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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산 Mar 20. 2024

심우도

꿈삶글 21


심우도


심우도(尋牛圖) 속으로 걸어간다 나의 흰 소는 보이지 않고 검은 소들이 있다  

  

소들이 소나무 아래 모여 있다 멍에도 코뚜레도 없다 숲에서 뜯어먹은 풀을 되새김질하며 서로의 눈빛을 본다 서로의 등을 핥아주는 소도 있고 죽비처럼 꼬리로 엉덩이를 치는 소도 있다 새로 발견한 풀밭을 알려주는지 귓속말을 속삭이는 소도 있고 조용히 바다를 바라보는 소도 있다     


나도 소를 길렀다 나는 늘 길을 들이려고 했다 내가 기르는 소는 코뚜레를 하였고 멍에를 하고 쟁기질을 해야 했다 갱본에서 쉬는 동안에도 말뚝에 박혀 있어야 했다 나의 소는 소나무 그늘에서 쉬어보지 못했다     


나는 흰 소를 타고 구멍 없는 피리를 불 생각만 하였다 소와 함께 놀아줄 생각은 하지 못했다 내가 소를 업어 줄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소들이 다시 숲으로 들어간다 소는 걸어가면서도 텅텅텅 똥을 잘 싼다 풀을 먹고 자란 소들이 풀에게 밥을 준다 나도 소나무 그늘에 앉아 바다를 보다가 소들이 들어간 숲으로 따라 들어간다     


숲에서 비명소리가 들린다 전기톱 돌아가는 소리가 귀를 찢는다 소나무가 없어져야 땅값이 오른다며 소나무를 죽이고 있다 그해 겨울의 숲처럼 숲은 온통 소나무 무덤이 된다      


숲에 소나무가 없다 소들이 함께 모여서 쉴 곳이 없다 가시덤불 속에서 가시에 찔리며 소들이 서 있다     


소들은 고개를 숙이고 있다 어렵게 새로 돋아나는 소나무 새싹에 콧김을 불어넣는다    


나는 심우도(尋牛圖) 밖으로 나와 심우도(心牛圖)를 그린다




사람의 마음이란 야생마와 같아서 말뚝에 매어놓거나 길을 들이지 않으면 어디로 달아날지 모른다. 또한 불가에서는 마음의 수양을, 소를 찾아 길들이는 일에 비유하고 있다. 사찰에 가면 벽에 심우도가 그려져 있는 곳이 많다. 우리들의 마음의 중심에 스스로 말뚝을 박아놓을 필요가 있다.


나는 세례명이 프린치스코인 예수님의 제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대학에서 불교학생회 회장까지 하였고 해인사에 머리를 깎으러 들어갔던 부처님 제자이기도 하다. 나는 사이가 좋도록 예수님도 부처님도 똑같이 스승으로 모시고 살아간다.


하지만 나는 무조건 복종하는 그런 제자가 아니라 장점만 배우는 이기적인 제자다. 사람들은 누구나 장점과 단점이 있다. 그것은 예수님이나 부처님도 예외는 아니기 때문에 나는 나에게 필요한 장점만 배운다. 너무나 이기적인 제자이지만 가끔은 선한 일도 한다. 제자로서의 최소한의 도리는 해야 하기 때문이다.


작년부터 경주 남산 열암곡 마애불상을 바로 세우자는 운동을 본격적으로 하고 있다. '과거천년 미래천년, 천년을 세우다'라는 기치 아래 우리 모든 국민들의 마음을 하나로 합쳐서 민족 통일과 세계 평화에 이바지하려는 마음을 모으고 있다. 나에게도 힘을 보태라는 청탁이 왔다. 그래서 나는 며칠 안에 이런 염원을 담아 시를 써야만 한다. 급한 마음에 우선 반야심경과 천수경을 다시 읊으며 메모부터 시작을 한다.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급할 때는 일단 메모부터 하고 더 깊이 생각하며 다듬어서 시를 완성할 때도 있습니다. 물론,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시가 좋은 시가 될 확률이 많습니다. 하지만 가끔은 청탁을 거절하지 못하여 쥐어짜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내 안의 부처님을 만나다


탐진치(貪瞋癡)가

나를 엎드리게 했다     


내 안의 부처님이 보인다

경주 남산 열암곡 마애불     


5cm의 기적으로 대면하여

가장 낮은 자세로 만난다     


더욱 깊은 곳에 쌓여있던

어둠을 퍼내기 시작한다     


농약을 드신 어머니도 부처였고

나를 버린 붉은여우도 부처였고

도박에 중독된 아들도 부처였다     


부처님과 함께 사바하 일어선다          


* 탐진치(貪瞋癡) : 탐욕(貪欲)과 진에(瞋恚)와 우치(愚癡), 곧 탐내어 그칠 줄 모르는 욕심과 노여움과 어리석음. 이 세 가지 번뇌는 열반에 이르는 데 장애가 되므로 삼독(三毒)이라 함.

