡겨두고 조기를 사러 돌아다녔다. 조기를 골라 놓고는 "이왕이면 저기 저 동태도 좀 사가세. 조기를 많이 사니까 싸게 줄턴디…" 하고 말을 건네자 "아예 장을 봐서 가지 그러요!" 면박을 준다.
눈을 흘기면서도 아내는 "저기 저 동태는 얼매요? 좀 싸게 줏쇼. 우리 묵을라고 사는 게 아니라 우리도 마을 어르신들 갖다 줄라고 헝게 젊은 아저씨도 봉사헌다 생각허고 좀 싸게 줏쇼" 하며 동태도 산다. 시장을 나오려 하니 맨 끝에 과일 좌판들이 죽 늘어서 있다. 나는 침을 꼴딱 생키며 말했다.
"가애 엄마! 이왕이먼 귤도 좀 사가세. 오랫동안 눈 속에 갇혀 있응게 얼매나 과일이 묵고잡겄는가. 귤 한 박스만 사가세!"
"환장허겄네. 조기만 사간다고 허더니 이것저것 다 사네."
"나도 아들이 준 돈 일부 헐어서 썼응게 그리 알아!"
"잘 힜어. 장바구니 들먼 돈 뭐 쓸 것 있가디. 남에게 복을 주는 사람은 복도 대물림으로 도로 받는 법이여! 남에게 베풀먼 다 자식들한테 돌아가."
"글먼 술은 안 사갈라요?"
"당신 모르게 젠작 트렁크 속에 사다 넣어 놨제. 내가 누구여!"
마을에 도착하니 회관 지붕은 아직 리모델링 공사가 안 끝났고, 내부 시설은 다 끝났는지 현관에 신발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허허! 뭔 놈의 것을 요로케도 많이 사왔데아, 응. 제삿장 봐온 것맹키로 몽땅도 사와부렀네. 반찬 다 떨어져서 그라니도 내일 순창 나가서 찬꺼리 좀 사올라고 힜는디 자네가 장베기(장보기) 다 봐와불었네."
"저 학교 댕길 때 돈도 빌려 주고, 우리 부모님 농사지을 때 동네 사람들이 도움 많이 줬는디 내가 그 고마운 마음 잊고 살먼 되겄어라우. 그냥 뭐 이것저것 쬐끔 사왔고만이라우."
"공짜로 돈 빌려주고, 공짜로 일 힜가디 그런가. 사와도 너무 많이 사와부렀고만. 자네도 자식들 둘 다 대학 댕긴 게 힘들 턴디 앞으로 요로케 많이 사오지마! 술이나 한두 병 사오먼 모를까."
작년까지만 해도 회관 방은 단열이 잘 안 되어 곰팡이가 피고 찬바람 솔솔 파고 들어와 썰렁하기만 했는데 정부에서 리모델링을 해주니 방에 훈기가 돌며 따스했다. 화장실도 내부에 하나 새로 설치되어 겨우내 편하게 지낼 수 있어 마을 사람들 얼굴마다 웃음꽃이 만발해 있었다.
"다 잘 되았는디 저그 씽크대허고 들어오는 문짝이 영 엉성혀. 문짝은 잘 안 맞아 손 좀 봐야 헐랑가비어. 글고 제섭이네 집 창고에 넣어둔 텔레비만 가져다 놓으먼 참 좋겄는디 제섭이네 어메가 열쇠를 가꼬 서울 자식들 집으로 가부러서 오늘이나 내일 쯤 니론당게 지달려봐야제."
집에 가니 모두 꽁꽁 얼어붙었다. 화장실 좌변기 저장물통에 담긴 물도, 보일러실에 얼지 말라고 부동액을 넣어둔 물통도, 땅 속에 묻어둔 싱건지도, 지붕에서 눈 녹아 흐르는 홈통도, 하수구 내려가는 파이프 관도 모두 꽁꽁 얼어붙어 그야말로 얼음집이 되어버렸다.