* 사바하(娑婆訶) : 원만한 성취라는 뜻으로, 진언의 끝에 붙여 그 내용이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말. 하지만 여기서는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약자로 썼으며 "사뿐히"란 의성어로, 중의적인 의미로 썼음.



열암곡 마애부처님께서 천년을 세우신다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 말씀하셨는데

바위는 어찌하여 부처님 미소가 되었을까

열암곡 마애부처님께서 천년을 세우신다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땅속에 심으신 말씀을 드디어 꽃 피우신다

환하게 밝아지는 과거의 천년 미래의 천년

남북의 통일과 세계의 평화가 멀지 않았다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다보탑과 석가탑과 석굴암의 마음이로다

절이 별처럼 많고 탑은 기러기처럼 높다니

석가모니부처님과 다보여래가 함께 웃는다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가장 낮은 자세로 천년을 살아오신 부처님

이제 다시 얼굴을 나투시어 밝게 비추신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 염불소리 봄꽃 피우신다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석가모니불 미륵불 아미타불 합장 하옵니다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미륵불도 아미타불도 영차영차


나무 본사 아미타불 

나무 본사 아미타불 

나무 본사 아미타불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아미타불 석가모니불

영차영차 천년을 세우자 영차영차영차영차

영차영차 나라를 세우자 영차영차영차영차

영차영차 마음을 세우자 영차영차영차영차

영차영차 다함께 세우자 영차영차영차영차

영차영차 평화를 세우자 영차영차영차영차

영차영차 부처도 예수도 영차영차영차영차

영차영차 누워계신 부처님도 영차영차영차

영차영차 엎드린신 부처님도 영차영차영차

영차영차 하늘도 바다도 영차영차영차영차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아미타불 석가모니불

영차영차 조금씩 조금씩 영차영차양차영차

영차영차 조심히 조심히 영차영차영차영차

영차영차 흙으로 다지며 영차영차영차영차

영차영차 우리도 따라서 영차영차영차영차

영차영차 가슴을 모아서 영차영차영차영차

영차영차 합장을 모아서 영차영차영차영차


옴 마니 반메 훔

옴 마니 반메 훔 

옴 마니 반메 훔

     

https://www.youtube.com/live/rF-8ig9rnUc?si=89sXY_SOQPvck2Hd


http://www.bulkyo21.com/news/articleView.html?idxno=55315



공부시간 : 세상 공부를 위하여 빌려온 책입니다.


01화 반야심경 명상 : 들어가며 (brunch.co.kr)

반야심경 명상 : 들어가며

by김경윤 May 11. 2021


세상에서 가장 짧은 불교경전 중 하나가 <반야바라밀다심경>(줄여 <반야심경>)이다. 앞으로 10여 차례에 걸쳐 <반야심경 명상>을 올리려고 한다. 불교를 이해하고, 뒤집혀진 세상을 다시 뒤집어 바로 보기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반야바라밀다심경>을 읽다.


<반야심경>의 '반야(prajñā)'는 완전한 최고의 지혜를 뜻한다. '심'은 핵심이다. '경'은 경전이다. 부처님의 지혜 중 핵심적인 것을 기록한 경전이라는 뜻이다. 몇 글자인가? 260자다. 팔만대장경 그 장대한 불경을 260자로 압축하다니 놀랍다. <반야심경>은 대승불교의 경전이다. 부처님 입멸한지 약 500년 후에, 대승불교는 초기불교의 무아사상을 끝까지 밀고 나가 모든 실체적 사유를 부정하는 공空사상을 정립하였다. 이 공사상을 철두철미하게 체득하는 것이 반야지혜이고, 이 반야지혜의 완성이 반야바라밀다(prajñāpāramitā)이다. 대승불교는 반야바라밀다를 중심 테제로 내세우며 치열한 대중운동을 펼쳤다. 이것이 대승불교운동이다. 대승의 반야사상은 기존의 번쇄한 이론체계를 무너뜨렸다. 새로운 불교를 탄생시킨 불교혁명이었다. 이후 대승불교운동은 다양한 반야부 경전을 만들어내었다. 팔천송반야경을 시작으로 이만오천송반야경, 금강경, 십만송반야경 등 반야경전은 그 양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반야심경>은 이 방대한 반야경을 한자漢字 260자로 압축한 대승불교의 핵심 경전이자, 반야사상의 결정판이다.     


세상에서 가장 짧은 경전, 그러나 가장 강력한 경전!


이를 한자로 번역한 사람은 <서유기>에 나오는 삼장법사로 유명한 현장이다. 그 이전에도 다양한 번역이 있었으나 우리는 현장의 번역을 외우고 해석한다. 절에서 진행하는 불교의식에 참여하는 신도들은 <반야심경>을 봉독 하는 것으로 의식을 시작한다. 처음에는 뜻도 모르고 한자로 암송하였으나, 요증에는 한글로 번역된 것을 암송하기도 한다. 일반적인 대중도 <반야심경>은 모르지만, 반야심경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 ‘색즉시공, 공즉시색’은 친숙하다. 심지어 유튜브에는 힙합음악으로 만든 ‘반야심경 리믹스’가 젊은이들에게 대단한 인기를 끌고 있다. 시간이 있으면 들어보라. (https://youtu.be/6rJ6V83uBGI). 

이렇게 익숙한 경전이지만, 그 내용을 따지고 들어가면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읽을 수는 있되 모르는 게 너무 많다. 문해력의 문제가 발생한다. 그래서 이를 해설해 놓은 책들이 불티나게(?) 팔린다. 이번 <반야심경 명상>에서는 한 구절 한 구절 따져가며 읽으면서, 그 불교적 의미와 현재적 삶에 가교를 만들고 싶은 마음으로 쓴다. 불교도를 위한 글쓰기가 아니라 일반독자들도 <반야심경>의 재미를 느끼게 하고 싶다. 인문학자이자 작가의 관점에서 될 수 있는 한 쉽고 재미나게 써보고 싶다. 일단 번역된 한글 전문과 한자와 음을 아래에 적어둔다. 연재는 한 문장 한 문장 뜯어서 씹어 먹으며 소화된 몫만큼만 쓰게 될 것이다. 짧고 명료하게, 쉽지만 깊이 있게! 부처님, 저를 도우소서.^^


한글전문은 다음과 같다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

  오온이 공한 것을 비추어 보고 온갖 고통에서 건지느니라.

  사리자여! 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으며,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니, 수 상 행 식도 그러하니라.

  사리자여! 모든 법은 공하여 나지도 멸하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으며, 늘지도 줄지도 않느니라. 

  그러므로 공 가운데는 색이 없고 수 상 행 식도 없으며,

  안 이 비 설 신 의도 없고, 

  색 성 향 미 촉 법도 없으며, 

  눈의 경계도 의식의 경계까지도 없고,

  무명도 무명이 다함까지도 없으며, 

  늙고 죽음도 늙고 죽음이 다함까지도 없고,

  고 집 멸 도도 없으며, 지혜도 얻음도 없느니라.

  얻을 것이 없는 까닭에 보살은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므로 

  마음에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어서, 

  뒤바뀐 헛된 생각을 멀리 떠나 완전한 열반에 들어가며, 

  삼세의 모든 부처님도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므로 

  최상의 깨달음을 얻느니라.

  반야바라밀다는 가장 신비하고 밝은 주문이며 위없는 주문이며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주문이니, 

  온갖 괴로움을 없애고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음을 알지니라. 