이 얼음이 녹으려면 아마 따스한 봄이 와야 가능할 것 같다. 지난해 겨울에는 보일러가 얼지 않도록 전기코드를 뽑지 않고 '외출'로 해 놓아 영하로 내려가면 보일러가 자동으로 돌아가면서 방과 보일러실을 지켜줬다.
그런데 주말마다 가던 나도 농한기인 겨울철이면 발걸음 멈추니 맥없이 보일러만 펑펑 돌아가는 게 기름 값 아까워 아예 전기코드를 뽑고 보일러실 호스와 밸브를 이중 보온재로 감싸고 헌 이불로 겹겹이 쌓아 덮어놓았다. 그런데 올 겨울은 유난히 강추위가 계속되어 각 방으로 들어가는 보일러 호스나 보일러실 밸브 관이 터져버릴까 걱정이다.
콩나물 무치고, 멸치 넣어 두부 지지고, 무 썰어 넣고 자박자박 지진 조기찌개와 시원한 동태 국에 먹는 점심. 거기에 곁들여 마시는 시원한 막걸리 한 사발. 어찌나 밥맛이 좋더니 고봉밥 한 그릇 눈 깜짝할 사이에 뚝딱 해치우고 나자 '더 묵어라'고 밥그릇 달라 하시는 어머니들 손길 차마 뿌리치지 못했다.
"도수! 밥 더 묵소. 여럿이 묵는 밥이라 참 마싯제. 그나저나 오늘 낮에 도수 덕분에 마싯게 잘 묵네. 월국떡이나 월국양반 살았으먼 얼매나 좋아라고 힜겄어."
사는 게 뭐 특별한 거 있겠는가. 행복한 삶, 어디 멀리 가 있겠는가. 나와 부모님 도와주시던 마을사람들 잊지 않고 한 분이라도 더 살아계실 때 밥상 마주하며 막걸리 한 사발 따라드리며 함께 웃고 기쁨 만끽하며 누리며 사는 게 행복 아니겠는가.
덧붙이는 글 | 김도수 기자는 주말이면 가족들과 함께 고향마을로 돌아가 밭농사를 짓고 있고 전라도닷컴(http://www.jeonlado.com/v2/)에서 고향 이야기를 모은 <섬진강 푸른물에 징검다리>란 산문집을 내기도 했습니다.
《섬진강 푸른 물에 징·검·다·리》 독자 호응 속 2쇄 찍어
남신희
기사 게재일 : 2006-12-27 06:00:00
그의 고향마을 앞엔 세상에 둘도 없을 비가 서 있다.
비에 새겨진 내용은 <월곡양반 월곡댁/ 손발톱 속에 낀 흙/ 마당에 뿌려져/ 일곱 자식 밟고 살았네>. 뒷면엔 <어머니 아버지 가난했지만 참으로 행복했습니다>라고 씌어져 있다.
돌아가신 부모님을 기려 두 분이 생전에 땀흘려 일하던 고추밭에 자그만 `사랑비’를 세웠다. 지극정성 그 마음은 고향마을에까지 두루 닿아 있다.
고향집이 팔린 뒤 타향의 삶을 사는 동안 밤마다 진뫼마을 곳곳을 헤매고 다니는 꿈을 꾸었다는 사람. 이미 남의 것이 돼 버린 옛집에 비가 새는 것을 보다 못해 담장을 타고 올라가 비닐을 덮어주다 집주인에게 핀잔을 받은 사람. 잃어버린 징검다리를 고향 사람들에게 되찾아 주기 위해 어느 해 추석 `징검다리 놓기’ 울력을 벌인 사람…. 김도수(48)씨다.
그는 강가의 바위 하나, 마을 들머리의 오래된 이발소, 마을을 지키는 정자나무 한 그루를 두고도 섬진강 오백리보다 더 길게 이야기를 풀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다. 섬진강물 마를지라도, 그의 고향 이야기는 마르지 않을 것 같다. 그 엄청나고 유장한 `수다’의 근원은 무엇보다 `사랑’이다. 그의 고향은 섬진강 흐르는 강변마을, 임실군 덕치면 진뫼마을.