  이제 반야바라밀다주를 말하리라.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보리 사바하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보리 사바하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보리 사바하     


원문은 다음과 같다.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密多時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舍利子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是故 空中無色
사리자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시고 공중무색

無受想行識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무수상행식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 무노사 역무노사진

無苦集滅道 無智 亦無得 以無所得故 菩提薩陀 依般若波羅密多
무고집멸도  무지  역무득 이무소득고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

故心無罣碍 無罣碍故 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고심무가애  무가애고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三世諸佛依般若波羅密多 故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故知般若波羅密多
삼세제불의반야바라밀다  고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고지반야바라밀다

是大神呪 是大明呪 是無上呪 是無等等呪 能除一切苦 眞實不虛
시대신주  시대명주  시무상주  시무등등주 능제일체고  진실불허

故說般若波羅密多呪 卽說呪曰
고설반야바라밀다주   즉설주왈,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보리 사바하 (3번)   


02화 반야심경 명상 1: 여성화자의 등장 (brunch.co.kr)

반야심경 명상 1: 여성화자의 등장

by김경윤 May 28. 2021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

觀自在普薩 行深般若波羅密多 時     


주어(화자)는 부처가 아니라 관자재보살이다. 나중에 알게 되겠지만 대상(청자)은 사리자다. 사리자는 바라문 계급출신으로 목건련과 함께 부처님께 귀의한 성문(聲聞) 중 성문이다. 지혜제일이 제자로 부처의 10대 제자 중 한 사람이다. 그러니까 보살이 성문(아라한)을가르치고 있는 셈이다.


사리자(사리붓다, 사리불)은 부처님이 가장 사랑한 제자이자, 부처 사후 살아있었다면 부처님의 승단을 이끌 수제자이다. <숫타니파타>에서는 사리불이 부처의 계승자로 언급되어 있다.

관자재보살(관세음보살)은 대승불교와 더불어 태어난 캐릭터이다. 기원후 1세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관자재보살이 처음 만들어진 것은 쿠샨왕조시대(1세기 중엽에서 3세기 중엽까지) 간다라지방에서였다. 관자재보살은 철저히 대승불교운동의 ‘하화중생(下化衆生)’의 정신을 이어받은 것으로 자비와 구제의 심볼이다.

관자재보살의 원래 이름은 ‘아발로키테스바라Avalokiteśvara’로 “보는 것, 관찰하는 것avalokita이 자유자재롭다iśvara”는 것이다. 이는 현장의 번역이고, 구마라집은 ‘관세음보살’이라 번역했다. 우리에게는 구마라집의 번역이 익숙하다.  하지만 <반야심경>은 현장의 번역을 따르기에 관자재보살이라 쓴다.


석굴암에 있는 11면관음보살. 얼굴이 11개라서 세상 모든 곳을 대자대비한 눈으로 살필 수 있다.

대부분의 불교경전은 '나는 이렇게 부처님께 들었다'로 시작한다. 진리를 전하는 화자가 싯타르타 부처(남자)다. 그런데 <반야심경>의 화자는 여성(이라 고집할 수는 없지만 대부분 보살은 여성으로 그려진다.)이다. 이 자체가 혁명적이다. 석굴암에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아미타불 뒤쪽에 십일면관음보살이 있다. 사진을 보라. 영락없이 여성이다. (예전 국어교과서에 실린 현진건의 <불국사 기행>에는 십일면관음보살의 여성미에 대한 낯뜨거운 예찬이 길게  나열되고  있다.)

요즘 절에 가면 여성신도를 보살이라 한다. 남성신도는 거사다. 문학적 상상력을 발휘하여 현대적 그림으로 바꾸면 깊은 신앙심이 있는 여성신도가 주지스님을 가르치는 꼴이다. 상상만해도 통괘한 그림이다.

그러니 앞으로 남성 부처님이 아니라 여성 보살님이 진리를 설파하고 있다고 상상하며 읽기 바란다. 그것만으로도 신선하고 놀라울 것이다. (물론 반야의 지혜는 성을 초월하니 여성만 그 지혜를 얻는 것은 아니다.)

     

‘행(行)’은 실천한다는 동사이고, ‘심(深)’은 심오하다는 뜻이다. ‘시(時)’는 특정한 시점이라기보다 통시간적인 개념이다.


03화 반야심경 명상 2 :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brunch.co.kr)

반야심경 명상 2 :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by김경윤Jun 01. 2021


오온이 공한 것을 비추어 보고 온갖 고통에서 건지느니라.

照見 五蘊皆空 度一切苦厄    

 

싯타르타 부처 생애에 가장 커다란 전환점은 두 차례 일어났다.


사문유관 중 남문을 나섰을 때 병든자를 목격하는 장면

첫째가 부족함 없이 쾌락에 넘치는 궁궐생활을 하다가 저잣거리로 나가서 늙고, 병들고, 죽은 자를 목격한 것이다. 왕자 싯타르타는 충격에 사로잡힌다. 무엇 하나 부족한 없는 삶을 살아가는 귀족적 생활과는 전혀 다른 비참한 삶이 궁궐 밖에 있었다. 문제는 그 생노병사(生老病死)의 운명이 궁궐 안이라고 해서 비켜갈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달은 것이다. 부유하든 가난하든, 귀족이든 천민이든, 젊든 건강하든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 태어나 늙고 병들고 죽는다는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 싯타르다 자신도,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도, 권력의 위치에 있었던 아버지도 예외는 아니었다. 불교적 설화는 이를 싯타르타의 사문유관(四門遊觀)이라 전한다. 싯타르타 왕자가 마지막에 북문 바깥에서 만난 사람이 수도승이었다. 생노병사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있다고 형형한 눈빛으로 싯타르타에게 말하자, 싯다르타는 출가를 결심한다. 그의 나이 29세였다.


둘째는 그렇게 모든 것을 버리고 출가하여 생노병사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참된 나(眞我, 아트만)을 찾아 수행하다가 참된 나란 없다는 것(無我, 아나트만, anatman)이라는 통찰에 이르른 것이다. 나란, 나의 의식이란 결국 수없이  많은 인연(因緣)에 의해서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것이라는 것. 영원하다는 신조차도 이러한 연기(緣起)로부터 한치도 벗어날 수 없다는 것. 고통이란 이러한 연기적 모습을 깨닫지 못하여 집착하는 자신의 무지로부터 비롯된다는 것. 그러한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참된 나란 없음을, 이 세상의 모든 현상이 영원하지 않음을 깨달은 것이다. 한자성어를 섞어 표현해보자면, 일체개고(一切皆苦)는 제법무아(諸法無我)와 제행무상(諸行無常)임을 알 때 사라진다는 것이다.    

 

부처의 이 무아(無我)의 깨달음은 대승불교로 계승되면서 공(空)으로 압축된다. ‘공(空)’은 비어있다는 뜻이 아니다. 나도, 이 세상도, 그리고 이 세상을 겪으며 생기는 나의 생각도 영원하지 않다는 것이다. 영원하지 않을 것을 영원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집착이고, 이 집착에 머무르는 것이 고통이다. 썸씽 스페셜(something special)한 것은 없다.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everything)은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것(nothing)이 된다. 그러한 눈으로 바르게 세상을 볼 때 진정한 자유와 해방을 맛볼 수 있다. 이러한 공사상은 새로운 것을 세우려는 노력이 아니라, 망상으로 세워진 헛된 것들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고통의 탑도 그렇게 무너진다.      


‘조견(照見)’은 비추어 밝히 안다는 뜻이다. ‘오온(五蘊)’은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 이 다섯을 말한다. 이 중에서 색(色, 루빠rūpa)은 물질적인 요소의 총칭이다. 지수화풍(地水火風)의 4요소로 구성된 우리의 육체도 루빠이다. 이것은 물질적인 것이고, 나머지 4온은 정신적인 것이다. 수온(受蘊, vedanā)은 감각기관의 감각작용(perception)이고, 상온(想蘊, saṃjnā)은 생각하는 표상작용(representation)이고, 행온(行蘊, saṃskāra)은 의지로 움직이는 의지작용(volition)이고, 식온(識蘊vijnāna)은 판단력을 갖춘 의식작용(consciousness)을 말한다. 색→수→상→행→식은 물질의 차원에서 정신으로 차원으로 진화되는 조합과정이다. 이 세상을 구성하는 모든 것도, 그러한 과정에서 생기는 정신적 현상도 모두 공(空)하다. ‘도(度)’는 건너다, 구제하다는 뜻이다. 액(厄)은 재앙, 불행, 멍에, 사나운 운세 등을 뜻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도, 우리의 생각도 인연에 따라 모두 일시적으로 형성되었다가 사라지게 된다. 고통과 재앙도 마찬가지다. 이 또한 지나간다. 놀라지 마라, 두려워 마라. 무소처럼 당당하게 갈 길을 가라. 사자처럼 용감하라. 공(空)을 깨달아 자유로워라.