산문집 《섬진강 푸른물에 징·검·다·리》(전라도닷컴)는 그 고향을 향한 징글징글한 사랑의 기록이다. 지난 2004년 첫 출간에 이어 최근 2쇄를 찍었다. 그 사랑에 `감염’된 이들이 많았기 때문일 것. 읽어본 이들이 다시 주변 사람들에게 선물하고 권하는 책이다.
섬진강 오백리보다 더 긴 고향 이야기
그가 글 속에 펼쳐놓은 것은 너무나 정밀한 마을지도이자 추억의 지도이다. 또 어머니 아버지 누이 형 깨복쟁이친구들 마을 어르신들의 생생한 초상이기도 하다. 그 속에 눈물나고 정겨운 사람살이가 다 담겨 있다.
지난 98년, 고향집을 12년만에 되찾은 그는 주중에는 직장생활하느라 순천에서 살고 주말마다 가족과 함께 진뫼에 돌아와 고향의 삶을 살고 있다. 그의 별명이 `진뫼마을 주말 명예이장’인 이유다. 고향 일에 관해서라면 그는 정말 오지랖 넓은 사람이다. 모 청사의 표지석으로 끌려갔던 마을 강변의 `허락바위’를 되찾기 위해 민원편지를 쓴 것도 그였다. 허락바위는 비가 내려 강물이 불었을 때 이 돌이 어느 정도 물에 잠겼는지를 봐서 강을 건널지 안 건널지 마음속에서 허락을 받아내던 바위. 지금 그 허락바위는 `自律’이란 글자가 새겨진 몸으로 고향에 돌아와 있다.
눈물 참느라 목구멍이 따끔따끔 아파지는 이야기는 대부분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들. 모내기하랴 누에똥 가리랴 늘 잠이 부족했던 탓에 어느날 저녁 마루에서 꾸벅꾸벅 졸며 일하다 시멘트 바닥 위로 떨어진 어머니의 이마에 볼록하니 상처가 났던 이야기도 있다. 돌아가신 날까지도 여전했던 어머니의 그 상처는 아들의 가슴에 아프게 남아 있다.
눈물나고 정겨운 사람살이 다 담겨
당숙네 집에 가서 새마을담배 한갑 건네주고 하던 까까머리 이발, 어머니 몰래 귀한 달걀 주고 사먹었던 아이스깨끼 등 `그 땐 그랬지’라고 고개 주억거리게 되는 이야기들도 많다. 마음속에 `고향’을 품고 사는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란 생각이 절로 드는 글들이다.
발문을 쓴 시인 박남준씨는 김도수씨의 고향 사랑을 두고 <강가의 작은 마을을 지키는 징글징글한 사랑의 이야기가 여기 있네. 여기 불이 꺼진 마을에 다시 들어와 따뜻한 불을 밝힌 사람이 있네>라고 말한다.
진뫼마을에서 2년 전 출판기념회가 열렸을 때 진뫼마을 할머니들은 “도수는 참말로 금뺏지 단 것보다도 더 좋은 일을 해부렀어”라며 눈물을 훔쳤다. 책 속의 사진들만 봐도 진뫼마을이 생생하고 애틋했기 때문.
그는 “돌이켜 보니 내가 고향 이야기를 쓴 게 아니라 쉼없이 흘러가는 저 섬진강이, 제 몸 아끼지 않고 평생 부지런히 일하며 착하게 살아온 마을 사람들의 생애가 이 글을 쓰게 한 힘이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고향도 많이 달라졌다. “적막하고 쓸쓸해졌다. 많은 분들이 죽고 떠나고, 이제 몇 분 남은 어르신들만 고향을 지키고 있다.”
고향에 돌아오는 꿈을 오랫동안 꿔왔던 그는 이제 새로운 꿈을 꾼다. 불 꺼진 집들에 다시 불이 켜지는 꿈. 자신의 아들딸 가애와 민성이에게도 먼 훗날의 아이들에게도 진뫼마을이 계속 `고향’이 되는 꿈.
주문 및 문의 650-2042
남신희 기자 miru@gjdrea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