04화 반야심경 명상 3 : 깨달음과 수행 (brunch.co.kr)

by김경윤Jun 13. 2021

반야심경 명상 3 : 깨달음과 수행


사리자여! 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으며,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니, 수 상 행 식도 그러하니라.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2007년 이안 감독이 연출한 <색,계(lust, caution)>라는 영화가 있었다. 1979년 장아이링이 발표한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는 이 영화는, 1940년을 전후로 하여 실제로 일어난 사건들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상하이를 배경으로 전개되는 이 영화는 친일파의 핵심인 정보부 대장 ‘이’(양조위 분)와 그에게 접근하여 암살하려는 항일단체의 일원인 막부인(탕웨이 분) 사이에 벌어지는 일들을 그리고 있다.

욕망(色,lust)이라는 위험한 도구를 사용하라는 항일단체의 잔인한 계율(戒,caution)은 성공할까? 사랑은 하되, 진짜 사랑은 하지 말라는 이 모순적인 명령을 연극부원 막부인은 현실 속에서도 잘 따를까?  (궁금하면 영화를 보시길.)   

우리의 말 속에서 “색을 밝힌다”는 말이 있다. 주로 성욕과 관련되어 사용되는 이 말은 색(色)이 가지는 매혹과 위험을 동시에 보여주는 말이다. 색욕(色欲), 식욕(食欲), 수면욕(睡眠欲)은 인간이라면 피해갈 수 없는 근원적인 욕구에 해당한다. 여기에서 자유로운 자 얼마나 될까?     


불교 경전에 나오는 색(色)은 이러한 욕망보다 더 의미와 용법이 광범위하다. 불교도라면 색으로 시작되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연속단어들은 수상행식(受想行識)이라는 오온(五蘊, 다섯 더미)이다. 그때의 색(色)은 물질세계에 대한 총칭이다. 한편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이라는 육식(六識)과 관련된 단어도 떠오를 것이다. 인간 주체의 감각과 인식기관인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意)이 대상과 만나 형성된 의식이 바로 육식(六識)이다. (이 육식과 관련되서는 뒤에 다룰 것이다.)     

정리해보자면, 색(色)은

1) 일반적으로는 성욕과 관련되어 있으며

2) 불교적으로는 형상을 가지고 있는 전체 물질세계

3) 인간의 신체기관인 눈을 이용하여 인식하는 시각적 이미지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인용문의 색(色)은 2)에 해당한다.     


본문의 '사리자'는 부처의 수제자 사리붓타이다. 부처님 살아생전에 부처의 말씀을 들은 성문(聲聞)제자다. 그런데 그가 관자제보살에게 지혜의 말씀을 듣는다. 현실적으로는 말도 안되는 상황이다. 하지만 <반야심경>의 설정은 그렇다. 보살이야말로 대승불교의 화신이며, 모든 신도들의 표상이다. 성직자와 신도의 경계는 무너진다. 오직 깨달음만이 있을 뿐이다. 

'불이(不異)'는 다르지 않다는 뜻이다. 불교는 현상계[色]과 깨달음의 세계[空]을 다르지 않다고 본다. '즉시(卽是)'는 같다는 뜻이다.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을 통해 반복 강조한다. 현상계는 진리의 세계와 같고, 진리의 세계는 현상계와 같다. '역부역시(亦復如是)'는 이하동문이란 뜻이다. 그러니까 오온(五蘊)을 다섯 문장으로 반복해 쓰지 않고, 달랑 두 문장으로 축약한 것이다. 마치 상장을 받을 때 처음 학생에게만 전문을 읽어주고, 나머지 학생에게는 ‘이하동문’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런데 이 짧은 문장은 묘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논리적으로만 치자면 색불이공(色不異空),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고만 써도 문제 없는데, 다시 말해 우리가 경험하고 안다고 생각하는 모든 세계가 공(空)하다고만 말해도 되는데, 왜 공불이색(空不異色), 공즉시색(空卽是色)이라는 문장을 추가한 것일까?         

            


색불이공(色不異空)이나 색즉시공(色卽是空)이 깨달음의 단계라면, 공불이색(空不異色)이나 공즉시색(空卽是色)은 깨달음의 눈으로 다시 세상을 보라는 수행의 단계가 아니었을까? 

살다보면 몰라서 못하는 경우도 있지만, 알아도 안하는, 또는 못하는 경우도 많다. 깨달음이 인식의 변화라면, 수행은 삶의 변화이다. 깨달음과 수행은 단순한 선후단계가 아니다. 알면 그렇게 살아지기도 하지만, 살다보면 알아지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불가에서는 깨달음[悟]과 수행[修]을 놓고 돈오돈수(頓悟頓修)니 돈오점수(頓悟漸修)니 논쟁했던 것이리라. 깨달음은 순식간에 오지만, 수행은 순식간에, 혹은 점차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이 논쟁은 참으로 역사가 깊다.

나는 차라리 점오점수(漸悟漸修)를 말하리라. 깨달음의 길도 멀고, 수행하는 삶의 길은 더욱 멀어라. 그러나 어쩌라. 제 깜냥만큼 흔들리며 걸어갈밖에.   심우도에 나오는 어린 동자처럼. 나의 소를 찾아서 오늘도 걸어가는 길!

        


05화 반야심경 명상 4 : 부서지지 않으리 (brunch.co.kr)

반야심경 명상 4 : 부서지지 않으리

by김경윤Jun 16. 2021


사리자여! 모든 법은 공하여 나지도 멸하지도 않으며,

舍利子 是諸法空想 不生不滅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으며, 늘지도 줄지도 않느니라.

不垢不淨 不增不感     


1980년와 90년대는 변혁의 시기였다. 군사독재에 맞서 학생운동, 노동운동, 종교운동, 정치운동이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을 조직하고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시대였다. 대학의 사회과학서점을 중심으로 다양한 혁명이론서적들이 비공개, 반공개의 방식으로 유통되었다. 각종 문화패들이 결성되었다. 그중에서도 노래패들의 활동이 눈부셨다. 투쟁가요들이 대거로 창작되어 현장에 공급되었다. 대부분 시위현장에서 부를 수 있는 군사풍의 노래였다. 주먹을 위로 뻗으며 한목소리로 외치는 노랫소리는 광장을 울리고 하늘로 퍼져나갔다.

심장을 뛰게 만드는 노래들이 대부분이었는데, 개중 가슴을 적시는 노래가 있어 무뎌진 정서를 촉촉하게 적셨던 기억이 난다. 예를 들면 천지인이 부른 <청계천 8가>와 같은 노래는 잔잔하게 당대 현실을 묘사하였다.

하지만 내가 가장 좋아한 노래는 민중운동연합의 이름으로 펴저나간 <부서지지 않으리>라는 노래다. 가사를 음미하면 뭔가 철학적이랄까 종교적이랄까, 다른 민중가요에는 없는 세계관이 분명히 그 노래 가사 속에는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노래는 김준태의 시에 이미영이 곡을 붙여 만든 것이었다. 노래 가사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사라진다는 것 부서진다는 것

구멍이 뚫리거나 쭈그러진다는 것

그것은 단지 우리에게서 다른 모양으로 보일 뿐

그것은 깊은 바닷속 물고기처럼

지느러미 하나라도 잃지 않고

이 세상 구석구석 살아가며 끝없이

파란 불꽃을 퉁긴다

사라진다는 것 부서진다는 것

그것은 단지 우리에게서 다른 모양으로 보일 뿐


나에게 적지 않은 위로를 준 이 노래는 <반야심경>의 위 구절과 퍽이나 잘 어울린다. 살짝 변형하여 다시 인용하면 "이 세상 모든 생각은 텅 비어 생겨나지도 사라지지도 않는다. 더립지도 깨끗하지도 않다. 늘어나지도 줄어들지도 않는다."

인간이 경험하고 인식하는 세상은 태어나고 죽는다. 어떤 것은 더럽고 어떤 것은 깨끗하다. 재산이나 소유물은 늘어나고 줄어든다. 그러나 우주적 관점에서 보자면 그 어느 것 하나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우리에게서 다른 모양으로 보일 뿐"이다. 모든 존재는 "이 세상 구석구석 살아가면 끝없이 파란 불꽃을 퉁기"는 연기의 변형태일 뿐이다. 사는 것도 죽는 것도, 깨끗한 것도 더러운 것도, 늘어나는 것도 줄어드는 것도, 이 세상 모든 것이 모두 공하다. 이 전언이 그대에게 위로가 되는가? 공포가 되는가?

적어도 나에게는 허무나 공포가 아니라, 힘든 세상을 다르게 볼 수 있는 위로가 되었다. 여러분도 그리하길 기도한다.


https://youtu.be/2N3ZfXWag2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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